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저자 성균관대 천정환 교수

▲ 천정환 교수

【투데이신문 이광명 기자】 자살예방협회 발표에 따른 우리나라 하루 자살자는 35명, ‘자살공화국’이란 오명을 뒤집어 쓴지도 이미 오래다. OECD 중 자살률 1위 국가라는 타이틀은 이제 식상할 지경이다.

하지만 이런 계속되는 죽음의 행진을 단순히 ‘자살’로만 치부해버릴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이것은 타살이다! “신자유주의적 속물지배가 정치 그 자체가 되고, 자기계발하는 경영학적 사유가 주체성의 가장 중요한 원천이 되고, 인간됨이 호모이코노미쿠스 외의 다른 가능성을 갖지 못하는 상태”에서 그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비판적 사고를 상실한 매스컴과 미디어는 ‘자살사건’을 자극적인 ‘소비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며 아무런 여과 없이 대중에게 마구 쏟아붓고 있다. 3.6 다리만 거치면 서로 아는 사이가 된다는 대한민국에서 이렇듯 ‘만연한’ 자살이란 이제 옆집의 이야기이자 내 가족의 문제가 되었다.

그렇기에 한쪽에서는 한 사람의 죽음이 주는 상실감에 미친 듯이 울부짖다 그 슬픔이 죽음으로까지 이어지기도 하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말 그대로 ‘죽음의 홍수’ 속에 한 인간의 죽음쯤이야 점점 무감각해지는 무섭고도 냉정한 현실이 공존하게 됐다.

이를 두고, 성균관대학교 천정환 교수는 ‘전반적으로 상태가 안 좋은’ 것이라고 진단하고 있다. 진단을 내렸으면 처방도 따라와야 하는 법. 아직 처방까지는 힘들더라도, 이제는 우리 모두 자살의 ‘방관자’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그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심도 있게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때마침 자살의 역사적인 계보를 추적해 가는 방식을 통해 전통사회로부터 현대인의 자살까지 마음의 변화나 자살의 양상 등에 대한 연구결과를 내놓은 <자살론>이란 책이 출간됐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일단 ‘자살’에 대한 화두를 가십거리로부터 건져내는 것으로부터 출발해보자는 생각으로 책을 집필한 천정환 교수를 찾아갔다.

2003년부터 자살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해왔다던데, 그 계기가 궁금하다.
- 다들 그러하듯, 언뜻언뜻 자살에 관한 소식이 들려왔지만 대부분 무감하게 흘려보냈다. 그런데 왜 그런지 2003년 8월 정몽헌 회장의 자살만은 마음에 와 닿는 것이 있었다. 그 이후부터 실제로 주변에서 너무나도 많은 자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실감했고, 동시에 그에 둔감해진 나 자신을 발견했다. 그렇게 자살에 대한 공부가 시작됐다. 죽음에 대한 더 많은 앎이 삶을 더 존중하게 하는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렇게 책까지 쓰게 됐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또 어쩌면 삶의 맹목적인 힘이 오히려 죽음의 권능으로부터 삶을 지켜주는지 모른다.

