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발생하면서 사회 각계각층에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그 전까지 미루어두었던 변화에 가속이 붙고, 애써 무시 해왔던 문제가 수면 위에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종교에서도 일어났다.한국 사회에서 코로나19 국면을 맞이하여 가장 먼저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종교와 세속의 문제”와 “종교에 대한 고정관념”의 문제였다.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이하 신천지라고 줄여서 쓰겠음.)의 신자가 코로나19 바이러스에 감염됐고, 신천지라는 종교가 가진 특수성으로 인해 신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종교는 “함께 모임”의 경험에 기반을 한 조직인데, 현재는 이 경험이 중단된 상황입니다. 대학 교육만 해도 평생 안 해 본 온라인 교육을 한다고 강사들이 부산을 피우고 있는데, 이 경험은 분명 앞으로 강의에 영향을 줄겁니다.1)위의 인용문은 대학에서 종교학을 강의하고 있는 필자의 한 선배가 종교학 연구 기관에 투고한 글을 필자가 조금 고친 것이다. 종교라는 거대한 덩어리, 그것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유행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창 평지풍파를 일으킨 “종교”를 가르치는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 대상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필자는 이번 학기에 “한국 종교의 흐름”이라는 과목을 개설했다. 이 과목을 개설하는 과정에서 과목의 이름을 지어야 됐는데, “한국 종교의 역사”와 “한국 종교의 흐름” 사이에서 과목의 이름을 고민했다. 단과대학 학장과의 상의 과정에서 학장이 교양 과목의 특성상 “한국 종교의 흐름”이라는 과목이 더 낫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그 과목의 이름은 “한국 종교의 흐름”으로 정해졌다. 과목이 개설된 후 강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흐름”이라는 말의 정의를 찾아봤다. 그런데 “흐름”이라는 말의 뜻 가운데 “역사”라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에 무학 자초의 출생의 미스테리를 소개한 적이 있다. 무학 자초는 조선 건국에 이바지했던 조선의 초대 왕사(王師)였다. 이와 같은 그의 위상과 달리 그의 출생과 신분은 밝혀진 것이 없다. 특히 그가 서얼이나 천민 출신이라는 기록도 남아 있는데, 낮은 신분에서 입지전적 인물이 되었음을 보여줌으로서, 무학의 신비함과 위대함을 더욱 드러내고자 한 의도도 있을 것 같다는 예상도 했다.다음 미스테리는 무학 자초의 행적이다. 특히 조선 개국 전까지의 무학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이것을 소개하기 전
고려 말 조선 초에 왕조가 교체되면서, 더불어서 유교와 불교가 교체되는 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1) 그런데 유교와 불교의 교체가 당연한 것이었을까? 성리학은 승려와 사찰이 부패한 권력과 결탁해서 농장을 확대하고 사치를 부린다는 등의 부패를 지적했다. 이것을 통해 성리학으로 대체하기 위한 당위와 명분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전에 1000년이 넘게 백성들의 사상적 기반이 됐고, 여전히 정치적 경제적 힘을 가지고 있었던 불교를 한 번에 위축시킬 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학은 고려의 불교를 유지하고 혁신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그 대표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무학 자초(無學 自超, 1327-1405)는 우리가 흔히 무학대사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중등교과 과정을 비롯해서 역사 과목에서 우리는 무학대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런데 무학대사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그만큼 무학대사의 생애와 행적에 대하여 남아있는 기록이 적다는 의미이다. 역사적인 인물이 행적이 알려지지 않은 경우는 많다. 그러나 그런 인물들은 고대에 생존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고대의 인물의 경우 대부분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이나 개인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칼럼에서 필자가 실수한 것이 있다. 그 실수는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에 대한 소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전 편에서 “청한자”라는 호가 있다는 것에서 김시습의 도사로서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데, 현재 한국의 도교와 관련된 문헌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만큼 차후에 소개하겠다는 약속을 한 적이 있다. 