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원석 칼럼니스트
· 연세대학교 신학 전공
· 중앙대학교 문화이론 박사과정 중
· 저서 <거대한 사기극>
  <인문학으로 자기계발서 읽기>
  <공부란 무엇인가>

【투데이신문 이원석 칼럼니스트】지난 일주일 동안 대한민국의 국민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진도군 조도면 인근의 황해 상에서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은 우리의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대참사이다.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엉망이라고밖에 할 말이 없다. 이 재난의 발생에 엄청나게 많은 연쇄사슬이 작동하였는데, 어느 하나 빠짐없이 제 몫을 해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 사회의 위기를 근본적으로 보여주는 인재(人災) 그 자체이다. 세월호 침몰은 나라 전체가 엉망으로 굴러가고 있다는 사실을 명약관화하게 드러내주고 있다.

이미 수많은 글들이 세월호 침몰에 대해 다루고 있다. 너무 많은 정보가 폭발적으로 쏟아져나온다. 하지만 동시에 신뢰도의 검증에 극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애초에 우리는 정부의 정보 공개와 언론의 취재 발표를 신뢰하지 못하고 있다. 그 엄청난 여백 속에서 음모론이 태동하고 있는데, 정부는 이에 대해 제동을 걸기 전에 첫날의 생존자 발표부터 어이없게 잘못된 것이나 이후로도 계속 인원 발표가 오락가락한 것부터 수습해야 할 것이다. 여러 상황에 대한 해명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 카카오톡 압수 수사를 하는 것은 의혹만 가중시킬 뿐이다.

세월호의 선장과 한국의 엘리트

여기에서는 그러한 팩트 논란에 가담하지 않겠다. 외려 그보다는 우리 사회를 압축적으로 담아내는 알레고리로 세월호 침몰 사건을 다루고자 한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세월호는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모형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알다시피 선장과 선원들은 승객들로 객실을 벗어나지 말라고 안내했다. 그래놓고 정작 그들은 탈출했다. 수량이 충분한 구명보트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놔두고 말이다. 결과적으로 배를 벗어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이 있었건만 단원고교 학생들 대부분이 객실 안에서 얌전히 머무르다 참변을 당했다.

이렇게 승객을 방치시킨 채 선장이 일착으로 구명보트를 탄 것은 현행 법률상 위법사유에 해당하는 범죄행위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이것이 현재 사회 기득권층의 행태를 보여주는 상징으로 읽힌다. 잘 알려진 것처럼 한국의 엘리트를 지배하는 태도는 ‘우리만 살면 된다’라고 하는 극도의 이기주의이다. 기형적 근대화를 거쳐 형성된 한국 사회 특유의 천민자본주의 속에서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자리를 잡을 수가 없었을 게다. 권리는 마음껏 향유하되 책임은 질 생각이 없는 것이다. 과잉독해가 아니냐고 물을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다.

세월호 침몰 당시 승객 구호 조치를 제대로 취하지 않고 탈출한 선박직 승무원들의 모습에서 필자는 예전의 사건들을 연상했다. 이미 많은 분들이 지적하였듯이 2003년 2월의 대구 지하철 1호선 중앙로역에서의 방화 사건 당시와 같은 유사한 재해들부터 그러하다. 당시에도 최성열 기관사는 마스터키를 가지고 혼자 도망쳤다. 결과적으로 남은 승객들을 기다린 결과는 192명의 사망과 21명의 실종에 더해 151명의 부상이었다. 자신의 신병을 비관하여 방화를 저지른 김대한 씨보다 오히려 혼자 탈출한 최성열 씨가 더 큰 책임을 져야 마땅한 참극이었다.

1995년 6월의 삼풍백화점 붕괴도 근본적으로 비슷하다. 붕괴 위험을 알고서도 세일을 강행한 결과 501명의 사망과 실종 6명에 부상자 937명의 대참사가 발생했다. 문제가 되는 29일 당일 오전부터 위험 신호가 속출했건만, 영업중지를 하지 않았다. 어이가 없는 것은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 속에서 5시 40분에 경영진들이 먼저 백화점을 빠져나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에도 백화점 측은 안내방송을 통해 고객들의 탈출을 막았다. 결국 5시 57분에 건물 전체가 붕괴되기 시작했다. 지금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한국의 민중과 엘리트

하지만 정작 내가 말하려는 대상은 외려 2011년 당시의 부산 저축은행 비리 사건과 같은 것이다. 그때에도 상황은 비슷하다. 고객들을 안심시키고서 정작 자기들은 지인들과 더불어 예금을 미리 인출했다. 역시 자기들만 살면 되는 것이다. 이게 우연으로 보이시는가? 이러한 상황들은 이승만 정권 때부터 빈번하게 반복되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내가 정말 두려워하는 것은 외려 앞으로의 상황이다. 가령 고리 원전 1호기에 문제가 발생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소위 원전 마피아가 틀어쥐고 있는 현재 상황은 불안하기 이를 데가 없다.