책에 보니 교수님 또한 가까운 사람의 자살을 목도한 바가 있다. 
- 1991년 5월이었는데, 학부 동기 여학생이었다. 당시에는 그 문제에 대해 제대로 지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마음이 마비된 상태였다. 충분히 숙고하지도, 애도하지도 못했다. 이후 그 사건의 의미조차 해석하지 못했다는 사실 자체가 반추되며, '왜 그랬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도 자살을 사유하게 된 중요한 감정적 모티프가 됐다. 그런 사건을 당하는 사람들이나 그 지인들이 어떠한 충격을 받는데 대체로 제대로 감각하고 슬퍼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일반적으로 자살이란 본인 의지의 영역이고, 주체적인 행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에서는 본인이 처한 사회적 환경이나 상황에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선택할 수밖에 없는 행위로 접근했다. 심지어 타살이라고까지 표현 가능할 정도다. 
- 사회적 약자일수록 그들이 선택하는 자살이나 죽음은 타살일 가능성이 높다. 고통을 지속적으로 당하거나 소외를 포함한 인간적인 고립상태를 계속 겪다보면 선택하게 되는 문제이자 스스로 자기 몸에 위해를 가하는 행동이라는 측면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맥락은 분명히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그 원인이 주어지고, 그것들이 누적되고, 그 과정에서 또 새로운 이유가 생성되는 그런 모순이 있다. 이 가운데 다른 최악의 상황을 회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살을 선택했다면, 이는 더 이상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더욱이 자살하는 사람이 한 명의 개인이 아니고 복수의 개인일 때는 그들이 공통적으로 맞닥뜨린 사회적 원인이나 맥락이라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사회적인 것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더라도 비슷한 환경 하에서 어떤 이는 자살을 하고, 어떤 이는 하지 않는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나.
- 두 가지 관점으로 접근 가능하다. 하나는 개별자가 가지고 있는 우울을 견디는 힘 등을 포함한 각자의 다른 점들인데, 똑같은 환경에 노출되어도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고 어떤 사람은 병에 걸리지 않듯이 어떤 사람은 좀 더 강한 마음이나 자아를 가지고 있을 테고, 그래서 상대적으로 덜 우울증에 걸리거나 덜 불안하거나 덜 비관적일 수는 있다. 그러나 어쨌든 자살은 관계의 사건이며, 자살을 하고 싶거나 해야겠다고 생각해도 그 사람이 계속해서 살아가도록 지지해주고 지탱해주는 망들이 있다면 자살하지 않는다. 즉, 고립을 덜 느낀다면 자살하지 않는다. 그것이 또 다른 의미의 차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사회적인 환경에 의해 자살로 내몰리는 맥락이 분명히 크지만, 자살을 결정하는 순간만큼은 본인의 의지와 개인의 선택에 의해 좌지우지 될 수 있는 부분 또한 있다고 본다. 구조적인 상황은 당장 해결하기 힘들기 때문에 거시적인 관점에서 서서히 바꾸어 나가야할 부분이고, 당장은 임시방편이나마 개개인 스스로가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 그게 어떻게 가능한가. 물론 마음을 닦고 단련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그 자체만으로 해결될 사안은 아니다. 또 스스로가 강해진다는 것 자체도 굉장히 모호한 말이다. 그럼에도 일단 내 인식론과 관계를 바꾸면 강해질 수는 있다. 내 가족이나 그 외의 다른 관계들이 파탄 나 있으면 내가 약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런 관계들을 회복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추상적인 의미에서 강해져야 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 또 그게 더 나쁘다. 이미 우울증에 걸려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너 빨리 정신 똑바로 차려'라고 말한다고 해서 그 상태가 나아지는 것이 아니지 않나.

책의 흐름이 근대 이전, 근대, 후기 근대로 이어지며 역사적인 탐색을 거쳐 현대인의 자살까지 문헌들을 근거로 왜 자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 분석하는 방식으로 보인다. 근대 이전에는 규율이나 규범에 의해 자신의 목숨조차도 스스로 어찌하지 못하는 상태로 자살이 행해졌던 것으로 보인다. 여성의 경우 자신의 부군이 죽으면 따라죽어 열녀가 되는 식이었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사회적인 상황들이 한 개인을 자살로 내몰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교묘하게 주변의 문제가 아니라 본인의 문제로 들어오게 된 측면이 있는 것 같다. 역설적이게도 ‘너무 힘드니까 차라리 죽겠다’는 강한 자의식의 표출로도 보이고. 
- 그렇다. 사실 많은 독자들이 현재의 자살에 대한 어떤 지식, 그 자체에 더 많이 반응을 하는데 사실 이 책은 역사적인 고찰을 통해 학문적으로 방금 얘기한 부분들을 다시 규명했다는 것에 더 의미가 있다.

책에서는 1910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자살의 원인이 분노, 울분, 개인이 속한 제도적 환경 등이었다면 그 이후 근대로 오며 우울증으로 바뀌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변화를 이어주는 고리가 뚜렷하지 않다는 느낌이다.
- 물론 그런 부분도 중요하지만 이 책 한권으로 모두 규명하기 어렵다는 판단을 했다. 어쨌든 과거와 현재로 이어지며 자살이 표상되는 방법과 자살이 나타난 문헌들의 맥락이 달라졌고 사람들의 마음 자체가 변해왔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개별적인 자아 운용의 폭이 커지고 개인이 좀 더 자유의 주체가 되면서 자살의 상황도 변한 것은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 자체를 증명하기도 어렵거니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은 아니고, 그 문제들을 표상화하고 그렇게 드러난 물음들을 통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한편 그런 방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한계도 있었다.

