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격인터뷰] ‘서울시 간첩사건’ 유우성 변호인 김용민 변호사 下

   
▲ 김용민 변호사

【투데이신문 이광명 기자】온 국민을 경악시켰던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은 최근 국정원 협조자로 알려진 김모씨의 자살시도까지 벌어지며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국정원과 검찰에 의해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유우성씨의 간첩행위와 관련된 증거들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 누명을 벗는가 싶더니, 그 조작에 관여했던 국정원 협조자 김모씨가 자살시도를 하며 ‘증거는 조작한 것이 맞지만 유우성은 간첩이 확실하다’는 유서를 남겨 혼란은 가중되는 상황이다.

이에 <투데이신문>은 “그래서 대체 간첩이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라는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해소해볼 요량으로 유우성씨의 사건을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며 잘 알고 있으리라 판단되는 유우성씨의 변호인 김용민 변호사를 찾아가 그간의 공소사실과 그 외 제기되고 있는 의혹들에 관해 집중적으로 들어봤다.

이번 인터뷰는 <투데이신문>에 2회에 걸쳐 실릴 예정으로 이번 호에서는 국정원과 검찰에서 제기한 유우성씨의 간첩혐의와 관련된 공소사실과 유우성씨 및 변호인 측의 입장을 정리해 보았고, 다음 호에는 동생 유가려씨의 강압수사로 인한 허위진술의 진위, 유우성씨와 박원순 시장과의 관련성 의혹이 불거지는 이유, 국정원 협조자 김모씨의 자살시도와 관련된 의문점들 및 유우성씨가 간첩혐의로 공소된 시기가 가지는 함의성에 관한 이야기가 실릴 예정이다.

▲ 일단 전반적인 사건의 흐름을 듣고 싶다.

-유우성씨는 간첩활동과 관련해 9개의 혐의점으로 공소를 당했고 1심에서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현재는 검찰의 항소로 2심이 진행 중에 있고 4월 중에 판결이 날 예정이다.

검찰과 국정원의 첫 번째 공소사실은 유우성씨가 2006년 5월 하순 경 두만강을 도강해 밀입북했다는 것인데, 이게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다. ‘출입경 기록을 조작했다’는 부분이 이 지점이기 때문이다. 이 때 유우성씨가 북한에 들어간 사실이 없다고 하면 공소사실 전체가 다 날아갈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때 북한 보위부로 끌려가 구타를 당하면서 인입되어 간첩 즉 공작원이 됐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가 무너지면 검찰의 공소사실이 전체가 무너질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검찰 입장에서는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한 부분 중 하나다.

어쨌든 유우성씨가 5월 23일 경 어머니의 장례식 때문에 북한에 들어갔다가 5월 27일에 중국으로 나오는데 이 출입국 기록이 중국입장에서의 기록이기 때문에 북한에 갈 때는 출(出)이라고 적혔고 북한에서 중국으로 올 때는 입(入)이라고 쓰여 있다. 유우성씨는 2004년에 탈북한 뒤 남한에 정착해 살면서 어머니와 가끔 전화 통화를 했다. 탈북자들도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랑 휴대폰으로 전화통화가 가능하다. 특히 유우성씨 가족이 살던 회령은 국경지역이기 때문에 중국휴대폰을 들고 가면 터지는 곳이 있다. 남한에서 중국으로 전화를 하는 방식이지만 북한에서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저도 중국 국경지대에 가서 직접 실험을 해봤는데 전화가 잘 터졌다. 몇 발자국만 더 걸어가면 북한이니까 당연히 터진다. 어쨌든 유우성씨가 어머니와 그런 식으로 전화 통화를 하다가 국경지대를 감시하던 북한 보위부의 전화탐지기에 적발이 된다. 유우성씨의 어머니는 그 일로 추궁을 당하다가 너무 놀란 나머지 심장마비로 돌아가시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자기 때문에 돌아가신 것이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낀 유우성씨가 북한에 장례식을 치르러 직접 들어갔던 것이다.