이번 지면을 통해 그 약속을 조금이나마 이행해보고자 한다.김시습은 조선 도교의 개조(開祖), 즉 조선 도교의 맥에서 시작점이 되는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한국의 사상사에서 중국의 사상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조선의 종교지형을 한 마디로 “숭유억불(崇儒抑佛)”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많다. 이단(異端)에 대하여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 성리학을 사상적 기반으로 했고, 사찰의 수를 인위적으로 줄였으며, 조선 중·후기에는 가정의 의례까지 대 성리학자인 주희(朱熹)가 쓴 책인 『주자가례(朱子家禮)』의 의례를 보급했으니 이 말이 맞게 보일 수도 있다.이러한 조선시대의 모습 이면을 조금 자세히 보면 조선조에 불교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역대 왕 중 일부는 현대 학계에서 불교 신앙을 가진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몇 차례 언급했지만, 곽재우는 충(忠)과 효(孝), 절의(節義)를 중요하게 여기는 성리학자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동시에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간주하는 도교의 양생술과 도술을 익히고, 이를 임진왜란에서 활용한 모습도 보인다. 이러한 곽재우에게 그 이외의 다양한 모습도 보인다.우선 불교와의 관계이다. 곽재우는 전공(戰功)을 세운 의병장이었지만, 성리학에서 이단(異端)으로 간주했던 도교의 술법을 익혔다는 이유로 탄핵받았다는 것은 수차례 밝힌 바가 있다. 이러한 모습은 곽재우와 마찬가지로 승군(僧軍)을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에 소개했듯이 곽재우는 의병 활동으로써 충(忠)을 지키고, 조정의 옳지 않은 일에 관직은 물론 목숨까지 걸고 직언을 서슴지 않음으로써 의(義)를 지켰다. 이런 모습은 흔히 알려진 유학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이에 반해 곽재우에게서는 말년에 은거하며 도교(道敎)의 신선이 되려는 모습도 나타났다. 특히 곽재우의 의병 활동 기간에 용모가 비슷한 사람에게 같은 옷을 입혀서 적중을 혼란에 빠뜨린 일종의 ‘분신술’을 쓴 것이나, 임진왜란 종전 후 그가 벽곡(辟穀), 즉 곡기를 끊으면서, 도인(導引)·토납(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지금까지 2회에 걸쳐서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과 승려로서의 모습을 살펴봤다. 김시습은 유학자로서 충(忠)과 절의(節義), 효(孝)를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또한 어릴 때 신동으로 일컬어지면서 사서삼경(四書三經) 등의 유학 경전을 비롯하여 유학자로서 읽어야 되는 다양한 서적을 읽었다. 반면 모친의 사망을 비롯한 각종 경험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고 출가를 감행했다. 특히 김시습의 불교 전문 저술의 제목을 보면, 그가 동아시아에서 가장 심오한 사상인 천태·화엄의 교학과 조사선(祖師禪)의 세 분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앞 회차에서는 김시습의 유학자로서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다뤘다. 김시습은 어린 시절부터 천재로 주목받았으며 효(孝)를 실천하고, 생육신(生六臣)으로서 절개를 지키는 등 유학의 이상향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유학자의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김시습은 이런 모습보다 승려로서의 모습이 더 유명하다. 금오신화(金鰲新話)를 집필했을 때도 그는 승려 신분이었고, 이전에 언급했듯 그는 사후 유지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됐다. 또 부도(浮屠-승려가 죽은 후 사리를 모아놓은 탑)까지 조성됐다.이런 모습을 제대로 알아보기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김시습은 출가와 환속, 그리고 그 이후 다시 출가했으며, 승려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러한 모습만 보면 김시습의 사상이 불교에 경도됐다고 볼 수 있으나, 실제의 그의 삶은 유교와 불교뿐만 아니라 도교의 도사의 모습도 보여줬다. 나아가 김시습의 삶에서 유교, 불교, 도교의 세 가지 사상을 넘나드는 모습까지 확인된다. 그 예로 김시습의 많은 호를 들 수 있다. 그의 유학자의 면모를 드러낼 때는 주로 매월당(梅月堂)으로 일컬어지고, 법호는 설잠(雪岑)이었으며, 도교의 면모를 강조할 때는 청한자(淸寒子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의 칼럼에서처럼, 당대의 이단아로 평가받는 허균의 면모는 그의 최후까지도 계속 드러났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결국 비정상적인 기득권에 의한 것이었다.광해군 10년(1618) 8월 24일 창덕궁 인정전 문 앞에서 허균 역모사건과 관련된 살벌한 국문이 시작되었다. 