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와 평등을 향한 여정, 우리의 몫으로 남다

【투데이신문 박애경 기자】 자유와 평화, 인권과 평등을 위해 평생 헌신한 세계인의 ‘마디바(존경받는 어른·만델라의 존칭)의 긴 여정이 끝났다. 세계인에게 용서와 화해의 가르침을 남긴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1918~2013년)이 지난 12월 5일(현지시간) 95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했다.

"내 일생을 통해 나는 아프리카인들을 위해 싸웠다. 나는 백인의 지배에도, 흑인의 지배에도 반대해 싸웠다. 나는 모든 사람이 함께 조화를 이루고 평등한 기회를 가지자는 자유민주 사회의 이상을 늘 꿈꿔왔다. 그리고 이 이상을 위해 죽을 준비가 돼 있다. 평화는 인간의 발전을 위한 가장 좋은 무기이다. 나는 낙관주의자는 아니지만 희망을 믿는다."

그의 말처럼 흑백과 좌우와 동서의 구분 없이 모두가 평등과 자유를 누리는 민주사회로의 희망은 이제 우리의 몫으로 남겨졌다. 아프리카 흑인 인권 운동의 상징인 넬슨 만델라는 백인 정권 아래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정치범으로 27년의 옥살이를 치르고도 “사람이 사람을 억압하는 상황을 다시는 만들지 말자”며 대통합을 이뤄낸 진정한 용자(勇者)였다. 또한 한 명의 지도자가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를 직접 보여준 위인(偉人)이었다.

남아공 사상 최초 흑인 대통령, 인종차별과 갈등과 싸워 온 노벨평화상 수상자, 에이즈 퇴치 자선 운동, 아파르트헤이트(예전 남아공의 인종 차별정책) 종식 등 만델라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조명해보았다.

족장 아들이 인권투사로...
아파르트헤이트 반대운동

만델라는 1918년 남아공 남쪽 지역 트란스케이 움타타에서 템부족(族) 족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 만델라는 두 개의 이름을 가졌다. 감리교 계열학교에서 받은 영국식 이름인 '넬슨'과 그의 부친이 지어준 아프리카 이름인 '롤리흘라흘라'이다.

그의 조국 남아공은 17세기 중반 네덜란드인이 이주하면서 백인 통치가 시작됐다. 네덜란드계 후손(보어인)들은 유럽과 기후가 비슷한 남쪽 케이프타운을 중심으로 터전을 마련했다. 19세기 들어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와의 식민전쟁에서 승리하자 네덜란드계 후손들이 대거 내륙으로 이주했다. 이 과정에서 토착 흑인과 수많은 유혈 학살극이 일어났다. 일부 지배층이 와서 식민통치를 하고 물러났던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남아공은 백인 이주민과 토착 부족간에 갈등이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혈기왕성했던 만델라는 1940년 포트헤어대학 재학 중 인종차별 반대시위를 주동하다 퇴학당했고, 그 다음해 요하네스버그로 갔으며 1943년부터는 위트워터즈랜드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여러 가지 인종과 배경을 가진 사람을 만났다. 이때부터 일생을 건 인권운동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1944년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청년연맹을 창설했고, 법학 학위를 받고 변호자 자격을 얻은 만델라는 합법적인 투쟁을 위해 1952년 동료 올리버 탐보와 함께 요하네스버그에 남아공 최초에 흑인전용 법률상담소를 열었다.

이후 만델라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인종격리정책을 뜻하는 아프리칸스어) 반대운동에 나서는 등 본격적으로 흑인 인권운동에 참가했고 1956년에는 반역죄로 155명의 인권 운동가와 함께 체포됐다. 1960년 3월 69명의 흑인이 경찰에 살해된 '샤프빌 흑인 학살사건'을 계기로 평화시위운동을 중단하고 무장투쟁을 지도하다가 1962년 다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았다. 결국 1964년에는 범죄 혐의 추가로 재판을 받고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7년 옥살이한 최초 흑인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가장 위대한 무기는 평화” 

1964~1990년 바다 한가운데 있는 ‘로벤섬’ 교도소의 5㎡(1.5평) 좁은 독방에서 27년을 보낸 뒤 73세의 노인이 돼서 자유를 얻었고, 오랜 투옥 생활은 성숙된 지도자로 거듭 나게 했다.

