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이원석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들에게 띄우는 위험한 욕망으로의 초대-자기계발서” ①

 

【투데이신문 이광명 기자】한 사회 안에는 매우 다양한 개인이 존재한다. 이 개인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세상에 태어난다. 생김새가 다른 만큼 같은 사회에 존재면서도 경험하는 것이 다르고, 살아가는 환경과 문화가 다르고, 생각하는 관점과 가치관 역시 다르다. 한 사회가 건강하고 건전하다는 의미는 이러한 각 개인의 욕구가 다채롭게 반영되고, 최대한 그대로 지지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다양성이 거세된 채 모든 사회의 구성원이 단 하나의 욕망을 향해 달려들어 서로를 뜯고 할퀴도록 내몰리고 있다면 어떨까. 우리는 지금 그러한 소름끼치는 사회가 제시하는 욕망의 노예가 되어 닿으려야 닿을 수도 없는 천상의 궁전탑(Tower Palace)을 향해 서로를 계단삼아 밟고 밟으며 열심히도 오르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 ‘자기계발서’들은 불쏘시개 역할을 톡톡히 하며 이 생지옥이 더욱 활활 타오르도록 불을 지르고 있다. 지금껏 나의 삶의 지침이 되어주는 ‘자기계발서’들이 우리의 삶을 지옥으로 이끄는 불쏘시개이자 땔감이라니! 믿을 수 없는가? 그렇다면 이원석 작가를 만나보라. 지난 해 ‘거대한 사기극’이라는 책을 통해 자기계발서들이 우리들의 뒤통수를 어떻게 치고 있었는지를 낱낱이 밝힌 이후 이번에는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라는 책을 펴내 이 시대 베스트셀러 13권을 파헤쳐 우리들이 어떻게 우롱당하고 있는지를 신랄하게 드러냈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이원석 작가를 만나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라는 책을 중심으로 이 시대의 인간의 조건에 대한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눠봤다.

-책을 쓰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제가 ‘거대한 사기극’이란 책을 썼을 때 같이 작업을 진행했던 책이다. 거대한 사기극이 하나의 체계를 가지고 자기계발의 역사, 형식, 담론, 주체의 굵직한 주제별로 이야기를 풀어갔다면 이 책은 주요한 베스트셀러를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보면 알겠지만 서평을 빙자한 잡다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으로 그냥 하고 싶은 말들을 주저리주저리 했다. 거대한 사기극과 함께 1년 넘게 틈틈이 쓰고 손봐온 책이다.

-제목이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다. 인문학이란 단어가 눈에 띈다.

제가 붙인 제목은 아니다. 다만 책의 프롤로그에도 썼듯이 인문학이란 인간의 조건에 대해 탐구하는 학문이다. 자기계발서의 자조정신 즉 자기 스스로를 돕는 정신이 우리시대 인간의 조건을 구성하고 있다. 따라서 자기계발서를 통해 이를 탐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베스트셀러를 통해 우리시대를 읽어낸다면 그것이야 말로 인문학적 접근이라고 본다.

-베스트셀러 중에서도 13권의 책을 선정한 이유는.

가장 잘 팔렸던 책들이고 사람들에게 가장 각인이 된 책이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긍정의 힘이라는 책은 자기계발이 우리나라에 도입된 대표적인 매개가 됐다. 기독교서적이긴 하지만 기독교와 자기계발의 친화성 때문에 끄집어냈고, 비기독교인들에게도 많이 읽힌 책이다. 나머지는 일반인들이 누구나 들어봤을 책들이다. 어떤 것은 자기계발서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책들도 있을 것이다. 데이비드 브룩스의 ‘보보스’라든지, 박경철의 ‘자기혁명’이란 책이 그렇다. 어떻게 이런 책을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라는 천박한 책과 비교할 수가 있냐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우리 인간의 조건을 탐구하겠다는 인문학의 취지에 맞게 좋은 소리를 듣든 나쁜 소리를 듣든 어쨌든 잘 팔리는 책을 살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걸 자기계발서 쪽의 베스트셀러로 묶어본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자기계발서처럼 보이지 않는 책도 있는 것이고 자기계발서이지만 좋은 책으로 칭찬받는 책도 있는 것이고, 비판받는 책도 있고 그렇다.

-현 시대에 자기계발의 의미란 무엇인가.