자살하는 양상은 실제로 어떻게 변해 왔나. 
-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책에서는 고통과 해석 사이라고 표현했는데 고통 자체가 변하고 그 고통 자체의 양상이 변해서 사람들이 자살하는 이유가 변한다는 것이다. 동시에 자살의 양상 역시 함께 달라져 왔다. 예를 들어 정사(情死:사랑하는 남녀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여 함께 자살하는 것)의 경우 20세기 초에 나타났다가 20세기 후반에 사라진다. 가족 동반자살은 한국과 일본에는 나타나지만 서양에 없는 것이고, 우울증 자체도 예전에는 존재하지 않는 질병이었는데 현재는 그런 질병에 걸린 사람들이 많아져서 자살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렇듯 고통 자체가 변하는 것을 한 대목에서의 측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 다음, 과거에는 자살사건이 벌어지는 지도 몰랐을 텐데, 지금의 우리는 매스컴을 통해 매일같이 누가 어떤 이유로 어떻게 자살했다는 보도를 늘 접한다. 사람들이 자살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국가가 그것을 관리하는 것은 그 이후의 일로 자살을 어떻게 해석하고 그것을 어떻게 보여주고 말하는가는 다른 한 측면의 주제다. 그것도 역사적으로 조금씩 변해왔다. 책에서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이야기하고 싶었다.

앞서 언급된 정사(情死)의 문제는 동반 자살과 어떻게 구별 지을 수 있나. 함께 죽는다는 것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동반 자살 사이트’까지 등장할 정도다. 
- 정사도 동반자살의 일종이다. 자살 사이트의 동반자살 같은 경우는 굉장히 아이러니컬한 면을 지니고 있다. 자살이란 외로운 행동이고, 어려운 행동이고, 결단이 필요한 행동이다. 그런데 그 심리적 문턱이 높은 것이다.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모르는 사람과 만나 타인과 협력하는 것이다. 모든 동반자살에는 그러한 공통적인 심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연인과의 동반자살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끼는 상태로 사랑에 대한 좌절을 겪는 상황 속에서 사랑을 성취하기 위한 것, 또 영원성을 갖고 싶어 하는 복잡한 조항들이 다 게재돼있는 것 같다.

특히 여성의 지위 변화에 따른 자살문제는 따로 할애해 다루었다. 여성들은 주로 사랑이라는 관계 속에서 근대 이전에는 주어진 관계에 대한 의무에 충실하기 위해 자살을 강요당했다면, 근대에 들어서면서 부터는 본인의 의지로 지속해온 사랑이 본인의 의지를 넘어서는 상황으로 인해 깨어질 때 자살을 선택했던 것 같다. 
- 가장 극명하게 자살의 내용이나 주체의 문제가 변한 것이 남녀 사이의 문제나 여성의 자살이다. 조선시대 문헌에도 보면 남자가 자살했다는 사실은 거의 나타나있지 않을 뿐더러 여성 자살이 훨씬 많은데 실절, 정절을 잃어버린 상황, 잃어버리지도 않았는데 잃어버릴 뻔 한 상황에서 자살이 발생했다. 자신의 몸을 깨끗하게 지켜야 한다고 강요된 수절 이데올로기 때문에 자살했던 것이다. 점점 그런 자살이 없어지는 것이다. 더 이상 그런 이유로 자살할 필요가 없고, 또 그것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게 됐다는 것이 가장 큰 변화다. 남성중심의 유교적 가부장제 사회를 지나 자유주의 사회나 다른 방식의 근대사회가 됨으로써 자살하는 이유나 상황 또한 달라졌다는 사실이 결정적 차이를 만들었다.

