20대 KBS전속 성우 시절, 나는 틈만 나면 주차장에 가서 혼자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책을 읽거나 노트에 뭔가를 끄적거리면서. 아르바이트 한 번 제대로 안 해보고 입사한 내게 ‘사회생활’이란 이름의 일상은 부딪히는 곳, 닿는 곳마다 송곳처럼 아팠다. 좋은 것이 왜 없었으랴만 그 때의 나는 온 신경을 내 아픔에만 집중했다.우리는 매 순간 자신이 무엇에 집중하느냐에 따라 행복해지기도 하고 불행해지기도 한다. 로또 한 장을 사들고 일주일 내내 입이 헤벌어지는 즐거운 상상만하면서 보낼 수도 있고 속상한 일, 후회되는 일, 걱정되는 일에
나에게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열다섯 살 위 외삼촌이 있다.그 누구보다도 스마트하고 유쾌한 우리 외삼촌은 특히 말솜씨가 아주 뛰어나다.삼촌의 이야기 솜씨를 증명하는 일화 하나.1980년이던가,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 이 개봉했다. 한창 추리소설 좋아할 나이였던 난 친구들과 함께 보러가기로 약속을 하고 그 날만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영화를 보기로 한 그날 아침, 외삼촌에게 자랑을 한 것이 사단이었다.“그으래? 나도 그 영화 봤는데.”“재밌어? 어떤 내용이야, 삼촌?”곧 보러 갈 영화 내용은 왜 물어봤는지... 나는
아들아이가 킥보드를 타다 넘어져 양쪽 팔에 깁스를 했다. 그러고 나니 아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덩달아 나까지 참 힘들어졌다.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대소변 누이고 책보 싸고 풀고...허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아들과 찰싹 달라붙어 지낸 덕분에 아들아이가 친구 문제로 가슴앓이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어디선가 주워들은 육아지식 중 아이들 고민에는 엄마 아빠의 구체적인 과거사를 들려주는 것이 가장 큰 도움이 된다던 것이 떠올라 까마득한 초등학교 시절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6학년 봄, 나는 나와 잘 지내던 J가 갑자
얼마 전, 남북 정상이 백두산 천지에 오른 소식에 내가 천지에 올랐던 20대의 여름이 떠올랐다.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기 직전이던 1992년 7월, 성우협회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배우들과 한중합작 라디오드라마 제작을 하기위해 중국을 방문했다. 함께 드라마를 제작하고 그쪽 분들과 친교의 시간을 갖는 것 외에도 만리장성, 자금성 등의 유명 관광 코스를 둘러보는 일정이었다.당연히 백미는 백두산 천지였다.개혁개방을 시작했다고는 하지만 1992년의 중국은... 아, 알 사람은 알 것이고 모르는 사람은 영원히 모를 것이다. 아무튼 그 끔찍한 여
2004년 겨울, 생후 2개월 된 말티즈 한마리가 양말에 담겨 우리 집으로 왔다. 꽉 쥐면 터질 것만 같던 그 작고 보드랍고 몽클거리는 생명은 아침마다 내 온 얼굴을 핥으며 침대 위를 날아다녔다. ‘기쁨이 샘솟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첫날밤을 보내고 난 아침, 그 혓바닥 세례 속에서 강아지 이름을 ‘샘물이’라고 지었다. 기쁨의 샘물.그 후, 강아지 혼자 오래두면 우울증에 걸린다는 핑계로 내가 다니는 모든 곳에 샘물이를 데리고 다녔다. 심지어 방송국 스튜디오 안까지 개를 데리고 들어가 녹음을 했다. 천만다행 샘물이는 좀처럼 짖지 않
어딘가 도회적이고 이지적이며 창백한 남자.노타이 차림으로 셔츠 윗 단추 하나쯤 풀어 헤치고 소매를 걷어 올린, 금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남자.어린 시절 내가 품었던 대학교수라는 직업의 이미지다.그런 내 편견을 첫 만남부터 박살내 주신 건 대학 2학년 전공 시간에 만난 K교수님이다.대한민국 부동의 초일류대인 S대를 졸업하고 이름대면 남들이 다 아는 대학의 정식 교수가 되기까지의 지난했을 과정이 첨 뵌 순간 촤르르 그려졌다.늘 연구실에 계실 텐데도 금방 밭에서 김매다 오신 듯 거무튀튀한 얼굴,좀 심하다 싶게 들쭉날쭉한 치아. 그 속에서
친구 A와 O는 어느 날 삶은 계란 흰자와 노른자에 관한 아주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함께 재수학원을 다니고 같은 대학에 다녔던 둘은 직장까지 같은 동네로 가게 되면서 절친 관계를 십 수 년 째 이어오던 중이었다.둘은 냉면, 쫄면 따위를 먹을 때마다 함께 나온 삶은 계란 반쪽을 사이좋게 나눠 먹곤 했는데 A는 늘 당연하다는 듯이 흰자를 O에게 주었고 O는 노른자를 A에게 주었다.“ 삶은 계란 흰자를 좋아하세요, 노른자를 좋아하세요?”그러던 어느 날 미팅에서 만난 한 남자가 둘에게 이런 질문을 던졌다.A는 당연
