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이 없어서 세상이 얼마나 우울한지. 보고 싶을 거야. 잘 가”

“대한의 우리 아들, 딸들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잠드소서. 어른으로서 너무 미안해”

“사랑하는 내 딸, 아들. 이 엄마는 너를 가슴에 넣고 하늘나라 갈 때까지 기억하마. 안산 엄마가”

“OO아 잘 잤어? 친구들 만나 얘기하느라 못 잤으려나? 늘 그랬듯 밝고 힘차게 지내야 해. 엄마가”

-시민들이 안산 임시분향소에 남긴 쪽지 中에서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국화에 둘러싸여 있다. 새하얀 국화를 닮은 해맑은 아이들. 영정 사진 속에서 금방이라도 뚜벅뚜벅 걸어 나올 것만 같다. 18살, 꽃다운 나이의 아이들은 차가운 바다 아래에서 떨다가 하늘 위로 갔다.

23일 오전 9시. 안산 올림픽기념관 실내체육관에 마련된 세월호 침몰 희생자 임시분향소는 어둡고 깊은 슬픔에 잠겼다. 단원고등학교 교사와 학생 25명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많은 시민들이 분향소를 찾았다. 순수한 아이들의 모습을 닮은 흰 국화를 바치며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임시분향소 안에는 구슬픈 음악과 울음소리만이 가득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사진 속 아이들은 대답이 없었다. 학생증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바뀐 현실 앞에 사람들은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고통없는 곳에서 아프지 않고 행복하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할 뿐이었다.

단원고 교사로 보이는 한 여성은 영정사진 앞에서 얼굴을 묻은 채 통곡했다. 그녀는 오랜 시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계속 절을 하기도 했고, 누군가는 조용히 묵념하기도, 기도를 드리기도 했다. 아무도 말하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감정이리라. 단원고등학교 학생들은 믿고 싶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연신 눈물을 흘렸다. 차마 발걸음을 돌리지 못하고 서 있는 조문객들의 진한 애통함이 기자의 카메라에 오롯이 전해졌다.

조문을 마친 김정순(76)할머니는 “현재 단원고 근처에서 거주하고 있어서 평소에 학생들을 자주 봤다”며 “20살 되기 전에 너무 일찍 갔다. 부모보다 먼저 가면 어떡하냐”고 말하며 끝내 울음을 터트렸다. 안산 시민인 최용수(70)할머니는 “가슴이 찢어지고 TV보면서 많이 울었다”며 “새끼(자식)있는 사람들은 마음이 다 아픈 거다”고 전했다.

시흥주민 김선영(31)씨는 “안산지역을 비롯해 시흥지역 역시 번화가에 사람이 없는 등 지역분위기가 애통하다”며 “처음에 전원 구조됐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렇게 큰 참사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대한민국이 패닉상태인데 어서 극복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임시분향소 입구 한 켠에는 조문객이 남긴 추모 쪽지가 가득했다. “단원고 학생과 교사분들. 천국에 가서 하고자 하는 꿈 이루고 행복하세요”, “부디 좋은 곳 가세요. OO이 언니, 16년 동안 즐거웠어. 사랑해. 동생OO”, “미안하구나. 정말 미안하구나. 지켜주지 못해서” 등 많은 이들이 추모 쪽지가 수놓여 있었다.

이른 오전임에도 임시분향소 앞은 사람들이 몰려 긴 줄이 만들어졌다. 대기 시간이 길어져 고령자들은 몸을 가누지 못했다. 그러자 대책위 한 관계자가 와서 의자를 가져다줬다. 어떤 할머니는 휠체어를 타고 기다리기도 했다.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온 부모의 모습도 보였다.

안산 게이트볼 연합회 회원 35명이 단체로 방문하기도 했다. 안산게이트볼연합회 회원인 백노자(65)할머니는 “심정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희생자 가족들의 마음은 오죽 하겠냐”며 “앞으로 이런 사고가 다시는 없어야 한다”고 전했다.

한 곳에 침울한 표정으로 친구들을 기다리는 단원고 학생들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다가가 심정을 물었다. 사춘기 소년 소녀들은 아무 말도 없었다. 한 아이가 침통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믿기지 않고 슬퍼요”. 기자는 더 이상 물을 수 없어 소녀의 어깨를 두드린 후 발걸음을 옮겼다.

대한적십자사 군포 지구협의회 임옥영(57)회장은 “내게도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있어 마음이 더 아프다. (희생자) 부모들은 살아도 살았다고 하지 못할 것 같다”며 “세월호 침몰 사고와 같은 사고가 다신 안 일어났으면 좋겠다. 앞으로 이런 봉사활동은 안 하고 싶다”고 전했다. 

   
 

분향소 바깥에서는 딸아이(단원고 학생)를 잃은 아버지가 기자를 향해 “시골에 계신 80세 노모는 손녀가 이렇게(희생)된 것을 모른다. 마을 이장한테 연락해 어머니께는 이야기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노쇠한 어머니가 충격으로 돌아가실 것 같아 말을 못 하겠다”며 “나에게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말했다. 기자가 식사를 가져와 한 숟갈을 권하니 “밥이 모래알같다. 밥 먹으면 딸이 ‘아빠는 밥이 넘어가냐’고 말할 것 같다”며 울부짖었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D일보 여기자를 붙잡고 자신의 가슴을 거칠게 치며 통곡했다. “우리 딸이랑 무척 닮았어”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아버지와 여기자는 한참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영화 ‘방황하는 칼날’에서 딸을 잃은 아버지(정재영)가 이런 대사를 한다. “자식을 잃은 부모에게 남은 인생은 없다”라고. 현실은 영화보다 훨씬 더 슬프고 아프고 잔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를 ‘고아’라고 한다. 하지만 자식을 잃은 부모를 뜻하는 단어는 없다. 자식을 먼저 떠나 보낸 부모의 마음을 단어로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란다.

시민들의 뜨거운 발걸음은 늦은 오후까지 계속됐다. 많은 이들이 표현할 수 없는 슬픔에 빠진 희생자 가족의 아픔을 함께 하며 희생자들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기자가 임시분향소에서 바라본 시민들은 세월호 희생자들의 부모요, 손주요, 친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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