   
 

▲ 아무리 어머니의 장례식이라고 하더라도 탈북자가 북한에 가는 것이 가능한 일인가?

- 사실 불가능하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고 법률상 위법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법에 위반되기는 하지만 중국법에 위반되게 갔던 것은 아니다. 일부에서 “북한보위부의 비호를 받으니까 갔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탈북자 중에서도 우리나라로 왔다가 다시 돌아간 사람들이 전혀 없지도 않다. 신분세탁을 해서 들어간다든지 하면 가능하다. 다만 유우성씨의 경우는 화교이기 때문에 중국 연길에서 국경 근처에 사는 중국인들이 북한을 출입할 때 사용하는 정상적인 통행증을 발급받아 북한의 회령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즉 정상적으로 입북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유우성씨 가족이 할아버지 때부터 3대에 걸쳐 북한 회령에 살았으나 가족이 적극적으로 북한 국적을 취득하지는 않아 계속 중국국적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재북 화교는 북한에 거주하고는 있지만 북한 국민에 비해 자유롭게 지내고 있는 편이다. 그 중 하나가 정식적인 절차로 비자를 발급받기만 하면 중국출입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유우성씨의 경우도 우리나라에 정착해 살고는 있었지만 중국에서는 화교의 신분으로 입북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것을 두고 국정원과 검찰에서는 북한 보위부에서 유우성씨가 2004년에 탈북했다가 2006년에 갑자기 다시 북한으로 들어간 것을 이상하게 여겨 데려가 조사하는 과정에서 간첩이 됐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변론 과정에서도 확인됐지만, 북한에 살고 있는 재북 화교들은 북한이 좀 열악하니까 자녀들을 중국으로 많이 보낸다. 거기서 대학도 다니고 북한으로 다시 돌아가기도 하고 안 돌아가기도 하고 그렇다. 따라서 북한을 떠났다가 몇 년 만에 다시 돌아가는 것이 그렇게 이상하고 굉장히 어색한 일은 아니다. 그리고 사실상 북한보위부에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따라서 유우성씨의 입북이 북한보위부의 대단한 주의를 끌었다는 것은 틀리다는 얘기가 필요하다. 어쨌든 이것이 첫 번째 공소사실인 ‘특수잠입’인데 북한의 지령을 받고 한국에 왔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검찰 측 증거는 유가려씨의 진술 오로지 하나다.

이어지는 2006년 8월의 공소사실은 ‘편의제공’이다. 도시바 노트북 14인치를 사서 우편으로 중국에 있는 외당숙에게 보냈다가 외당숙이 북한보위부에 전달했다는 것이다. 예전에 유우성씨가 이것과 관련해서 거짓말을 한 적이 있다. 그 당시에는 화교신분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했던 것인데, 이 사건이 국가보안법으로 기소되면서 이제는 화교신분까지 다 공개된 상태이기 때문에 더 이상 숨길 필요가 없어 사실대로 말을 했다. 아무튼 2008년이나 2009년에 수사 받을 당시는 국정원이 추궁하는 대로 이 노트북을 자기가 보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그 때 우편으로 중국에 보냈다는 우편물 발송 기록을 보니 무게가 1.9kg 안팎이었다. 이 당시 가장 가벼운 14인치 도시바 노트북이 2kg을 넘었다. 후에 이것이 설명이 안 되니까 북한보위부에 뇌물을 주고 밀입북해서 갔다 왔다고 말했지만 유우성씨가 화교로 통행증을 발급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래서 결국 이것도 무죄 판결이 나왔다.

