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얼마 전 촛불집회가 있었던 토요일 저녁, 함께 거리에 나섰던 지인들과 조촐한 뒤풀이 자리를 가졌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가던 중 누군가 어느 원로 지식인의 근황에 대해 말을 꺼냈다. 궁금했다. 언젠가부터 정치성향이 급격히 한쪽으로 기울어졌던 그분은 현 시국에 대해 어떤 입장을 갖고 계실까. 지인의 전언에 따르면 그분은 대부분의 보수가 돌아선 지금도 여전히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거두지 않고 있었다. 술자리 여기저기에서 자연스레 탄식이 흘러나왔고, 나 역시도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그렇지만 집으로 돌아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예전 어느 기관에 몸을 담고 있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당시 나는 소속 부서가 아닌 다른 곳에 파견을 나가 일을 하고 있었다. 어느 날 원래 있던 곳의 직속 상사가 나를 조심스레 불러냈다. 그는 내게 일은 잘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분위기로 보아 단순한 안부 확인은 아닌 듯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았다. 혹시 제가 잘못한 거라도 있습니까.상사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내가 파견 나와 있는 곳의 책임자와 얼마 전 식사를 함께 했는데 그 자리에서 내 이야기가 나왔단다. 그런데 나에 대한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청와대 비선실세. 정국을 뒤흔들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무수한 뉴스와 언급들 중에서 가장 슬프게 다가왔던 표현 하나가 있었다.헬피엔딩.어느 누리꾼이 앞으로의 전개를 예측한 글에 들어있는 표현이었는데, 본문의 내용은 간단했다. 이 난리에도 불구하고 결국 책임지는 이도, 제대로 처벌 받는 이도 없이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예상이었고,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헬피엔딩이라는 표현에 눈길이 멈추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도 우리의 전형적인 역사처럼 헬조선의 헬피엔딩으로 끝나리라는 이 집단적인 우울함은 과연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세상이 아직 시끄러워지기 전이었던 지난 주말 오후, 점심을 때우기 위해 치킨 한 마리를 배달시켰다. 집에서 배달음식을 먹을 때면 언제나 그러하듯 거실 탁자 위에 치킨과 무와 음료와 밥 한 그릇을 정성스레 차려놓고, 배경화면을 위해 텔레비전을 틀어 아무 채널이나 맞춰놓았다.화면에서는 처음 보는 드라마가 나오고 있었다. 그렇지만 불과 십여 분만에 어떤 내용인지 대충 짐작이 되었다. 재벌가의 성격 더러운 아들이 나오고, 청순하면서도 예쁘고 착한 여자가 나오고, 깨끗한 피부에 단정한 헤어스타일을 갖춘 정의롭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대학원 석사 과정 때의 일이다. 지금은 대학 교수가 되어 잘 살고 있는 모 선배, 그 역시도 한 때는 이 대학 저 대학을 떠돌아다녀야 했던 보따리 시간 강사였다. 대부분의 대학이 성적정정기간 중이었던 어느 날, 선배가 연구실 앞에서 내게 짤막하게 고충을 토로했다. 이제부터 학생들이 전화를 걸어올 텐데, 그 생각만 하면 벌써부터 씁쓸해진다고 했다.어쩌겠어요. 근거자료들을 대면서 납득시켜줘야죠.그는 단순히 이의제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라고 했다. 지난 학기였다. 한 학기 내내 자신을 유난히 따르던 학생이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얼마 전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인테리어 공사만 끝났을 뿐 아직 영업은 하지 않고 있던 휴대폰 매장이 눈길을 끌었다.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휴대폰 가게가 내 발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그 앞에 커다랗게 박혀 있던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매장”이라는 내용의 홍보 문구 때문이었다.처음에는 그 대담한 문구를 보면서 아무리 경쟁세상이라지만 이건 좀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가 아닌가 싶어 씁쓸했다. 그렇지 않은가. 아직 개업도 하지 않았는데, 이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매장이라니. 아니면 이제는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지난 늦봄이었다. 몇 개월 동안 벼르고 고르던 끝에 인터넷 마켓에서 노트북을 하나 주문했다. 모델을 결정하기까지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던 것은 다름 아닌 가격 때문이었다. 이것저것 원하는 사양을 고려하다 보니 아무래도 고가의 라인업을 선택해야 했다. 최근 10년 간 병원비와 원룸 보증금을 제외하면 한 번에 그렇게 많은 돈을 지불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결심이 늦어졌다.오랜 망설임 끝에 결정한 노트북이니 인터넷에서 컴퓨터를 팔고 있는 그 수많은 매장을 둘러볼 때는 또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겠는가. 처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조정래의 소설 『한강』을 읽었던 것은 15년 전 전남 장성에 있는 상무대에서였다. 당시 나는 소위로 임관한 후 포병학교에서 5개월간의 병과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때는 틀에 박힌 생활이 무척이나 답답하고 지겨웠기에 야전으로 나갈 날만을 매일같이 기다렸다.그렇지만 이제 와서 돌아보면 포병학교에서의 생활은 군에서는 물론이요 내 인생에서도 그때처럼 안정적인 시기가 또 있었을까 싶은 그런 시간이었다. 열 권짜리 대하소설을 선뜻 집어들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단순히 기억의 보정만은 아닐 것이다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우리 집에는 다섯 살 된 강아지가 있다. 식탐과 애교가 유달리 많은 이 갈색 푸들의 이름은 ‘미남’,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할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다. 어머니도 예외는 아니셔서, 미남이를 안으실 때마다 이런 멘트를 날리시곤 한다.“우리 예쁜 미남이는 대체 어느 별에서 온 거니?”미남이를 처음 만났던 것은 4년 전 경기도 외곽의 어느 대형 펫샵에서였다. 원래는 유기견을 데려오고 싶었지만, 여차여차한 사정 때문에 업체를 통해 어린 강아지를 분양 받기로 했다. 널따란 부지에 2층 건물을 통째로 쓰고 있던
【투데이신문 이석재 칼럼니스트】 평소 경외심을 갖고 있는 다섯 가지의 직무가 있다. 야전군 지휘관과 강력계 형사, 소방관, 외과의사 그리고 에어컨 설치기사. 어디 가서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외과의사까지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마지막에서 다들 의외란 표정을 짓곤 한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갖게 된 데에는 작은 계기가 있다.2년 전 봄날이었다. 가까운 지인이 그해 여름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신혼집은 남산 근처 어느 고층아파트 단지로 결정되었고, 결혼식 날짜보다 두 달 앞서 입주하게 됐다. 그 전에 가전제품과 가구들이 먼저 들어오기로 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