그러나 책에서도 언급했듯 일부 조선시대 고전소설 <최척전>, <동선기>, <한강전> 등에서는 여자가 지조를 지키기 위해 자살을 하는 행위에 반대하는 흐름도 분명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순결을 잃었다는 이유만으로 자살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무리한 것 아닌가. 실제로 조선 후기 사회에서는 그런 일로 자살하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기 때문에 계속 논의가 됐고, 그래서 당연히 소설에서도 그렇고 정약용 등에 의해서도 순결을 지키거나 열녀가 되기 위해 자살하는 것에 대한 비판적인 경향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런데 근대로 오며 여성의 자살률보다는 남성의 자살률이 훨씬 높아졌다는 대목이 눈에 띈다. 
- 여성이 관계에서 좌절하거나 우울과 불안에 빠질 가능성은 더 높다고 생각한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여성이 더 관계 지향적인 것 같다. 그래서 관계에 대한 회복이나 소통에 대한 호소 및 갈구, 이런 것들의 표현으로서의 ‘자살 시도’는 남성에 비해 훨씬 많지만 실제 자살률은 낮은 미묘한 측면이 있다고 본다. 실제 자살자의 수는 남자가 1.5배~3배 정도 더 많다. 식민지조선시대 부터 그렇게 변해왔다.

여러 가지 자살의 원인 중 현재의 문제가 된 우울증은 좀 더 깊이 다뤄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울증과 자살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 현재는 우울증이 자살문제에 있어 가장 중심적인 담론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로 정신의학적 측면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정신의학도 계속 변해왔다. 20세기 초 중반만 해도 우울증이라는 말 자체가 많이 사용되지 않았고, 우울증에 걸린 사람 자체도 별로 없는 것으로 나타난다. 다른 정신적인 질환, 신경쇠약이나 정신착란 등의 단어로 표상된 상태가 자살을 유발하는 것처럼 이야기됐었는데 변해온 것이다. 현재의 정신의학 진단기준이나 패러다임의 변화 때문에 우울증을 가장 확실한, 개인적인 동시에 병리적인 자살의 원인 자체로 간주하고 있다. 그것을 다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그 담론은 우울증의 원인 그 자체를 말하지는 않는다. 자살의 원인은 우울증인데 우울증에 왜 걸리는가는 말하지 않음으로써 자살을 개인의 문제로 가두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수님이 생각하는 우울증의 원인은 무엇인가.
- 저도 잘 모른다.(웃음) 욕망을 실현할 수 없는 것, 관계에 좌절하는 것. 우울증은 생리학적인 변화로 세 가지가 엉켜있는 것인데, 하나는 자아 존중감의 저락, 자아상의 변화, 그것을 야기한 관계의 변화가 분명히 존재하고 이런 것들과 얽혀있는 신체상의 변화를 수반한다. 실제로 우울증에 걸리면 몸이 망가지니까. 그러나 우울증 담론의 가장 큰 맹점은 그것을 유발하는 사회적 원인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조건 지어진 상태, 관계에서 발생하는 상황들 때문에 우울증에 걸림에도, 정작 그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한다.

OECD 국가 중 1위라는 타이틀을 갖게 됐을 정도로 한국에는 자살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물론 그렇기에 자살이라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는 있지만 '자살론'이라는 책까지 나올 정도로 자살 문제가 이 시대의 화두가 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나.
- 너무나 많은 인간들이 각자 고립돼있고, 욕망의 구조 또한 이상한 형태로 변형돼 있다. 삶을 살아가기가 힘들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자살이 만연화됐고, 그렇기에 한편으로는 점점 무감해지면서도 자살자와 가까이 지내온 남은 자들에게는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고 있다. 반드시 해결해야 될 문제인 것이다. 그 방법은 굉장히 복잡하고, 정책적이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고 있다.