후쿠시마에서 원전사고가 발생할 때에 발전소장이 정부에 긴급사태 선언을 요청했지만, 장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후쿠시마 거주민들에게 “황급히 피난하지 말고 자택이나 거처하는 곳에서 대기해주십시오.”라고 안내했다. 마침내 주민피난 결정이 내려지기까지는 발전소장의 요청 이후로 무려 5시간이 지난 후였다. 총리의 긴급사태 선언 이후로도 2시간 50분이 지나고 나서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핵발전소 인근 지역의 주민들은 안 맞아도 될 방사능에 노출되고 말았다. 그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자료가 공개되어 있으니 달리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것은 남의 나라 이야기로 한정할 수 없다. 만일 한국 원전에 사고가 난다면, 한국의 지배계층은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지난 반세기 동안의 상황을 돌이켜본다면 핵심 정보를 독점하고, 우선 자기들만 보신할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러나 나의 추정에 대체로 공감할 게다. 따져보면, 세월호의 선장과 선원들은 지배계층의 삶의 방식을 따라한 것에 불과하다. 구조되고 나서 젖은 돈을 말리는 그들의 모습 속에서 희생자들에 대한 애도를 찾기는 어렵다. 그저 살아남은 자의 안도만 느껴질 뿐이다. 이게 바로 한국의 지배층의 모습이 아닌가?

세대간 투쟁의 선내 재현

더욱이 이번에 살아남은 승객들은 무엇보다도 60대 노인들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피해자들, 즉 300여 명에 달하는 사망자와 실종자들은 거의가 청소년들이다. 그 위험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낌새를 느낀 상태에서 일반 승객들은 알아서 활로를 모색했다. 하지만 단원고 재학생들은 그저 안내 방송을 따라 실내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건 그야말로 세대 갈등 혹은 착취의 재현이 아닌가 생각한다. 청소년의 형편은 알 바 없고, 그저 자기들의 생존만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한국 사회의 세대 관계를 그대로 확인하게 된다.

더욱이 구조된 학생들은 대개 방송 지시에 따르지 않고 객실 밖으로 나와 있던 학생들이라고 한다. 착하고 순진한 학생들은 거의가 희생되었다. 외려 자기 생각대로 움직인 청소년들만 살길을 찾아낸 것이다. 이건 그야말로 우리가 지배층과 전문가, 즉 엘리트의 선전에 속지 않아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무서운 암시로 읽힌다. 지난 정권 때에 4대강 문제에 대해 그러했듯이 지금도 전문가들이 입바른 소리를 하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이제 우리가 살려면, 권력층을 믿어선 안 될 뿐더러 전문가들의 말도 함부로 받아들여서 안 된다.

현 정권의 말대로 따라야 한다면, 빚내서 아파트를 사야한다. 이는 물론 하우스 푸어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런 상황의 연장선상에 놓인 것은 모두가 모두에 대해 늑대가 되는 참혹한 그림이다. 하지만 현실은 가진 것 없는 이들이 가장 선량하고 가장 희생적인 상황이다. 가령 선박직 승무원들이 세월호에서 제일 먼저 도망친 엿 같은 상황에서 마지막까지 남아 승객들을 돌보았던 유일한 승무원인 박지영 씨는 세월호 침몰사고의 첫 사망자로 확인되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그녀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젊은 여성이라는 점이다.

선실 속 승객은 바로 우리다

이러한 대형 참화 앞에서 우리의 현실을 읽어야 한다. 이번 사건을 둘러싼 수많은 요인들 가운데 어느 하나만이라도 바로 잡을 수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과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총체적으로 엉망인 상황이 지금의 참극을 빚은 것이다. 이야말로 우리가 살아가는 한국 사회의 모습이 아닐까? 아니, 더 나아가 말하자면 300여 명의 실종자와 사망자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그렇다. 어쩌면 우리는 점차로 침몰하고 있는 대한민국호의 승객들일 지도 모른다. 안내방송을 믿고 세이렌의 노래 소리에 마냥 도취되어서는 안 된다. 이제 선실을 나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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