허균의 혐의는 역모였다. 그 내용은 이전에 언급한대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한다는 기준격(한 때 허균의 정치적 동지였던 기자헌의 아들)의 상소로 시작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유년 겨울에 신의 아비는 외지에 있었고 신만 서울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에 필자는 허균의 파란만장한 삶, 불교와 도교에 대한 시각과 의미, 천주교를 조선에 최초로 전파한 사람이라는 주장 등에 대하여 소개하였다. 이번 회차에서는 허균의 가족에 대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허균의 아버지 허엽은 서경덕의 문인이었지만, 학문 계통이 다른 이황도 허엽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허균의 큰 형 허성은 이름난 문장가이자 성리학자였고, 글씨도 뛰어났으며, 선조가 죽으면서 어린 영창대군을 부탁한다는 밀지를 내릴 때 참여한 ‘유교칠신(遺敎七臣)’이 됐다. 둘째 형 허봉은 아버지
※ 당분간 곽재우, 허균, 김시습에 대하여 다 하지 못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칼럼을 구성하겠습니다. 독자 여러분의 혜량(惠諒)과 관심을 바랍니다.【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전래된 시기에 대해서는 설(說)이 분분하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임진왜란 때 왜군 안의 군종 신부에 의해 천주교가 전래됐다는 설이다. 임진왜란 때 조선 침략의 선봉장 역할을 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에 천주교 군종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군종이 예수회 소속 신부였던 세스페데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은 허균이 『홍길동전』 으로 유명한 것처럼, 『금오신화』의 저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여기에서 『금오신화』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보자. 『금오신화』는 실제로는 일종의 소설 모음집으로, 「만복사저포기(萬福寺樗蒲記)」, 「이생규장전(李生窺牆傳)」, 「취유부벽정기(醉遊浮碧亭記)」, 「용궁부연록(龍宮赴宴錄)」, 「남염부주지(南炎浮洲志)」 등 총 5개의 소설로 이뤄져있다. 소설의 내용들은 대개 인간 세상에 사는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지 않은 상황을 겪는 이야기들이다. 예를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이전 편에서 허균이 불교 신자일 수 있다는 흔적을 소개했다. 필자는 관련 내용을 작성하면서 점차 ‘허균이 불교신자인가? 아닌가?’의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아마 허균의 도교에 대해서도 많이 언급을 했다는 점도 중요한 근거가 될 것이다.허균은 도교에도 관심을 많이 보였다. 허균의 도교에 대한 관심은 학구적 관점, 양생(養生-음식의 섭취를 통하여 무병장수에 이르는 것), 신선에 대한 관심과 동경, 그리고 양생과 신선에 대한 관심과 동경에서 비롯된 은둔사상이었다.1) 아이러니하게도 이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앞서서 허균이 몇 차례에 걸쳐 탄핵된 가장 중요한 이유가 그가 불교를 신봉한다는 이유였다고 밝혔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다음과 같다.삼척 부사(三陟府使) 허균(許筠)은 유학 집안의 아들로 그 아비와 아들이 종사하던 것과는 반대로 불교를 숭상하고 믿어서, 불경을 외며 평소에도 승려들이 입는 옷을 입고 부처에게 절을 하였고, 수령이 되었을 때에도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재(齎)를 열어 반승(飯僧)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워할 줄을 몰랐으며, -(중략)- 청컨대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아 사습(士習)을 바로 잡으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 글을 읽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홍길동전』을 접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호부호자(呼父呼子 : 아비를 아비라 부르고 자식을 자식이라 부를 수 있어야 된다는 말), 활빈당(活貧黨, 부자의 물건을 훔쳐서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준 도적의 무리), 율도국. 홍길동전에 등장하는 여러 소재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되풀이되었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드라마로 제작될 정도였다. 그리고 학벌과 경제력에 따른 각종 차별을 겪고, 지지부진한 정치권의 모습과 자기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기득권의 몸부림에 혀를 차는 사람들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