우리 사회는 참 사람을 힘들게 하는 사회다. 뭘 해도 힘들다. 공부도 취업도 연애도 결혼도 육아도 주거 공간 마련도 어렵다. 모든 것을 스스로 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고등학교만 나오더라도 취업이 가능했고, 늦어도 사십대면 다들 집을 마련했고, 결혼은 보통 이십대 후반이면 밥상과 숟가락 젓가락 두벌만 가지고도 사랑 하나로 하는 세대였다. 그러나 지금은 스스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몰아세우고 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사회가 작동할 수 없는 구조가 돼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가 기업이 국가가 그리고 나아가서 출판계가 한 마음으로 한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모든 사람을 배터리로 활용함으로써 사회 전체가 작동하는 것처럼.
더불어 부에 대한 욕망이 하나의 상징이나 알레고리가 되었다. 예를 들자면 제 책에서 첫 번째로 언급된 책이 로버트 기요사키의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인데 IMF 상황 직후 나락으로 떨어질 때 외려 “여러분 부자되세요.”라는 위에서 부르는 욕망에 소구하는 부르짖음에 사람들은 반응했다. 이는 그 간격이 벌어진 만큼 위험한 것이다. 누구나 취업할 수 있고 누구나 결혼할 수 있는 대부분이 중산층인 사회에서는 그런 식의 초대가 필요하지 않다. 물론 부자가 되고자하는 욕망은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저 주어진 삶을 살아가면 됐는데 지금과 같이 모두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는 위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들을 욕망의 대상으로 바꾼다. 아파트 꼭대기 층에 대한 갈구처럼. 우리가 자기계발서를 읽는 것과 자기계발서를 논하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을 반영한다.

-개인의 자아실현과 경쟁, 승자독식의 모순, 부에대한 욕망, 열정강박 등으로 표상되는 지금 시대에 대한 진단 역시 필요할 것 같다.

우리 사회를 나는 보통 네 가지 키워드로 설명한다. <경쟁사회>, 경쟁하니 피곤한 <피로사회>, 그 경쟁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배제되는 <잉여사회>, 이 모든 것에 두려움이라는 채찍을 휘둘러서 사람들을 내모는 공포 및 <불안사회>. 이런 사회 자체가 사람들을 자신의 자리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조용히 해나갈 수 없도록 함과 동시에 과장된 공포, 과장된 욕망, 과장된 기준, 과장된 목표 등으로 내몰아 간다. 사회가 미쳤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그토록 미친 사회를 만드는가.

간단히 말해 결국 이 사회는 1% 사람의 욕심에 따른 재구조화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얼마 전 스위스의 경우 국민투표로 부결되긴 했으나 같은 회사 안에서 받는 가장 적은 급여와 가장 많은 급여의 차이를 1:12로 제안하자는 법안이 발의되기도 했다. 또 스위스 다보스 세계경제포럼(WEF)에 따르면 상위 1%가 전 세계 모든 재원의 46%를 차지하고 있다는 발표가 났다. 약 110조달러다. 원화로 환산하면 12경정도가 되는 어마어마한 액수다. 세계 상위 85명의 재산은 1조6551억 달러로 세계 인구 하위 절반의 재산을 모두 더한 것과 같은 수준이다. 자본주의 초창기였던 19세기에는 안전장치가 없었기 때문에 성인들은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조차도 자는 시간이 없이 노동을 했다. 그때 보통 성인들이 30대에 죽었다. 비정상적인 사회였다. 아이들에 대한 노동에 제한을 건 것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러다 20세기 초반 세계 공황이 발생하며 인간의 욕망에 제동이 걸렸다. 이에 대한 각성으로 20세기 중반에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분명히 길한 관계가 성립돼, 국가는 기업에 일정한 규제를 가했고, 중류층과 하류층의 경계 속에 제한된 파이가 어느 정도는 분배가 됐다. 그래서 미국과 마찬가지로 우리나라도 다이몬드형 구조로 중산층이 두터웠고 하층민까지 사회가 지지할 수 있는 구조였다.
그런데 갈수록 상류층 비율이 20:80에서 10:90, 1:99로, 심지어 데이비드 로스코프의 ‘슈퍼클래스’라는 책을 빌자면 이제 0.000001:99.999999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 아주 비정상적인 사회다. 요즘 하이클래스들만 연구한 별도의 책들도 많이 나오고 있다. 더욱이 이런 최악의 상태에서조차 최근 아베노믹스의 정책이 법인세를 줄이는 것이었다. 기업의 부담을 줄여 낙수효과를 기대하겠다는 것이지만, 사실 ‘낙수효과는 없다’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조사결과 드러났다. 아베노믹스의 법인세 인하 정책은 사회로의 환원이 되지 않아 소비의 촉진을 일으키지도 못할뿐더러 CEO나 이사와 같은 상류계층들만의 잔치가 될 것이라고 이미 경고를 했다.

