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욱 칼럼니스트
▸고려대 한문학과 강사
▸저서 <삼국지인물전>, <역사, 어제이면서 오늘이다> 외 4권

【투데이신문 김재욱 칼럼니스트】동국대학교 한문학과에 재직하시다 은퇴하신 배상현 선생님, 대학시절 나의 은사님이다. 81세의 고령이신데도 식사하실 때와 주무실 때, 운동하실 때를 제외하면 손에서 책이 떠나는 시간이 없다. 예전 <한겨레신문>에서 ‘한국의 독서광을 찾아서’ 라는 제목으로 기획 연재를 했었는데 바로 이 독서광에 선정 되신 분이다. 가구점에서 막일을 하면서 학비를 벌어 대학을 졸업했고, 이후 교사가 되셨다. 계속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가난해서 상급과정으로 진학을 못하셨다고 한다. 그나마 혼자면 괜찮은데 동생들까지 모두 당신이 돈을 벌어서 대학교까지 졸업시킨 후에 석사와 박사과정을 마치셨다고 한다. 물론 공부만 하면 먹고 살 수가 없으니까 밤에는 학생들을 가르쳤고, 낮에 공부를 하셨다.

“그 때 아이들 가르치면서 박사학위 논문을 쓰다가 당뇨가 왔어. 몸에 무리가 온 거지.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아이들을 가르쳤어. 논문 때문에 일을 소홀히 한다는 말을 듣지 않기 위해서였고, 아이들 가르치는 건 내 일이잖아. 아픈 것도 말하지 않았네.”

선생님을 뵙고 나 살기 힘든 걸 이야기하려다가 말도 꺼내지 못했다. 화제를 슬쩍 돌렸다.

“선생님, 저번에 위암 수술 받으셨잖아요. 지금은 어떠세요?”
“괜찮네. 조심하면서 살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잖아?”
“위암 판정 받았을 때 놀라거나 화나지 않으셨어요?”
“내가 조심하지 못해서 생긴 병인데 놀랄 거 없지. 화나고 그러지도 않았네.”
“하하, 저 같으면 ‘왜 나한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이걸 어떻게 이겨내지?’ 하면서 절망하고 화를 냈을 겁니다. 아마.”
“이 사람아, 내가 죽으면 그 암도 죽는다고 생각해야 해. 그 암도 살려고 생긴 것이잖아. 그러니 죽으면 얼마나 불쌍한가.”
“네? 이해가 안 되는데요? 암 때문에 내가 죽게 생겼는데 어떻게 그걸 불쌍해합니까?”
“내 말 들어보게. 내가 암을 미워한다고 해서 그게 나를 떠나는 건 아니지 않는가. ‘그래, 너도 살려고 내 몸 속에 들어왔구나. 나와 같이 살아보자’ 라고 해야 하는 걸세. 암을 친구로 생각해야 나을 수도 있는 거야.”

선생님의 이야기는 듣는 이에게 깊은 감명을 준다. 삶의 역정, 겸손함 등은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더욱 존경스러운 점은 시련에 대처하는 선생님의 마음가짐이다. 시련은 이겨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라도 만날 수 있는 친구와도 같다는 사실을 담담히 이야기하신 것이다. 크건 작건 시련을 겪지 않고 사는 사람은 세상에 한 명도 없다. 괴롭겠지만, 시련이 찾아오면 선생님처럼 그저󰡒왔구나.󰡓해야 하겠다. 담담히 받아들이며 그와 함께 살면서 이겨낼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겠다.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니 『맹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사람들에게는 ‘고행장(苦行章)’ 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맹자는 말한다. “세상에 이름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어려운 일을 겪은 이후에 등용됐다. 그러므로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일을 맡기려 할 땐, 먼저 그의 마음과 뜻을 괴롭게 하고, 근육과 뼈를 수고롭게 하며, 몸을 굶주리게 하고, 궁핍하게 해서 그 사람이 무엇을 할 때마다 방해를 하고 어지럽힌다. 이유는 그 사람의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해서 예전에 하지 못했던 일을 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해서다. 사람은 늘 잘못을 저지른 뒤에 고치게 마련이다. 곤란해 하는 마음이 있고, 걱정스런 생각이 있어야 분발한다. 무엇이든 얼굴빛에 드러나고, 소리를 들은 뒤에야 깨닫는다. 안으로 법을 지키는 신하와 도와주는 신하가 없고, 밖으로 적대국과 환란 거리가 없는 나라는 반드시 망한다. 이렇게 보면 사람은 우환 속에서 살고, 안락 속에서 죽는 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맹자(孟子)』, 「고자(告子) 하」

우리나라의 선비들은 자신에게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이 문장을 외우면서 에너지를 얻으며 자신을 지탱했다. 사람은 ‘여한이 없을 때’죽는다고 한다. 뭐라도 걱정거리가 있어야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신경을 기울이고 몸을 쓰면서 사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이 나를 넘어 주변으로 확대되면 사회적인 우환 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게 된다. 우리나라를 지탱해 준 선비정신 속에는 이와 같은 ‘우환의식’이 깊숙이 자리해 있다.

하루하루 먹고 살기 힘들어서 괴롭고, 그 와중에 보기 싫은 사람도 봐야 해서 또 괴로우며,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서 괴롭고, 내 꿈과 다른 일을 해야 해서 괴롭다. 이렇게 살다가 어느 순간 죽는다고 생각하니 더 괴롭다. 이 모든 게 우리가 겪고 있는 일상 속의 시련들이다. 우리가 몰랐을 뿐 시련은 이미 내 옆에 친구로 있어 온지 오래였다. 친구 없이는 세상을 살 수 없다.

<‘평(評) 천하’라는 꽤 거창한 타이틀을 달고 칼럼 연재를 시작하게 됐다. 투데이신문 편집국에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위에 쓴 글처럼 개인의 일에서부터 세상의 일에 이르기까지 생각이 가는 대로 편하게 쓴 글로 독자 여러분과 만나면서 ‘세상일을 이야기’하려 한다. 많은 관심과 격려, 따끔한 질책을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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