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석 칼럼니스트
· 연세대학교 신학 전공
· 중앙대학교 문화이론 박사과정 중
· 저서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

인문학 청년 영웅의 양성

신세계그룹이 인문학 전파에 매년 20억원을 지원한다고 지난 3월 25일 밝혔다. 2014년 올해를 인문학 전파의 원년으로 삼겠다고 한다. 또한 인문학 소양을 갖춘 미래 지도자를 양성하고,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인문학 지식을 나누고, 우수 인문학 콘텐츠 발굴·전파 3단계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다각도로 접근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수 있는 이 대규모 행사는 한 면으로 보면, 요새 인문 트렌드를 반영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이 행사야말로 자본주의의 현주소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인문학적 열풍의 모방으로 치부하지 말고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신세계그룹은 인문학적 소양을 갖춘 청년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 ‘지식향연’을 통해 인문 청년 영웅을 키워보겠다고 선언했다. 사실 대기업은 우리 시대의 좌표를 보여준다. 대기업이 원하는 인재상이 달라지고 있다. 이제 우리 시대의 인재는 인문학을 구비해야 한다. 학점 관리, 영어 능력, 공모전 수상 등으로 대별되던 기존의 인재상에서 무언가 대학의 본령에 부합하는 인재상으로 나아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인문학과 자기계발이 만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인문학적 자기계발의 열풍은 이미 자기계발 선도국가인 미국와 일본의 유행을 따라한 것이기도 하다.

애초에 영웅이라는 개념도 달리 활용되고 있다. 이탈리아로의 그랜드 투어 프로그램을 제공하겠다고 한다(더욱이 신세계 그룹은 한국의 메디치 가문이 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것은 서구 문명의 근원을 탐색하겠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괴테를 위시한 서구의 지식인들이 고대 그리스를 동경하던 것을 상기해본다면, 거시적으로 충분히 가치 있는 양육 프로그램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영웅 또한 (고대 그리스를 대표하는 장르인) 비극의 주인공으로 이해되어야 맞지 않으려나 싶다. 신(으로 표현되는 자연)에 맞서 싸우는 것이 바로 영웅이 아니던가. 하지만 지금의 영웅은 외려인문과 IT를 결합하는 스티브 잡스 식의 새로운 인재상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문학과 자기계발

바로 이러한 측면이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첫 행사이다. 지식향연은 4월 8일 화요일에 시작한다. 정용진 부회장이 연세대학교 대강당에서 2000여 명의 대학생에게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강의한다. 지금은 갈라선 사이지만, 한때 <리딩으로 리드하라>의 저자 이지성을 멘토로 모셨던 것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리딩으로 리드하라>는 인문학을 통한 성공의 방법을 제시하는 자기계발서이다). 한때 언론에 오르내렸던 둘의 밀월관계가 이번 행사에 일정 부분 영향을 주었다고 봐도 무방할 게다. 정 부회장이 직접 인문학의 중요성에 대해 강의한다니 외디푸스 콤플렉스의 부친 살해 신화를 연상시키는 흥미로운 대목이다.

또한 정 부회장의 기조 강연에 이어서 진행되는 행사의 주강사들이 주목할 만하다. 2011년 광주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이었던 승효상 건축가가 인간에 대한 성찰을 발표하고, 언론인 출신의 문명탐험가 송동훈이 그랜드 투어의 역사와 의의를 해설한다고 한다. 전통적인 관점에 따르자면, 이 지점에서 초대되어야 할 사람은 인간학과 그랜드투어의 전문 연구자들이 아닌가 싶다. 당연히 그런 연구자들이 한국의 학계에 있다. 가령 그랜드투어 연구라고 하면, 연세대학교 사학과에 재직 중인 설혜심 교수를 떠올린다. 세 권으로 구성된 <송동훈의 그랜드투어>가 서구 기행기인 반면에 설혜심의 <그랜드 투어>는 본격적인 연구서이다. 그리고 신세계 그룹은 연구자 설혜심이 아니라 여행자 송동훈을 선택했다.

새로운 유형의 인문주의자

이러한 선택에 대해 비판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존의 방식과 달라진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일본의 대표적인 경영 컨설턴트인 오마에 겐이치가 지적한 것처럼, 교양의 의미가 달리지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상황으로 보면, 콘텐츠는 그대로인데, 메신저가 달라진 상황이다(어쩌면 콘텐츠도 달라지고 있겠지만). 즉 메신저가 연구실에 틀어박혀 문서를 탐구하는 낡은 이미지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대중에게 거리감이 없는 신선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생각해보라. 강사가 디자인비엔날레 총감독과 언론인 출신의 문명탐험가다.

마찬가지로 공연자들의 면면도 흥미롭다. 팝 피아니스트 윤한과 국악소녀 송소희양의 무대가 제공된다. 한 명은 ‘팝’피아니스트고, 다른 한 명은 SBS의 예능 프로그램인 <놀라운대회 스타킹>이 낳은 스타로서, 심지어 모 통신사의 광고모델까지 꿰찼다. 우리가 전에 알던 인문학자와 예술인들과 달리 이들은 모두 대중에게 친밀하게 다가서는 이들이다. 아까 말한 것처럼, 영웅 개념도 원래 비극의 주인공이다. 또한 인문학자는 세상의 평균적 입장에 거리를 두는 이들이다. 대중과의 비판적 거리를 전제한다는 뜻이다. 더욱이 예술도 많은 경우에 시대오의 불화 속에 앞으로 나아간다. 많은 예술가들이 불운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문 영웅 선발을 위한 오디션

지금의 상황에서 본다면, 인문학 청년 영웅의 상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인재상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더욱이 인문학 청년 영웅을 선발하기 위해 오디션을 본다고 한다. 우선 전국 10여 개 대학을 순화하는 가운데 지식과 지혜의 경연을 통해 150명을 선발한다. 다음으로 6월 말에 용인 신세계 인재개발원에서 인문학 경연을 벌여서 인다. 참가자 대상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평가해 20명을 최종 선발한다. 이들에게는 인문학 중심지 탐방 혜택이 지원되고, 신세계 입사 지원 시에 가산점이 주어지고, 장학급이 지급된다. 그런 혜택을 고려한다면, 경연이라는 방식은 정당하다. 하지만 선발 기준이 신언서판이라는 것이 불편하다. 이래서는 소크라테스도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몇 가지 아쉬운 측면이나 또는 애매한 측면을 지적했지만, 그럼에도 이 기획 자체는 의미가 있다. 신세계그룹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인문학 청년 영웅들이 “인간과 삶에 대한 통찰력을 바탕으로 인문학 소양을 전파하는 미래의 예비 리더가 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지원할 것”이라고 한다. 좋은 취지에 동의하며, 외려 더욱 확장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특히 전통적인 인문학 개념에 부합하는 연구자들에 대한 배려를 키워주면 더욱 좋을 것 같다. 대학원에서 어렵게 연구하는 인문학도들을 배려하고, 그들의 연구결과를 대중적으로 공유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면 어떻겠는가? 그렇게 한다면 한국을 인문강국으로 키워가는 데에 그 이름을 새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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