투옥 당시 만델라는 모진 고문에 시달리며 강제 노역을 했다. 그는 수감 중에도 흑인 죄수들의 인권과 비인간적인 교도소 환경 개선을 위한 운동을 벌였다. 이런 활동이 외부로 알려지면서 만델라 석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남아공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인도는 만델라에게 1979년 네루 인권상을 수여했고, 유엔(UN) 안전보장이사회도 그의 석방을 요구했다. 1980년대 망명 중인 탐보는 만델라 석방 운동을 벌였고, 결국 1990년 당시 대통령이던 FW. 드 클레르크는 만델라를 특별 사면으로 석방했다.

그리고 이듬해에 아파르트헤이트의 핵심인 주민 차별법이 폐지됐다. 350년에 걸친 인종차별 정책이 막을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만델라는 1993년 12월 드 클레르크 대통령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다.

1994년 4월27일 실시된 남아공 최초의 자유선거를 통해 ANC는 의회 400석 가운데 252석, 62%를 득표했고 ANC 지도자인 만델라는 5월27일 남아공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됐다.

대통령 취임한 뒤 만델라는 남아있던 차별 정책을 모두 철폐하고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결성해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과거사 청산을 실시했다. TRC는 성공회 주교인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참여했고, 향후 각 나라의 과거사 진상 규명의 모델이 됐다.

인종차별 시절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 투쟁을 화형, 총살 등의 잔악한 방법으로 탄압한 국가폭력 가해자라도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친다면 사면했고, 나중에는 경제적인 보상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에이즈 퇴치 자선 운동
럭비로 흑백이 하나 되다

1994년 77세의 고령의 나이에 대통령에 취임한 만델라는 4년 재임 기간을 마친 뒤 자신이 점찍은 후임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고 당시 남아공의 가장 큰 문제였던 에이즈와의 사투에 뛰어들었다. 만델라는 에이즈 퇴치를 위한 자선 활동을 활발히 펼쳤고 2005년에는 비밀로 부쳐졌던 장남 마가토 만델라의 죽음의 원
인이 에이즈라고 밝히면서 에이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우기도 했다.

또 만델라는 1995년 남아공의 상징인 초록 유니폼을 입고 요하네스버그에서 열린 럭비 월드컵 결승전 경기를 관람했다. 당시까지 럭비는 백인들의 스포츠였고 초록 유니폼은 흑인들에게는 증오의 상징이었지만 만델라는 이런 편견을 깼다. 요하네스버그 엘리스파크에 모인 6만 명의 관중들은 일제히 "넬슨! 넬슨! 넬슨!"을 외쳤다. 만델라는 뉴질랜드를 제압한 남아공 선수들을 격려했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영화배우 겸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우리가 꿈꾸는 기적 : 인빅터스(Invictus)'라는 영화에서 백인과 흑인들이 스포츠로 하나가 되는 장면을 담았다.

만델라가 공식적으로 모습을 보인 것은 2010년 남아공월드컵이 마지막이었다. 그는 월드컵 개막일인 6월12일에는 바로 전날 증손녀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해 참석하지 못했고 폐막식인 7월 11일 허약해진 모습으로 골프 카트를 탄 채 부인 마셸 여사와 함께 경기장에 들어섰다. 만델라는 그러나 결승전에서 어떤 특별한 발언은 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그가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마지막 순간이었다.

만델라는 첫 번째, 두 번째 부인과 정책 노선 차이 등을 이유로 이혼했다. 특히 3년을 같이 산 두 번째 부인인 위니는 만델라가 27년 수감 생활을 마친 후 얼마 되지 않아 이혼했다. 그녀는 만델라의 수감 시절 나름대로 흑인 민권 운동에서 이름을 얻었으나 이후 흑인 정치 세력을 이용한 전횡과 폭력조직을 거느리며 사람들을 위해한다는 비난을 많이 받았다. 1998년 만델라는 사모라 마셸 모잠비크 전 대통령 부인이었던 그라사 마셸(67)와 재혼해 평화로운 노년을 보내다 임종했다. 슬하에 2남 4녀를 뒀으며 현재 딸 셋이 생존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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