그 다음 공소사실이 ‘탈출’이다. 이 말은 대한민국을 벗어나 북한으로 갔다는 말이다. 용어도 되게 이상하다. 탈출이라는 죄명이 붙는 것에 대해 ‘대한민국이 하나의 거대한 감옥이냐, 여기서 탈출했다는 얘기냐’ 등 법학자들 사이에도 논란이 많았다. 어쨌든 이때의 혐의점은 2007년 8월 중순 경에 두만강을 도강해서 밀입북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황당한 것은 그렇게 밀입북한 뒤 다른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당구를 치고 놀았다는 것이 전부다. 이에 대해 검찰 측이 제시한 증거가 여동생 유가려씨의 진술이었는데, 처음에는 오빠가 북한에 왔다고 했다가 기억이 안 난다고 말을 바꿨다. 후에 법원에서 증언할 때는 아예 그런 사실이 없었다고 했지만 수사단계에서는 기억이 안 난다고 번복했다. 따라서 유가려씨의 진술은 사실상 증거가 될 수 없었을 테고, 그 당시 유우성씨를 북한에서 봤다는 북한 탈북자들의 증언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말이 다 신빙성이 없어서 이것도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주요참고인 2명이 있었는데 그 중에 1명은 자기 평생에 유우성씨를 딱 두 번 봤는데 그 때 본 게 기억이 난다는 식이다. 더욱이 그날이 자신의 남편이 감옥을 갔다가 나온 출소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건 기억을 못 했다. 그리고 그 때 북한에서 미용사를 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 탈북자 1명은 그 당시 자신이 남한의 머리 스타일을 잘 알고 있었다며, 유우성씨의 머리스타일이 어땠고 살이 어느 정도 쪘기 때문에 정확히 기억을 한다고 진술했다. 그래서 그 당시 유우성씨가 찍힌 사진을 보여주며 혹시 이 사람이냐고 했더니 이 사람 아닌 것 같다고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다고 말을 했다. 거짓말을 지어낸 것이다. 국정원에서 만들어준 이야기 같다. 그래서 신빙성이 없는 것으로 그 참고인들의 증언도 날아가 버렸다. 이때 공소사실의 가장 황당한 점은 2006년에 북한보위부의 공작원이 되고 1년이 좀 지나서 북한에 다시 가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심지어 가족도 만나지 않은 채 당구를 치고 놀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 때 가족인 유가려씨는 유우성씨를 만난 적이 없다고 진술했다. 따라서 이 공소사실 자체만으로도 좀 이상할 뿐이다.

   
▲ 간첩 혐의를 받고 있는 유우성 씨 ⓒ뉴시스

이어지는 공소사실은 ‘탈북자명단제공’이다. 이 부분부터가 본격적인 간첩행위가 시작된다고 하는 부분으로 검찰과 국정원 측은 유우성씨가 탈북자명단제공을 총 3번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2011년 2월로 이 때 여동생 유가려씨에게 탈북자 명단 50명을 넘겼다는 것이다. 이 때 유우성씨는 남한에 있고 여동생은 북한에 있는 상태로 북한은 인터넷이 안 되니까 메신저를 이용해 명단을 건네받기 위해 유가려씨가 두만강을 도강해서 중국으로 간다. 유가려씨 키가 160cm도 안 된다. 겁도 굉장히 많고 심장도 좋지 않은데 한 밤중에 혼자 도강을 해서 중국의 PC방을 갔다는 것이다. 거기서 중국에서 가장 많이 쓰는 QQ메신저라는 것을 통해 명단을 보냈다는 것이 공소사실로 돼있다. 그런데 유가려씨는 북한에 있을 때 중국여권이 있었다. 중국여권이 있기 때문에 비자를 발급받으면 얼마든지 합법적으로 북한에서 중국을 왔다갔다 할 수 있었다. 물론 비자를 발급받는데 시간이 좀 걸리긴 하지만 화교는 비자를 쉽게 발급받을 수 있고, 2011년 2월은 이미 유가려씨가 비자를 받은 상태였다. 그 비자를 받은 여권이 자기에게 오는데 시간이 좀 걸리기 때문에 유가려씨에게 이미 여권이 왔는지 오고 있었는지 그것은 불분명하지만 유가려씨 입장에서 비자를 신청한 것은 분명하고 언제쯤 오리라는 예상은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유가려씨에게 중국에 가서 탈북자 명단을 받아오라고 하면 곧 비자가 나오니 그걸로 다녀오겠다고 얘기해도 되는 문제였다. 도강을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말이 안 되는 것이다.

