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 철학박사
▸ 서울대학교 연구원

2014년 새해가 밝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2014년에는 안녕하시길 바란다.

최근 몇 년 동안 우리 사회에서 가장 많이 회자되었던 단어 중 하나가 ‘소통’이라는 말일 것이다. 비단 대통령과 국민, 정당과 국민 등 정치권과 유권자 사이의 소통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정확히 얘기하면, 정치권과 유권자 사이의 소통에서 시작된 소통에 대한 이야기는 노사, 성별, 세대 등 사회 계층 전반에서의 소통이 회자되었다.

전제군주정이었고, 신분의 구분이 있었던 조선시대에도 명분으로나마 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는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신문고였다. 신문고는 조선시대에 원억미신자(寃抑未伸者 :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풀어 해결하지 못한 자)에게 소원(訴寃 : 원통함을 소송함.)의 길을 열어 주기 위해 대궐에 북을 달아 소원을 알리게 하던 제도 혹은 그 북을 말한다. 1401년(조선 태종 1)에 처음 시행된 신문고는 당시 진행되고 있었던 정치 현안의 득실을 살피고, 반역과 국가 혼란을 방지하고자 만든 제도였다. 특히 신문고는 서울과 지방에서 일반 백성이 억울함을 호소하였을 때 해당 관청이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신문고를 울려서 이것을 알릴 수 있게 하였다. 이를 통해 백성들의 억울한 사연을 하나라도 더 접수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동시에, 소송의 절차를 무시한 상급기관에의 직고도 방지하고자 하였다.

백성들이 신문고를 사용하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지방의 향리나 종이 그의 상관이나 주인을 고발한다거나, 품관(品官), 향리, 백성 등이 관찰사나 수령을 고발하는 경우, 또는 타인을 매수 ·사주(使嗾)하여 고발하게 하는 자는 벌을 주었다고 한다. 오직 종사(宗社)에 관계된 억울한 사정이나 목숨에 관계되는 범죄 ·누명 및 자기에게 관계된 억울함을 고발하는 자에 한해 상소 내용을 접수 해결하여 주었다고 한다. 이러한 제한 조건이 나중에는 자기 자신에게 관한 일, 부자지간에 관한 일, 적첩(嫡妾)에 관한 일, 양천(良賤)에 관한 일 등 4건사(四件事)와, 자손이 조상을 위하는 일, 아내가 남편을 위하는 일, 아우가 형을 위하는 일, 노비가 주인을 위하는 일 및 기타 지극히 원통한 내용에 대해서만 신문고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백성들이 억울한 일을 신속하게 해결하기 위해서 신문고를 두드리는 빈도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신문고 제도의 뒤를 잇는 제도가 바로 격쟁이라는 제도였다. 격쟁도 신문고와 비슷하게 조선시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임금이 거둥하는 길가서 징이나 꽹과리를 쳐서 임금에게 하소연하던 제도였다. 신문고가 본래 하층민의 여론을 상달(上達)한다는 취지에서 마련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서울에 거주한 문무관원의 청원(請願)·상소(上訴)의 도구로 이용되어 일반 하층민과 지방민들에게는 별다른 효용을 갖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나마도 신문고 제도에 각종 제한이 많아 제대로 민의(民意)를 상달하는 기능을 하지 못하였다. 또 조선 전기에는 수령권을 확립한다는 취지 아래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이 강력히 시행되는 등 하층민이 억울한 일이 있어도 그것을 제대로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막혀 있었다. 이에 하층민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직접 호소할 수 있는 새로운 효과적인 수단으로서, 격쟁·상언(上言) 등이 생긴 것이다. 이 격쟁 제도는 16세기 중종·명종 연간에 관행적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격쟁은 직접 대궐에 들어와서 하거나 혹은 왕의 거동 때 하기도 하였고, 특히 나무나 언덕 등 높은 곳에 올라가거나, 나뭇가지에 큰 글씨를 쓰거나 소리를 질러서 왕의 시선을 끌기도 했다. 또한 격쟁 역시 신문고와 마찬가지로 백성들이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고자 많이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격쟁을 위해서는 일단 피의자 신분이기 때문에 격쟁을 한 뒤 곤장을 맞고서야 그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쟁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횟수의 제한이 없다는 격쟁의 특징으로 인해, 산의 소유권 문제를 둘러싸고 3년 동안 7번이나 격쟁을 행한 이안묵(李安默)의 사례도 격쟁이 많이 시행되었다는 사례가 될 수 있다.

신문고나 격쟁에 대하여 당시 지배층이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한 제도라는 평가도 있지만, 국왕 개인이 성군(聖君)의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다는 평가도 있다. 무엇이 되었건 지금과는 다른 시대에 이러한 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분명 자유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2014년을 맞이한 대한민국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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