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격인터뷰] 김지훈 일병의 아버지, 김경준 씨

   
▲ 사건 설명 중인 故 김지훈 일병 아버지 김경준 씨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김지훈 일병의 부모는 작년 7월 1일 새벽에 공군으로부터 청천벽력 같은 전화를 받았다. 자신의 아들이 새벽 4시경 경기도 성남비행장 부대 내에서 목숨을 끊었다는 전화였다. 그날 오전에 면회를 갔을 때만 해도 아들과 웃으며 점심을 먹었기에 믿을 수 없었다.

명문대를 다녔던 수재이며 평소 밝고 씩씩했던 김지훈 일병. 그는 입대 후, 급격한 스트레스로 인해 정신적인 공황상태가 와서 사망한 날로부터 3일 후 국군 수도병원 신경정신과의 예약을 앞두고 있었다.

김 일병 사망사건이 발생한 지 약 5개월 후인 올해 1월, 공군본부는 김 일병을 순직이 아닌 ‘일반 사망’이라고 결론 내린다. 공군의 발표를 납득할 수 없었고 아들의 자살 이유를 몰랐던 유가족은 4월 9일,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그리고 동료들의 진술서를 비롯한 헌병대 수사보고서 등을 통해 아들의 죽음에 감춰진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된다.

김 일병이 사망한 당일을 거슬러 가보면, 박근혜 대통령 의전업무 전 A중위는 김 일병에게 D단장의 정복에 단추를 달라고 한다. 하지만 김 일병이 단추를 다는 일에 서툴자 A중위가 직접 단추를 달게 된다. 그러던 중 A중위는 박 대통령이 예정보다 일찍 도착한다는 연락을 제대로 받지 못해 D단장에게 보고를 늦게 했다. 이 때문에 D단장은 지각을 하고 A중위는 이 책임을 김 일병에게 물으며 질책했다. 그리고 또 다른 거짓말을 한다는 이유로 완전군장을 씌운 후 연병장을 돌게 했다.

유가족은 각종 진술서 등을 토대로 A중위가 김 일병에게 지속적으로 가혹행위를 해왔으며, 결국 이날의 충격으로 자살을 결심했다고 주장했다. 

아버지 김 씨는 “아들(김 일병)이 가해자 A중위의 가혹행위에 의해 세상을 떠났고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D단장은 이 사건을 방관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가해자 처벌과 방관자 징계를 위한 재수사와 재조사를 공군본부에 요청했다. 현재 공군본부는 이번 사건과 관련, 재수사에 들어간 상황이다.

다음은 김지훈 일병의 아버지 김경준 씨와의 일문일답.

Q. 요즘 어떻게 지내고 있나
(아들을 잃고) 힘든 시간을 보낸 후부터 사실 잠을 거의 못 잤다. 자료를 정리하고 하루하루 무엇을 해야 할지 생각하다 보면 피곤한 줄을 모르겠다. 시간이 지나면서 요즘 내가 굉장히 객관화되고 있다는 걸 느낀다. 어제는 기자들을 만났다.

Q. 김지훈 일병, 어떤 아들이었나
죽은 아들 칭찬해서 뭐하겠나. 의미는 없겠지만 지훈이는 완벽한 아이였고 친구 같았다. 입대 전에 일본 여행을 다녀오기도 했다. 나는 아들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Q. 평소 아들과의 관계는 어땠는지
나는 우리 지훈(아들)이랑 친구처럼 지낸 사이다. 때론 내가 어떤 부분에서 물어볼 때도 있었고. 어제는 (이번 사건 관련 내용을 정리하다가) 혼잣말로 아들에게 잘 쓴 것 같지 않냐고 했는데 어디선가 “아버지 잘 하고 있네”라는 소리가 들렸다. 순간 ‘지훈이가 돌아왔나’하고 생각했다. (울먹이며) 아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자꾸 잊어버린다. 비교적 객관화돼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제가 안 될 때가 있다.