두 번째 탈북자명단제공은 2011년 5월에 유가려씨가 중국에 가서 QQ메신저를 통해 탈북자 명단을 받아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때는 좀 전에 언급한 그 비자로 중국에 갔다 온다. 그리고 이때 유가려씨가 실제 북한에서 중국을 갔던 것은 맞다. 그러나 중국 PC방에 가서 탈북자 명단을 받으러 갔던 것은 아니었다. 유가려씨의 출입경 기록에 실제로 중국에 갔던 일이 있으니까 이 때 가서 또 한 번 받아온 걸로 하자 이런 식으로 짜 맞춘 것 같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은 유가려씨가 QQ메신저에 가입한 시기가 2011년 8월 이후라는 점이다. 그 가입일자를 증거로 제출하기도 했다. 따라서 저희가 2011년 2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유가려씨 명의의 QQ메신저를 이용해 탈북자 명단을 보냈다는 것은 성립이 안 된다고 하자 검찰은 유가려씨가 다른 사람의 QQ메신저를 통해서 보냈을 수 있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유가려가 검찰과 국정원에서 조사받은 내용을 보면 자신의 QQ메신저로 탈북자명단을 받았다고 본인의 ID를 명백하게 적어 넣은 기록이 있다. 그것에 기초해서 QQ메신저 이야기가 나왔던 건데 검찰과 국정원이 자가당착에 빠진 것이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메신저 ID를 빌려 썼다고 함으로써 유가려씨의 진술 자체가 신빙성이 없다는 뜻이 돼렸다.

   
 

▲ 그렇다면 유가려씨가 중국으로 갔던 본래 이유는 무엇인가?

- 화교들은 북한에서 중국을 친척방문 목적으로 가기도 하고, 북한이 먹고 살기 힘드니까 중국에 가서 생필품 같은 것을 사가지고 북한으로 돌아가 팔기도 한다. 그런 식으로 생활비를 벌고 그런다. 유가려씨는 거의 그런 일이 없었지만 유우성씨나 그의 아버지도 몇 번 그런 이유로 북한과 중국을 왔다 갔다 했던 것 같다. 다만 이때 유가려씨의 중국방문은 굉장히 중요한 시기로 볼 수 있는데, 2011년 7월 9일에 유가려씨와 유가려씨 아버지가 북한에서 중국으로 아예 이사를 간다. 어머니는 돌아가셨고 오빠는 남한에 있는 상황으로 북한에서는 전화통화도 힘들고 둘만 살기가 힘드니까 중국으로 가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당시 유가려씨는 이사준비를 하기 위해 북한과 중국을 오가는 상황이었다. 짐도 좀 가지고 가서 아는 사람 집에 맡겨놓고 오고 그랬던 것이다. 아무리 화교라 할지라도 중국으로 정식으로 이사를 가는 것은 북한 당국에서 못하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몰래 가기 위해서 2011년 7월 9일에는 딸 유가려가 중국으로 시집간다고 거짓말을 해서 짐 보따리 몇 개를 들고 이사를 했던 것이다.

이어 2011년 7월 초 이사 가기 바로 직전에 유우성씨가 또 밀입북을 했다는 유가려씨의 진술이 있다. 이때의 공소사실은 ‘특수탈출 및 회합’이다. 왜 오빠인 유우성씨가 밀입북을 했냐고 하자 북한 보위부에서 유우성씨 혼자 남한에서 간첩활동을 하면 위험하니까 여동생인 유가려씨도 남한으로 침투하라고 지시를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가려씨가 남한으로 가고 싶지 않아 유우성씨에게 자신은 안가면 안 되겠느냐고 묻자 유우성씨가 직접 북한으로 찾아와서 유가려씨가 함께 남한으로 가야할 지를 반탐부부장과 상의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북한보위부에서는 그래도 가라고 했고, 그렇게 결정이 나자 유우성씨는 다시 북한에서 나갔다는 것이다. 그러나 유우성씨는 역시나 이 때 북한에 간 적이 없었다. 가족이 중국으로 이사를 나와야 하니까 중국 연길에 가서 가족들이 살 월세를 알아보러 다니고 월세 계약하고, 이러면서 가족들이 이사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것 역시 알리바이가 다 입증됐다.