한편으로는 ‘죽지 못해 산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은 요즘, 자살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을 갖게도 되는 것 같다.
- 실제로 자살이 일부 그런 면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자살을 낭만화 하는 것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태도의 일부이긴 하지만 그 자체가 자살률을 높이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자살은 훨씬 더 복잡한 사회적인 문제이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 자체로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살을 미화하거나 낭만화 하는 사람들 자체도 별로 없을 뿐더러, 정말 살기가 힘들다든지 관계가 야기한 고통이 크기 때문에 자살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베르테르 효과처럼 누가 죽으니 따라 죽는 다는 심리가 많은데, 이 문제는 간과할 수 없는 것 아닌가.
- 유명인의 자살 같은 경우 일시적으로 자살률을 높인다는 조사결과가 있는 것은 맞다. 유명인이라는 말로는 불충분하고, 알고 있는 사람이 자살했을 경우 자살자를 알고 있는 사람이 자살할 가능성이 많아지는 것은 사실이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자살을 하기 때문에 그 주변인들을 포함한 자살률이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 상태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면 미디어에서 계속적으로 자살사건에 대해 보도하고, 주변인들이 그 사실을 알 수밖에 없는 지금의 행태는 맞다고 보나.
- 현재 자살 보도의 규제에 구속력이나 강제력이 거의 없다. 자살하는 사람이 너무 고통스러운 상황에 못 이겨 자살한다는 사실 자체는 보도를 해야 한다. 그러나 자살하는 구체적인 방법이라든지 구체적인 상황 중 일부에 대해 보도해서는 안 된다. 분명한 전염효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안재환 씨 자살 이후 번개탄을 피워 자살하는 일들이 굉장히 많이 늘어났다. 소비의 대상으로 자살을 보도하지 않는 것이 가장 중요한데 언론의 속성 자체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교수님도 자살을 생각해 본 적 있나.
-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겠나. 아주 일상적인 의미에서 죽고 싶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부터 시작해 구체적인 자살행동 계획까지 마련하는 것일 텐데 포괄적인 의미에서의 자살생각을 안 해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왜 그런 생각을 했었나.
- 자살에 대한 생각은 자살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이기 때문에,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기 위해서는 자살에 대한 문제를 논리적인 수준에서든 감성적인 수준에서든 해보게 마련이다.

일반적으로 자살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나.
- 한 해 우리나라에서만 거의 1만5천명에서 2만 명가량이 자살로 목숨을 잃는다.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주변에 자살자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 사실을 직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도 모르게 자신이 자살 생존자, 즉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자살함으로써 충격을 받는 사람이 돼있고, 어떤 경우에는 의도치 않게 가해자가 돼 있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문제에 민감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또 어떤 위험한 상황에 빠진 사람들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도우려고 해야 한다. 무엇보다 좀 더 나은 사회로 바뀌기 위한 개개인의 요구가 절실하다.

물론 일반 독자들도 있겠지만, 오히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현실적으로 자살의 문제가 좀 더 자신에게 가깝게 다가와 있는 사람들일 경우가 많을 것 같다.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의 대다수가 살고 싶은 의지 또한 그만큼 있었던 것 아니겠나. 그런 점에서 지금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짚어봐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 자살의 생각에는 여러 단계가 있다. 이를 가장 쉽게 발견할 수 있는 평가치가 정신의학계에서 사용하고 있는 자살의지척도검사 같다. 그저 막연히 '아, 죽고 싶다'라고 생각하는 수준부터, 헤어 나올 수 없는 우울증에 걸려 있거나, 자살 시도를 해본 사람까지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다. 그 중 헤어 나오기 힘든 중증의 우울증을 앓고 있거나 자살시도를 이미 한 적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치료를 받아야 하는 것 같고, 문제 상황들이 있어서 괴로운 사람들은 누군가에게 조력을 받아야 한다. 당장 5백만 원이 없거나,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있는 등 구체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그 고통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스스로 해결하기 힘든 경우가 많기 때문에 누군가 발견해 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또 본인들도 최소한의 노력은 해야 하는데 그 부분이 가장 어렵다. 그 다음이 막연히 자살하고 싶다거나 그런 사람들의 문제다. 낮은 강도로 자살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들은 더 나빠지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개선하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필요할 것 같다. 특히 젊은이들에게는 자살이란 주제를 사유해야 하지만 자살할 권리는 없다고 말하고 싶다.

끝으로 책에도 ‘자살률을 낮추는 방법’이란 소챕터가 있긴 하지만 교수님의 좀 더 구체적인 생각이 듣고 싶다.
- 그 부분은 종합적으로 쓴 것은 아니고 큰 챕터의 전체적인 맥락을 따라 가다가 경제 문제나 빚 문제 등에 대해서만 간략히 언급한 것이다. 종합적으로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 계층과 계급 및 연령대 별로 자살자에 대한 훨씬 더 많은 심리적인 부검이나 정황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하고, 그런 상황들을 사회적으로 제거해 나가야 한다. 그것이 자살률을 낮추는 구체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 근저에서부터 자살률을 낮추는 방법은 사회를 바꾸는 것이다. 사회구조, 사회적인 고통이 발생하는 지점들을 바꾸는 것인데, 강력한 의지가 없는 한 쉽지 않을 것으로 본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