Q. 면회갔을 때 김 일병은 어때 보였나
본부에 가고 나서는 아들의 얼굴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집에서 5분 거리이기 때문에 나와 아내는 면회를 일주일에 한 번 꼴로 갔다. 어느 날은 아들이 아내에게 “부관이 날 괴롭혀서 억울하다”고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지만 얼굴이 힘들어보였다. 또 “하루 정도 나와서 쉬고 싶다”는 이야기도 한 적이 있다. 아침 6시에 출근해서 8시에 근무가 끝나는데 생활관에 들어오면 자느라 바쁘다. 다른 사람들은 ‘꽃보직’이라고 하지만 사실 힘들고 스트레스 받는단다. 그 와중에 보살펴주지는 못할망정 초임된 아이를 (A중위가) 갈궈댄 것이다. 내 느낌에는 지금도 생생하다. 가끔 멍하기도 했고 늘 주변을 신경 썼다. 내가 목소리를 키우면 “아버지 목소리 낮추세요”라고 했다. 그리고 주눅이 들어 있더라. 부관이 자기를 힘들게 한다고 했을 때도 나는 “조금만 잘 견뎌봐라”고 했다. 자살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Q. 아들 사망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많이 갖고 계시던데
매일 일지를 정리한다. 누구하고 다툼이 있어도 일지를 증거로 쓸 수 있기 때문이다. 날짜별로 다 정리했다. 가해자를 비롯한 여러 증인들의 진술서를 수천 번 보니 머리 속으로 그림이 그려졌고 정리가 됐다. 조사관도 내 얘기를 들으니 도움이 된다고 했다. 그런데 재조사는 6개월 후인 내년 초부터 한다고 하더라. 현재 국방부에 사람이 없고 조사관들이 기존에 맡은 일이 4-5개 있기 때문이다. 아들 사건은 마지막에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의 의협심이 생기는 건 사건 초기가 아닌가. 시간이 흐르면 증인도 사라지고 (사람들은) 이를 피하고 싶어진다. 나는 그게 걱정된다. 이미 형사처벌에 관해서는 재수사가 시작됐는데 재조사(순직 재심, 내부 징계 등)가 아직 안 되고 있는 것이 답답하다.

Q. 공군본부는 김 일병의 자살 원인이 '가혹행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가혹행위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육체적, 정신적, 인격적인 모독을 하는 것을 말한다. 지난해 6월 22일, A중위는 자신이 잘못해놓고 완전군장을 씌운 것, 쉽게 말해 공군 15비행단에서 완전군장으로 기합준 건 아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한다. 공군은 시스템이 다르다. 공군은 행정병이고 보조의 역할이다. 전투병사가 아니기에 완전군장은 있을 수 없다. '사랑의 벌'이라는 제도가 있긴 하지만 자기 위가 아닌 장교가 벌을 주는 건 불법이다. 그것도 휴일에 말이다. 이처럼 A중위는 수도 없이 불법을 저질렀다. (각종 진술서를 보면) 폭언과 폭행을 안 했다고 하지만 언어적인 폭력을 수도 없이 했다. 아들이 신경정신과 예약이 돼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A중위는 강요죄, 모욕죄에 따라 가중처벌을 받아야 한다. 한 운전병이 내게 말하기를 아들이 처음에는 밝고 똑똑했지만 며칠이 지나자 바보가 됐다고 하더라. 초임병이 무슨 힘이 있냐. 장교(A중위)가 앉혀놓고 그러면 공포스러운 것이다. 상상을 해보라.

Q. 아들이 사망한 이유를 늦게 파악했던데
추정하기로는 공군본부에서 아들이 순직이 됐으면 왜, 어떻게 죽었는지 내가 죽을 때까지 진실을 몰랐을 것이다. 수사 초기에 정보를 얻은 게 없으니까. 반드시 그때 얻어야 하는데 10여개월 후에 얻은 것이다. 나한테 그 끔찍한 일이 생길 수도 있었다.

Q. 아들이 사망한 후, 당시 장례식장에 D단장이 왔었다던데
아들 장례식에 D단장이 찾아왔다. 나와 아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책임을 지겠다, 순직 처리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울면서 이야기했다. 그 모습을 거기 있는 사람들이 봤다. 당시에는 그 말을 굳게 믿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Q. 현재 요구하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가
처음에는 지훈이의 명예회복은 필요없고 가해자의 처벌이 중요하다고 강력하게 얘기했었다. 그런데 ‘내가 정말 뭘 원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A중위하고 D단장을 용서하고 싶더라. 하지만 그들이 처벌받기 전에는 용서를 해줄 수가 없다. 죄를 지은 친구가 죄를 인정하고 처벌받거나 잘못을 자백한 후 모든 사람들 앞에 서야 그들 또한 당당하지 않겠나. 우리 가족 역시도 그들을 보고 ‘우리가 너희를 용서하마. 지훈이 앞에서 너희들이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 아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Q. 덧붙이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이번 일이 잘 해결돼서 좋은 선례를 만들어주고 싶다. 이미 아들의 명예회복은 끝났다. 무슨 의미가 있겠냐. 아들은 돌아오지 않는데. 국립묘지 묻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의미가 없다. 최소한의 인간에 대한 예의는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는 것이 군 조직이라는 생각이 든다. 벽을 앞에 둔 느낌이다. 군에서 이런 사건을 대하는 수준이 변하지 않는다면 이런 일은 반드시 일어나고 불행은 계속될 것이다. 사실 아들의 문제는 한 개인의 억울한 죽음을 달래는 게 아니다.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은 사회 정의의 문제다. 사실 자체를 감추는 부분에 대해 반드시 사회 정의차원에서 벌을 내려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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