그 다음 2012년 1월 22일이 저희에게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는데 이때가 설이었다. 이때의 공소사실은 ‘특수탈출, 회합, 편의제공’이다. 그 무렵 유우성씨가 북한에 다시 밀입북했다는 것이다. 유가려씨의 기존 진술에 따르면 아버지가 먼저 북한에 있는 집에 들어가 있었고, 오빠인 유우성씨는 1월 22일에 북한에 가서 머물다가 24일에 다시 중국으로 돌아왔다는 것이다. 유우성씨는 1월 22일에 북한에 들어가서 반탐부부장과 만났고, 1월 23일에는 표창도 받았고, 북한 보위부에 카메라와 휴대폰 등의 뇌물도 주고 왔다는 취지였는데 1월 22일에 연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 발견됐다. 여기서 바로 검사 측의 공소사실이 깨졌다. 아버지가 먼저 북한에 들어갔다면 1월 22일에 찍은 가족사진에 아버지가 유령이어야 하는데 말이 안 된다는 것이 바로 드러났다. 그리고 1월 23일에 찍힌 노래방사진이 있었는데 이것도 굉장히 유명한 증거가 됐다. 이 사진에는 유우성씨 가족 전부와 친하게 지내던 다른 사람 및 설을 같이 보냈던 가족들이 다 같이 노래방에 가서 노래 부르고 재미있게 노는 모습이 찍혀있다. 유우성씨가 자신의 아이폰으로 찍었던 것이다. 그 사진이 유우성씨 노트북에 저장돼있어서 그것을 찾아 저희가 증거로 제출했다. 그런데 검찰과 국정원에서도 유우성씨 노트북을 다 복사해간 상태였다. 그 안에 사진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사진들을 봤다면 쉽게 다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유우성씨가 1월 23일에 사진을 한 장만 찍은 것도 아니고 여러 장을 찍었고, 1월 24일에 찍은 불꽃놀이 사진도 들어있다. 따라서 유우성씨 변명을 듣고 사진을 한 번만 봤어도 이런 공소사실은 나올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검찰에서 유가려씨의 진술과 함께 낸 증거가 이 사진이었다. 이것은 유우성씨가 북한에서 어렸을 때 나고 자라면서 찍은 사진첩의 사진을 휴대폰으로 촬영한 것으로 한 5년 만에 중국에 있는 집에 가서 사진첩을 보다가 추억을 떠올리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재미도 있고 해서 그걸 자기 휴대폰으로 찍었던 것이다. 그게 1월 23일에 찍은 사진들인데 국정원은 다른 사진들은 놔두고, 그 사진만 추려내서 이것이 북한에 간 증거라고 내놨다. 이 사진들이 북한집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이폰은 사진을 찍은 위치가 확인이 되기 때문에 추적해본 결과 유우성씨가 말한 중국 연길의 본인 집에서 찍었다는 것이 확인됐다. 그래서 그 증거들도 다 날렸다. 어쨌든 이 사건 전체를 흔드는 핵심이 여기부터 시작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서 증거가 워낙 많았기 때문이다. 검찰과 국정원의 논리가 전반적으로 다 흔들리기 시작한 시작점이라고 보면 된다. 이 사진과 관련된 증거는 다 무너졌고 검찰도 도저히 못 버텨서 1월 24일 하루만 갔다왔다고 공소장을 변경했다. 그런데 1월 24일에도 중국에서 유우성씨를 같이 만나서 놀았다는 증인들이 많이 있어서 저희들이 그것들도 증거로 제출했다.

