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KBS전속 성우 시절, 나는 틈만 나면 주차장에 가서 혼자 차 안에 앉아 있었다. 책을 읽거나 노트에 뭔가를 끄적거리면서. 아르바이트 한 번 제대로 안 해보고 입사한 내게 ‘사회생활’이란 이름의 일상은 부딪히는 곳, 닿는 곳마...
나에게는 어려서부터 함께 자란 열다섯 살 위 외삼촌이 있다.그 누구보다도 스마트하고 유쾌한 우리 외삼촌은 특히 말솜씨가 아주 뛰어나다.삼촌의 이야기 솜씨를 증명하는 일화 하나.1980년이던가, 아가사 크리스티 원작 이 개봉했다. 한창...
아들아이가 킥보드를 타다 넘어져 양쪽 팔에 깁스를 했다. 그러고 나니 아이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 덩달아 나까지 참 힘들어졌다. 먹이고 씻기고 입히고 대소변 누이고 책보 싸고 풀고...허나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아들과 ...
얼마 전, 남북 정상이 백두산 천지에 오른 소식에 내가 천지에 올랐던 20대의 여름이 떠올랐다.한중 수교가 이루어지기 직전이던 1992년 7월, 성우협회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배우들과 한중합작 라디오드라마 제작을 하기위해 중국을 방...
2004년 겨울, 생후 2개월 된 말티즈 한마리가 양말에 담겨 우리 집으로 왔다. 꽉 쥐면 터질 것만 같던 그 작고 보드랍고 몽클거리는 생명은 아침마다 내 온 얼굴을 핥으며 침대 위를 날아다녔다. ‘기쁨이 샘솟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어딘가 도회적이고 이지적이며 창백한 남자.노타이 차림으로 셔츠 윗 단추 하나쯤 풀어 헤치고 소매를 걷어 올린, 금테 안경이 잘 어울리는 남자.어린 시절 내가 품었던 대학교수라는 직업의 이미지다.그런 내 편견을 첫 만남부터 박살내 주신...
친구 A와 O는 어느 날 삶은 계란 흰자와 노른자에 관한 아주 놀라운 진실을 알게 된다. 고등학교 시절 만나 함께 재수학원을 다니고 같은 대학에 다녔던 둘은 직장까지 같은 동네로 가게 되면서 절친 관계를 십 수 년 째 이어오던 중이었...
꿈과 현실의 연계가 느린 편이다.아주 아주 오래도록 꿈속의 나는 내내 학생이거나 싱글이었다. 꿈속의 내 정체성이 학생에서 성우가 되기까지 10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필요했고 아이 엄마가 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최근에야 비로소 아...
연일 폭염이다. 아침부터 에어컨을 틀고 싶은 욕망과 싸우며 1994년 여름을 생각한다. 도대체 얼마나 더웠기에, ‘그래도 1994년만큼은 아닐 것이다’라는 전망을 해마다 듣게 되는 것일까.1994년, 그때 나는 새벽 6시부터 8시까지...
바야흐로 노출의 계절, 샤워를 하며 핑크색 면도기를 집어 들다가 문득 내 암울했던 소녀 시절 생각이 났다.누구에게나 흑역사가 있다. 스스로를 찌질하다고 여기는 때 말이다.중2에서 중3으로 넘어가던 시절의 내가 그랬다.나는 내 신체의 ...
층간 소음 걱정 없는 곳에서 아들을 맘껏 뛰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살던 아파트를 세놓고 전세를 다닌 지 어언 8년.‘손바닥만 하더라도 마당이 있는 1층일 것’이 집 찾기의 유일한 조건이었다.내가 사는 세검정엔 그런 집들이 많아 집구하기...
아직은 외모에 신경을 꽤 쓰던 삼십대 중반, 서울에 있는 모 대학 방송연예학과에서 신입생들을 지도하고 있을 때의 일이다.매번 잡지책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차림새로 수업에 들어오는 남학생이 있었다. 그 애의 패션이 어찌나 감각 있고 세...
시간 약속을 칼 같이 잘 지키는 타입은 아니다. 부끄러운 고백이지만 약속 장소에 5분 10분 늦는 일이 더 많은 밉상 인간이다. 그럼에도 원고 마감 시간만큼은 단 한 번도 어기지 않았던 것이 유일한 나의 자랑이었는데... 슬프게도 지...
를 즐겨본다. 샘 킴과 이연복 셰프가 특히 좋다. 샘 킴은 자기 철학을 버리지 않는 우직함이 좋고, 이연복 셰프는 깊은 내공 위에 유연한 순발력을 갖추어서 좋다.실제 두 사람의 성품과 기질이 어떤지는 모른다. 어차피 우리 모두는 자신...
아소, 님하!도람 드르샤 괴오쇼셔!내가 대학시절 좋아했던 고시가(古詩歌)의 한 구절이다. 이 시는 정서(鄭敍)가 지은 고려가요 ‘정과정곡’의 한 구절로 ‘님이시여, 제발 마음을 돌리시어 나를 다시 사랑해주십시오’라는 뜻이다.마음속으로...
마지막 이야기하필이면 똑똑한 놈을 만나 더 피해를 본 것은 가정환경 탓이었다. S에겐 학벌, 외모, 스펙... 그 무엇으로도 비교 불가한 너무나 똑똑하고 잘난 동갑내기 오빠가 하나 있었다. (오빠는 1월생, S는 같은 해 12월생) ...
- 패턴은 반복된다. 원인을 알기 전까지는-패턴은 반복된다.S의 상담선생님이 S와의 첫 만남에서 들려준 얘기다. 모든 사람은 연애를 할 때 자기만의 패턴을 반복한다. 그랬다. S는 언제나 가볍게 사랑에 빠지고 불같이 뜨거워졌다가 얼마...
S의 외모를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상위 30%의 끝자락쯤? 그것도 풀메이크업을 한 상태에서 그 정도였다. 게다가 S에게는 조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곱디곱게 화장을 하고서는 넝마 같은 옷을 입는다든지, 다들 숨어서 피우는 담배를 굳이...
18세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한다.40세 때,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개의치 않는다.60세 때, 어느 누구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사회공포증이 있는 사람들에게 상담자들이 들려주는 ‘18,...
오늘은 레드라이트다. 스스로의 비겁을 고발하는,성우도 연기자라고 하면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간혹 있지만 내 직업인 성우는 연기자가 맞다. 나도 한때는 대학로에서 연극을 했었고 현재는 연예인 노조 소속 연예인이다. 그런 내 눈에는 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