꿈과 현실의 연계가 느린 편이다.아주 아주 오래도록 꿈속의 나는 내내 학생이거나 싱글이었다. 꿈속의 내 정체성이 학생에서 성우가 되기까지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했고 아이 엄마가 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최근에야 비로소 아이 엄마, 학부형 된 꿈을 꾼다.애 엄마가 된다는 것은 좀 고된 일이니 그렇다 치고내 무의식은 왜 내 직업인 성우를 그렇게 오랜 세월 거부했던 걸까?25년 전, 처음 성우가 되었던 90년대 초반의 일들을 돌이켜본다.방송국 복도와 로비에 나가면 최진실, 채시라 같은 대스타를 언제든 볼 수 있던 때였다. 커
연일 폭염이다. 아침부터 에어컨을 틀고 싶은 욕망과 싸우며 1994년 여름을 생각한다. 도대체 얼마나 더웠기에, ‘그래도 1994년만큼은 아닐 것이다’라는 전망을 해마다 듣게 되는 것일까.1994년, 그때 나는 새벽 6시부터 8시까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시사경제 프로그램을 맡고 있었다. 5시에 집에서 출발, 8시 방송이 끝나면 구내식당에서 후닥닥 아침을 먹고 녹음 음악방송을 하나 더 하고는 아침 10시쯤, 유열의 음악앨범을 들으며 퇴근했다. 취직한 친구들은 한참 일할 시간이고, 백수인 친구들은 자고 있을 시간... 혼자 있음에 익숙
바야흐로 노출의 계절, 샤워를 하며 핑크색 면도기를 집어 들다가 문득 내 암울했던 소녀 시절 생각이 났다.누구에게나 흑역사가 있다. 스스로를 찌질하다고 여기는 때 말이다.중2에서 중3으로 넘어가던 시절의 내가 그랬다.나는 내 신체의 급격한 변화를 체념하듯 받아들이던 중이었다.사춘기 무렵 눈에 띄게 예뻐지는 아이들도 더러 있지만 불균형한 호르몬 탓에 멀쩡하던 얼굴과 몸의 균형이 깨지면서 밉상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 나도 그랬다. 급격히 살이 쪘고 얼굴도 팅팅 부었다. 초경이 시작된 후로는 온 몸 여기저기에 털도 났다. 교과서에서 배
층간 소음 걱정 없는 곳에서 아들을 맘껏 뛰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살던 아파트를 세놓고 전세를 다닌 지 어언 8년.‘손바닥만 하더라도 마당이 있는 1층일 것’이 집 찾기의 유일한 조건이었다.내가 사는 세검정엔 그런 집들이 많아 집구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집주인이 갑자기 나가라고 하면 답이 없다는 것이 함정.지난 봄, 계약 기간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무작정 비워달라는 집주인의 요구에, 5년간 정든 -개천에서 청둥오리가 헤엄치고 거실 소파에 앉아 백로가 날아가는 것을 볼 수 있는- 북한산 계곡을 떠나 이사를 왔다.숲 속에서 살던 기쁨
아직은 외모에 신경을 꽤 쓰던 삼십대 중반, 서울에 있는 모 대학 방송연예학과에서 신입생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매번 잡지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차림새로 수업에 들어오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 애의 패션이 어찌나 감각 있고 세련됐던지 그 애 옆에 다가서면 괜히 주눅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선생 체면에 기가 죽긴 싫어서 애써 외면하며 한 학기를 보냈다.가을이 되고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이미 대학생활 한 학기를 보낸 그 애의 세련미는 더욱 농익어 갔다.결국 어느 날, 말하지 않고는 참을 수 없어서 용기를 냈다.“너는 정말 옷을
시간 약속을 칼 같이 잘 지키는 타입은 아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약속 장소에 5분 10분 늦는 일이 더 많은 밉상 인간이다. 그럼에도 원고 마감 시간만큼은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던 것이 유일한 나의 자랑이었는데... 슬프게도 지난 주 평생의 규칙을 깨고 말았다.고백하자면 지난 몇 주 마음이 어지러워 글을 쓸 수 없었다. 지난 글에서 언급했듯이 나는 대한민국에 와 있는 탈북민들과 인터뷰 방송을 진행해왔다. 햇수로 8년, 만난 숫자가 4백에 가깝다. 그 많은 만남을 통해 북에 대해 얻은 지식에 실향민인 부모님을 가졌다든가 하는 이
를 즐겨본다. 샘 킴과 이연복 셰프가 특히 좋다. 샘 킴은 자기 철학을 버리지 않는 우직함이 좋고, 이연복 셰프는 깊은 내공 위에 유연한 순발력을 갖추어서 좋다.실제 두 사람의 성품과 기질이 어떤지는 모른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자신이 상대에게 덧씌운, 자신이 동경해마지 않는 이미지를 사랑하는 거니까. 그리고 자신이 동경하는 기질이라는 것도 완전 모순인 경우가 다반사다. 우직함과 유연함이라니...이미 경지에 오른 8인의 셰프들은 오로지 그날 출연자의 입맛에 따라 승패가 갈린다.결국 누가 상대의 마음을 사로잡느냐의