   
▲ 유우성 사전 거리설명회 ⓒ뉴시스

그리고 2012년 7월, 이 시기가 굉장히 중요할 수 있는데 이때가 서울시 공무원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또 박원순 시장의 재임시기이기도 했다. 유우성씨가 2011년 6월에 공무원이 됐는데 공무원이 된 이후 첫 간첩행위를 했다는 것이 바로 이 대목이다. 이때 공소사실 역시 ‘탈북자명단제공’이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유우성씨가 탈북자 정보를 메신저를 통해서 보냈고, 유가려씨는 그 명단을 받기 위해 또 두만강을 도강한다. 7월이면 장마철인데 겁도 없이 그 깊은 곳을 유가려씨 혼자 도강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때는 QQ메신저가 아니라 윈도우 라이브 메신저를 이용했다고 했다. 유가려씨는 위의 두 차례의 명단제공도 윈도우 메신저를 이용했다고 했다가 QQ메신저로 말을 바꿨다. 한편 이 당시 두만강 도강은 정말 목숨 걸고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2월에는 얼음이 얼어서 얼음위로 걸어갔다고 했지만 이때는 아예 물을 건넜다고 하는데 USB는 비닐에 싸서 갔는지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렇게 갔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이 세 번의 탈북자명단제공이 모두 완전히 현실성이 없는 게 명단 자체가 몇 명 안 된다. 정 급하면 전화로 불러줘도 될 정도이다. 그게 더 빠르다. 목숨 걸고 갈 필요가 없다. 특히 보위부가 도와주면 보위부 앞에서 유우성씨와 통화를 했으면 될 일이다. 명단이라 전화통화가 어려우면 팩스로 보내도 된다. 북한으로 팩스도 간다. 중국에서 북한으로 팩스를 보내면 된다. 중국에 있는 친척에게 팩스 하나만 넣어달라고 해도 될 간단한 문제였다. 중국이랑 북한은 오랫동안 무역을 해왔고, 우리나라와 중국과의 관계보다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가 훨씬 끈끈하고 밀접하다. 그래서 교류가 더 많다. 그렇기 때문에 팩스 당연히 된다. 그리고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왔던 탈북자나 그쪽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팩스가 된다고 다 얘기했다. 그렇게 무리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점들을 미루어보아도 도강을 할 이유가 전혀 없다. 그래서 1심 판결에서도 도강할 이유가 없는데 말이 안 된다고 해서 그 공소사실을 날려버린 것이다.

이제 마지막 부분인데 이해가 어려울 수 있지만 재미있는 공소사실로 ‘특수잠입, 회합, 편의제공’이다. 2011월 7월 무렵 북한 보위부에서 유가려씨에게 너도 남한에 들어가라고 지령을 내렸다고 했다. 따라서 유가려씨 역시 그 지령에 따라 남한에 들어오는 것으로 얘기가 됐다. 유우성씨 본인도 간첩이긴 하지만 유가려씨도 간첩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간첩인 유우성씨가 간첩인 유가려씨를 만나는 것 자체가 ‘회합’이 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여동생을 만나면 처벌이 된다. 유가려씨가 2012년 10월 30일에 제주공항을 통해 우리나라로 입국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비행기 티켓이 필요하니까 오빠인 유우성씨가 유가려씨의 비행기표를 사줬다. 그러자 간첩에게 비행기표를 사줬다는 ‘편의제공’ 혐의로 처벌을 하겠다는 황당한 경우다. 유우성씨 본인도 지령을 받고 왔기 때문에 남한에 들어온 것 자체가 잠입이라고 해서 세 가지 죄목을 씌웠다. 저는 다른 것도 그렇지만 이것이 가장 비인간적인 부분이라고 본다. 보는 바와 같이 상황이 이 정도면 검찰이 기소할 때 유가려씨도 공범으로 기소해야 하는 것이 당연지사다. 그러나 유가려씨는 기소하지 않았다. 입건조차 하지 않는다. 과연 왜 그랬을까? 유가려씨를 입건하게 되면 바로 변호인 접견권이 인정이 되기 때문이다. 진술 거부권도 정식으로 행사할 수 있다. 유가려씨가 변호인을 만나는 순간 검찰과 국정원이 만들어온 것들이 다 무너질 수 있다. 그리고 실제로 유가려씨가 변호인을 만나는 순간 다 무너졌다.

<<다음 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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