지금의 사회는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더 가지고자 하는 욕망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아주 단순하게 이것이 첫 번째 문제다. 그리고 이것에 중하류층이 부화뇌동하는 것이 두 번째 문제다. 이 사람들은 ‘부자가 무슨 잘못이야’라고 말한다. 물론 부자 자체가 잘못은 아니지만 많은 경우 부자가 되는 방식이 문제가 된다. 흥미로운 것은 20여년 전만해도 많은 사람들이 한편에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이 있긴 했으나 부자에 대해 비판하는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부의 축적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사람들이 보고 있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었고 사회가 건전한 균형감각을 가지는데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시대에는 부자가 되지 못하면 병신이다. 가난한 것은 불편한 것이 아니라 죄가 됐다. 가난의 문제가 윤리적 문제로 환치됨과 동시에 가난은 곧 무능이 됐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에서 드러나듯이 기업인이나 투자자가 되어서 중하류층의 고혈을 빨아먹는 것이 능력이고 그렇지 않으면 노동의 대가 전체를 받지 못하고 일부를 기업인과 투자자에게 뺏기는 노예가 된다. 그것으로 지혜로운 자와 우둔한 자가 나뉜다. 이런 사회에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부정한 부의 축재를 견제하기 위해 투표하거나 제동을 걸어야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도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십대 청년들의 생각을 담아놓은 책으로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오찬호씨의 책이 있다. 지금 대학생들은 자신의 학교 로고가 새겨진 잠바를 입고 다닌다. 자기가 고생해서 이 학교를 들어갔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이번에 모 대학의 청소노동자분들이 집단시위를 했었는데 그 학교의 총학생회에서 학교 브랜드 가치가 떨어진다고 이 문제에 나서지 말라고 학생들을 독려했다. 굉장히 황당한 이야기다. 그것이야말로 학교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학생들의 질을 떨어트리는 발언인데 그것을 모르고 있다. 기본적으로 자신은 절대 노동자가 아니다, 아니면 자신은 절대 하층으로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는 착각을 한 채 위로 올라가리란 망상을 품고 있다. 그러므로 1차적 책임은 물론 하이클래스의 거대한 욕망과 그에 따른 고도의 구조적 설계겠지만 그에 부화뇌동한 대중들의 잘못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을 한다.

▲ ⓒ뉴시스

-자기계발서를 쓰는 저자 본인들이 이렇듯 대중들을 호도하고 있다는 사실과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공감은 하고 있지만 사회구조를 변혁하는 등의 대안은 너무나 요원하고 어려운 문제이기 때문에 그 해결책이 개인적인 차원에 국한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은 아닌가.

일단 “자기계발서로 돈을 버는 사람은 자기계발서를 쓰는 사람뿐”이라는 말이 있다. 근본부터 따져보자면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간혹 이 책을 읽고 스스로 변화했다고 믿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플라시보효과라는 것도 엄연히 존재하니까. 저 역시 자기계발서의 유용성을 전적으로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기계발서가 추구하는 방식은 self-help, 즉 스스로를 바꾸라는 것이다. 사회를 바꾸자는 메시지는 없다. 이 사회는 기본적으로 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해서 돌아가는 구조다. 그러니 착취하는 자의 자리에 서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지성은 ‘리딩으로 리드하라’에서부터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이야기를 시작은 하지만 결국 자세히 읽어보면 “고전을 읽으면 뇌가 변화되어 천재가 된다. 그것을 통해 너는 부와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그친다. 즉 가난한 대중이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은 고전을 읽는 것이라는 말인데 인문학 공부 10년을 하면 실없는 사람 그 이상이 되기 힘들다. 비정규직을 전전한다. 저만 해도 그렇다. 인문고전을 10년 넘게 읽었지만 뇌가 천재가 되지도 않았을 뿐더러 부와 권력도 오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다. 내 통장 잔고가 그것을 증명한다. 굉장히 그럴듯한 사회개혁을 위한 지침을 주는 것 같지만 거짓이다. 결국 자기변형만큼이나 사회변형을 같이 말하지 않는 것은 기본적으로 한계가 있는 것이다.

만일 사회가 정상작동한다면 자기계발만 말을 해도 괜찮다. 취업이나 결혼이나 육아 및 신분상승이 어렵지 않은 중산층이 탄탄한 사회에서는 좀 더 나아가고자 자신의 노력을 살짝 얹는 정도로 자기계발을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데 생존자체에 자신의 노력을 요구는 사회에서는 플러스알파로 사회 자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그것을 못 보게 하고 애써 자기계발만을 강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것을 통해서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결코 사회가 바뀌지 않는다. 문제는 더욱 심화되고 악순환될 것이다.

