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석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원석 칼럼니스트】최근에 한국 종교계의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이 심상치 않다. 한동안 불교나 개신교 진영에서 상당수가 현 정권에 노골적으로 뜨거운 지지를 보내는 친화적 모습으로 인해 논란이 많았지만, 최근에 들어와서는 그와 반대되게 상당히 강력한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서는 흐름이 점차로 증대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현 국정원의 제 18대 대통령 선거에 대한 불법적 개입의 문제가 놓여 있다. 급기야 광주지역 5대 종단(개신교, 불교, 원불교, 천도교, 천주교)은 전국에서 처음으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공동 시국선언을 했다.

지금은 이렇게 거의 모든 주요 종교에까지 현 정권에 대한 비판의 물결이 확산되고 있지만, 그 시작은 가톨릭에서부터였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지난 11월 22일 전주교구 사제의 시국 미사에서의 강론이 그 도화선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박창신 신부는 강론을 통해 국정원의 불법적인 선거개입에 대해 비판하였고, 박대통령의 사퇴를 요구하였다. 이에 대해 염수정 서울 대교구 주교와 같이 사제의 직접적인 정치적 개입에 대해 비판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미 가톨릭의 입장은 개혁으로 선회하기 시작했다.

가톨릭의 사회적 약진

가톨릭의 근본적인 입장 전회(轉回)는 제 266대 현 교황(Papa Francesco)의 개혁적 지향성에 힘입은 바가 크다. 아르헨티나의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고서 자신의 교황명으로 채택한 프란치스코는 청빈을 기치로 내걸었던 걸식 수도사(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가 추구하는 교회상은 가난한 자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라고 알려져 있다. 교리적으로 보수적 인사이기에 해방신학에 반대하지만, 사회적으로 개혁적 인물이기에 신자유주의 또한 반대한다.

더욱이 프란치스코 교황이 11월 26일에 발표한 ‘사제로서의 훈계’에서 “통제받지 않는 자본주의는 새로운 독재”라고 비판하는 등 모호하고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기존의 교황적 어법을 버리고 직설적으로 발화하고 있다.

그뿐 아니라 바티칸 은행을 포함한 가톨릭 내부 개혁에도 앞장서고 있다. 마피아가 현 교황을 암살하려고 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것도 허무맹랑하게 들리지는 않는다. 이런 큰 변화 속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지난 12월 4일 박근혜 대통령의 사퇴를 촉구하며, 이를 위해 순교자의 자세로 저항할 각오를 천명했다.

급기야 12월 6일에는 한국 가톨릭을 공식적으로 대표하는 주교회의 공식기구인 한국천주교주교회의의 정의평화위원회가 담화문을 통해 국가권력의 불법적 선거개입과 이에 대한 은폐·축소 시도’에 대해 일갈하기에 이르렀다. 주교회의 정평위의 이러한 공세는 12월 4일에 발표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대선개입 비판과 순교자적 저항에 대한 입장을 밝힌 것을 떠받치는 것이다. 이제 가톨릭의 공식적 입장은 현 정권의 존립 기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이라 할 수 있다. 실로 놀라운 약진이다.

정교분리의 본질적 의미

이러한 상황에 대해 현 정권은 불편한 심경을 감추지 않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태도는 결코 온당하다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합회)으로 대변되는 보수적인 종교 세력들의 적극적 지원에 대해서는 기꺼이 수용하였다. 가령 2012년 9월 10일에 박근혜 당시 대통령 후보는 한기총 방문을 기독교 지도자들 예방의 첫 행보로 삼았다. 물론 한기총은 박후보를 지지하고 심지어 해외의 표심을 잡으라고 독려했다. 그때에는 들이밀지 않던 정교분리(政敎分離)의 원칙을 가지고서 지금의 비판적 입장에 대해 반박하고 있다.

사실 보수 진영의 정교분리 주장은 실로 가관(可觀)이라 할 수 있다. 정교분리의 주체는 기본적으로 국가 곧 정치이다. 정치가 종교에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정교분리는 정치로부터 종교를 보호하기 위하는 데에 목적이 있지, 종교가 정치에 침묵하라는 것에 목적이 있지는 않다. 외려 종교인은 정치에 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 당장 투표 행위부터 정치적 행위의 좋은 사례이다. 이는 시민으로서의 기본 의무이다. 만일 현 정권이 주장하는 방식으로 정교분리를 한다면, 서구의 정치는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존립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특히 독일이 좋은 사례에 해당한다. 가령 나치에 대한 저항의 기억을 근간으로 하여 1945년에 설립된 기독교민주당(기민당, Christlich-Demokratische Union)을 생각해보라. 사회민주당과 더불어 사실상 독일의 양대 정당으로 기능해왔다. 또한 독일의 넬슨 만델라로 불리는 요하임 가우크(Joachim Gauck)가 2012년에 독일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는데, 그는 놀랍게도 루터교 목사 출신이다. 한국으로 치면 장로교 목사 출신인 셈이다. 헌데 그는 독일 통일 전에도 동독의 민주화 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이 모든 것은 결코 정교분리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떤 경우가 정교분리 위배에 해당할까? 이명박 전 대통령이 그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2011년 3월 국가조찬기도회에서 현직 대통령의 신분으로 무릎 꿇고 기도하고, 심지어 서울시장으로 재직하던 2004년 5월 당시에는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한다”면서 봉헌서를 낭독한 바 있다. 혹은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가 2010년의 법조계 기독교 신자 모임에서 “대법관 중 개신교 신자가 줄어드는 것이 큰 문제다. 가능하면 모든 대법관이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이들이길 바란다”라고 천명한 것도 정교분리의 원칙을 위배한 것이다.

종교의 예언자적 기능

종교는 정치와 무관할 수는 없다. 어떤 경우에는 사회 질서의 유지에 기여할 수도 있고, 또 다른 경우에는 사회 구조의 개혁에 앞장설 수도 있다. 세계의 구성과 유지에 복무하는 전자의 경우를 종교의 제사장적 기능이라면, 세계의 해체와 재구성을 선도하는 후자의 경우를 종교의 예언자적 기능이라고 명명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양자 모두 결코 탈(脫)정치가 아니라 외려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되는 정치 참여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 자체로 좋고 나쁜 것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놓여있는 맥락과 추구하는 가치 속에서 결정된다.

통상 보수 진영은 종교에게 제사장적으로 사회 유지에 기여하기를 바란다. 사회의 정상 작동을 위해 질서를 부여하는 일정한 구심점으로 서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보수 기독교가 군사독재정권 치하에서 침묵하던 것이 그 좋은 사례일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극적인 방식의 정치 참여이다. 더불어 당시 보수 교계의 여러 인사들은 당대 권력에 순응할 것을 독려하던 데에서 나아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축복하였다. 물론 이것은 적극적인 방식의 정치 참여인 셈이다. 그 대가로 정부의 적극적 후원을 받았다는 것은 결코 비밀이 아니다.

만일 정치가 인간의 인간됨을 추구하지 않고, 외려 양극화와 승자독식 등과 같은 인간의 비인간화를 지향한다면, 종교는 여기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개입해야 한다. 이것이 앞서 지적한 종교의 예언자적 기능이라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는 민중신학자들이 군사독재정권에 맞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선 것이 그 좋은 사례일 것이다. 이제 정상적인 종교라면 세상의 부패를 막기 위해 예언자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내야할 때가 되었다. <마태복음> 5장 13절을 통해 예수가 하신 말씀은 모든 종교가 귀기울여야 할 것이다(여기서 소금은 방부제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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