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박경찬 문화 칼럼니스트】가족 간의 소통, 분단의 아픔, 정치적 이념의 갈등, 장애자들에 대한 복지, 얼핏 들으면 무겁고 어려운 시대적 사건을 배경으로 것 같지만 사실 이 모든 문제가 인생사에 고스라니 녹아져 있는 인물이 있다. 바로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이다. 이들은 일제강점기를 살았고 6·25를 경험했으며 정치적 이념(理念) 속에서 민주화를 외쳤다. 그리고 급변화된 자본주의에서 노년을 살고 있다. 이처럼 근현대사를 다 경험했지만 누구도 그들의 말과 인생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가족조차 말이다. 이것이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들려주려 했던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면 연극 ‘나와 할아버지’를 보자.
작가 지망생 ‘준희’는 멋진 멜로드라마를 쓰고 싶어 한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전쟁통에 헤어진 연인을 같이 찾아 나서자고 손자에게 부탁한다. 이렇게 특별한 여행길에 오른다. 이 둘의 동행을 말리던 할머니. 여기까지 보면 그냥 노년의 로맨스처럼 느껴진다. 허나 공연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다른 곳을 향해서 달려가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 당시 본인을 숨겨준 은인을 찾으러 떠난 것이다. 이 둘이 여행을 떠난 사이 할머니는 병세는 나빠진다. 아픈 아내를 두고서 은인을 찾아 떠난 여행.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죽음을 직면하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버킷리스트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곁에 소중한 아내는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할아버지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다리 한쪽을 잃었다. 그리고 먹고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았다. 사회는 할아버지에게 친절하지 않았다. 가족조차도 할아버지가 어디가 얼마나 불편한지 알 수 없었다. 비로소 여행을 통해 할아버지의 아픔과 고통을 직면했다. 긴 말은 필요가 없었다. 가족이기 때문에…….
동사무소에서 치열하게 은인의 주소를 받아 찾아가보지만 그곳에는 정신이 온전치 못한 노파의 알 수 없는 중얼거림만 있다. 허탕을 치고 들리게 된 백반 집에서 할머니의 별세(別世) 소식을 듣게 된다.
한 동안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할아버지. 수많은 감정들이 교차되기 전 백반집 아주머니는 나가서 피우라고 재촉한다. 이것이 세상살이인 듯 할아버지는 같이 계신 손님들에게 죄송하다는 이야기를 하고 나가서 담배를 피운다. ‘나와 할아버지’는 포장이나 가식 없이 인간적은 인물을 표현했다. 그래서 더 가슴으로 다가온다.
첫 장면부터 심심치 않게 나오는 내비게이션은 또 하나의 메시지를 던진다. 운전에 익숙지 않은 ‘준희’는 항상 내비게이션의 지시대로 운전을 한다. 하지만 여행길에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는 길로 가라고 ‘준희’에게 다그친다. 자신의 길을 개척하며 살아온 할아버지의 인생과 ‘준희’의 인생의 길은 뭔가 상반된 점이 보인다.
극에서도 보여주듯이 말과 글의 미학. 배우들의 진정성 있는 연기는 작가이자 연출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표현하는데 부족함이 없다. 실제 대화를 하는 듯 신선한 ‘글’이란 단순히 문자로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배우와 작가 그리고 연출가의 앙상블 작업이다. 연극 ‘나와 할아버지’는 좋은 호흡의 훌륭한 앙상블을 볼 수 있다.
무대는 단순하다. 하나의 세트가 자동차, 병원, 모텔, 식당 등으로 변신한다. 조금은 밋밋해 보일 수 있으나 허전함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빈 도화지에 다양한 색깔을 배우들의 연기가 채운다.
연극 ‘나와 할아버지’는 극단 ‘공연배달서비스 간다’의 대표 민준호 연출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극으로 풀어내고 있다. 극에서도 ‘준희’의 또 다른 자아인 ‘작가’가 자신의 수필을 읽어주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주인공인 ‘준희’가 ‘작가’이자 이 연극의 진짜 작가인 셈이다.
근현대사를 고스라니 주름 안에 담고 있는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 우리는 아직 그분들에게 들을 이야기가 남은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