지금 당장 후대에 살아갈 우리의 자식들에게 어떤 삶을 주겠냐고 묻고 싶다. 내 아이만 잘되게 하겠다는 것은 이 지옥을 그대로 물려주겠다는 것이다. 현재 아이들을 교육열로 경쟁지옥에 밀어 넣고 있다. 영어유치원 10개가 생기면 소아정신과 병원 1개를 먹여 살린다는 얘기가 있다. 청소년들 절반은 심각한 정서적 문제에 봉착해있다. 그렇더라도 일단 우리 아이만이라도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직장에 들어가서 풍요로운 삶을 살면 된 것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아이들의 내면세계가 파괴되는 것에 대한 인식은 없는 것이다.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자신의 아이가 학력과 직업과 결혼으로 이러한 위태로운 사회 속에서 상위레벨을 차지하는 것보다는 내면의 평안이나 안정을 통해 참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최근 SBS의 ‘부모 vs 학부모’라는 다큐멘터리를 보니 능력 있는 학부모들이 나와 아이들을 다그치는 모습이 나왔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아이들이 괴롭겠지만 부유하면 또 그런대로 힘들다. 이 사회가 경쟁사회다보니 계속해서 위로 올라가야 하는 압박에 시달린다. 결국 능력 있는 부모와 없는 부모 및 그의 자녀들이 모두 불행한 사회가 된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해 이러는 건지 알 수 없다.

-그럼 이러한 자기계발서의 저자들 역시 기득권층의 욕망을 대변하는 고도화된 설계에 동조하고 있다고 생각하나.

대부분은 지지하고 있다.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제 책 언급된 박경철 씨를 포함한 두세 명은 그런 부류는 아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기계발서 작가들은 어퍼클래스에 친화적일 수밖에 없다. 자기계발의 이데올로기에 비추어 보면 성공한 사람들만이 선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토록 열광하는 자기계발서 저자들이 본인의 밥벌이를 위해 이러한 이데올로기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말인가.

그렇지는 않다. 물론 악용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이미 자기계발서를 쓰는 저자들은 그 이데올리기를 신봉하고 있을 것이다. 글 쓰고 말하는 것과 자신의 내면의 믿음에 간격이 벌어지면 견디기 힘들다. 심지어 자신의 믿음이 틀어지면 자살을 하는 경우까지 있다. 제가 좋아하는 영화 중 ‘미스 리틀 선샤인’이라는 게 있다. ‘사랑스러운 콩가루 집안’에 관한 내용인데 가족의 아버지가 자기계발 강사다. 그런데 자기 가족도 건사하지 못하고 자기계발 박람회에서도 쫄딱 망한다. 자기도 자기의 가르침대로 안 되니까 열폭한다. 마찬가지로 자기계발서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 많은 작가들이 모두 성공하지는 못한다. 일부만 매우 성공한다. 이 자기계발시장조차 승자독식이 지배한다. 자기계발서 시장이 확장된 것은 IMF이후이지만 그 전에도 비슷한 가르침은 있었다. 예를 들어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에 나오는 ‘일만시간의 법칙’은 이미 1970년대부터 있는 이야기였다. 그 당시에는 냉정하게 만 시간의 법칙은 이미 재능이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된다는 전제가 있긴 했다. 물론 현재는 좀 이상하게 적용하고 있긴 하지만 어쨌든 다 있던 가르침이다. 시크릿의 내용도 이미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것이 필요 없었기 때문에 주목을 못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에 대한 열망이 없으면 다 죽을 것 같으니까 그런 책들을 읽는다. 아마 자기계발 작가들도 그것을 믿고 있거나 믿으려고 발버둥치고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쓴 이유의 일정 부분은 그런 이데올로기에 세뇌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각성시키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던 건가.

각성이라는 계도적인 용어는 부담스럽지만, 거짓말이라고 말하고는 싶었다. “솔직히 말해봐라. 그렇게 하니까 정말 되던? 시크릿의 법칙을 따라 해보니까 되던? 아침형 인간이 좋던? 만 시간의 법칙이라는 건 재능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거 몰라? 정말 너에게 그 일을 하고 싶은 열정이 있어? 진짜 진심이야? 거짓말 하지마. 넌 가난하고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 일을 하고 싶지 않잖아.” 이렇게 묻고 싶었다.

<<다음호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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