아소, 님하!도람 드르샤 괴오쇼셔!내가 대학시절 좋아했던 고시가(古詩歌)의 한 구절이다. 이 시는 정서(鄭敍)가 지은 고려가요 ‘정과정곡’의 한 구절로 ‘님이시여, 제발 마음을 돌리시어 나를 다시 사랑해주십시오’라는 뜻이다.마음속으로 이런 외침을 품어본 일 없이 십대와 이십대를 보내기는 힘들다.슬픈 것은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는 것. 미더운 연인 사이에는 애초에 이런 울부짖음이 필요치 않다. 아무리 외쳐보아야 그는, 그녀는 이미 당신을 떠났다.이 시를 쓴 시인의 님은 사랑하는 이가 아니라 임금님이었다고 하는데... 임금님의 마음은.
마지막 이야기하필이면 똑똑한 놈을 만나 더 피해를 본 것은 가정환경 탓이었다. S에겐 학벌, 외모, 스펙... 그 무엇으로도 비교 불가한 너무나 똑똑하고 잘난 동갑내기 오빠가 하나 있었다. (오빠는 1월생, S는 같은 해 12월생) 부모님들은 그 오빠에게 인생을 거셨다. 생김새도 학교 성적도 그럭저럭 상위권인 S였지만 부모님의 모든 기대는 이미 오빠에게 다 가있었다. ‘S야, 너는 그냥 이대나 가면 돼, 뭘 힘들여 공부하니.’ S는 ‘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 못살아.’ 하는 악담을 듣는 것이 차라리 더 좋았을 거라고 했다. 그 악담
- 패턴은 반복된다. 원인을 알기 전까지는-패턴은 반복된다.S의 상담선생님이 S와의 첫 만남에서 들려준 얘기다. 모든 사람은 연애를 할 때 자기만의 패턴을 반복한다. 그랬다. S는 언제나 가볍게 사랑에 빠지고 불같이 뜨거워졌다가 얼마 안 가 식어버렸다. 단 한 번의 예외를 빼고.그 예외는 바로 S가 처음으로 길고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그래서 주저 없이 결혼했으나 밤마다 옛 남자의 숫자를 헤아리게 만든 바로 그 남자였다. 그런데... 그 남자는... 게이였다. (사족: 저는 동성애자에게 어떤 편견도 없습니다. 나아가 동성결혼 합
S의 외모를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상위 30%의 끝자락쯤? 그것도 풀메이크업을 한 상태에서 그 정도였다. 게다가 S에게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곱디곱게 화장을 하고서는 넝마 같은 옷을 입는다든지, 다들 숨어서 피우는 담배를 굳이 첫 대면에서부터 뻑뻑 빨아댄다든지, 발라드 아니면 운동권 가요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그 시절, 전국노래자랑에 나오는 트로트 음악만 듣는다든지... 그런 행동들이 이성에게는 별로 매력적일 것 같지 않았건만 묘하게도 그녀의 애프터 확률은 90%였다. 우리는 그것이 어딘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예
18세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한다.40세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60세 때, 어느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사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담자들이 들려주는 ‘18, 40, 60의 법칙’이다.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타인에게 그닥 관심이 없으니 그들과 섞이는 것을 너무 두려워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법칙이다. 뭐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아이돌 스타이거나 정현 선수급의 스포츠 스타라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대부분의 갑남을녀는 자신과 같은 레벨의 갑남을녀에게 큰 관심이 없
오늘은 레드라이트다. 스스로의 비겁을 고발하는,성우도 연기자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내 직업인 성우는 연기자가 맞다. 나도 한때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했었고 현재는 연예인 노조 소속 연예인이다. 그런 내 눈에는 엄청난 부와 명예를 자기 힘으로 쟁취한 미국의 할리우드 여배우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잘난 사람으로 보인다. 예컨대 안젤리나 졸리, 메릴 스트립 같은 여성들... 나와 같은 빛깔의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 비슷한 꿈을 간직하고 노력했지만 그들이 이룬 것과 나의 처지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