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무성 칼럼니스트
▸경북 구미경찰서 경위
▸<학교폭력의 비밀을 말하다> 저자

【투데이신문 최무성 칼럼니스트】학교는 밖에서 보면 조용하고 평화롭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그렇게 낭만적인 곳만은 아니다.

친구 간에 말다툼이나 주먹다짐 같은 달갑지 않은 일들이 툭하면 벌어지곤 한다. 때로는 몇몇이서 무리를 지어 한 친구를 왕따시키기도 한다.

하지만 어른들은 이를 보고도 좀처럼 나서거나 끼어들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싸움도 해보고 따돌림도 당해 봐야 서로의 심정을 헤아리게 되는 법이라고 여기는 탓이다.

예부터 어른들은 아이들의 싸움이나 갈등에 끼어들기보다는 스스로 알아서 해결해 나가길 원했다. 성장통을 제대로 겪어 봐야 성숙한 어른이 된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도 어지간해서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에게 ‘자기들끼리 벌어진 일’을 하소연하거나 쉽게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시시콜콜한 것들을 일러바쳤다간 ‘고자질 잘하고 이간질 잘하는 아이’로 낙인찍혀 되레 따돌림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싸우며 맞고 컸다고 하지만 이젠 그런 말도 옛말이다. 옛사람들은 물질적으로 빈곤했지만 정신적으론 매우 강했다. 그래서 시시한 일로 비관하거나 극단적인 죽음을 선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즘은 많이 변했다. 조그마한 시달림이나 폭력에도 쉽게 좌절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부모들도 자신의 아이들이 맞고 들어온다거나 따돌림을 당했다는 말을 들으면 가만있지 않는다. 관용도, 용서도 없다. 바로 경찰서에 신고하거나 법적인 조치를 취한다. 학교를 찾아가 학교장이나 담임교사를 상대로 강력한 질책과 항의를 한다. “아이들 문제 갖고 뭘 그렇게 심각하게 나오세요?”라고 했다가는 욕을 들어가며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요즘은 아이라고 해봐야 한집안에 한둘뿐이다. 모두 소중하고 귀한 아이들이다. 이렇게 귀한 아이들이니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이런 상황인데도 왜 학교 폭력 문제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확산되고 있는 것일까? 한 사례를 통해서 그 배경을 살펴보자.

학교 폭력으로부터 가장 큰 상처와 피해를 보는 사람은 당연히 피해 학생과 그의 부모이다. 피해 학생은 폭력이나 따돌림, 갈취를 당하면 평생 씻지 못할 상처를 입고 심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정신적인 고통을 당하며 살아간다고 한다. 학교 폭력으로 인한 자괴감과 무력감 때문에 삶을 포기하고 억눌려 살아간다면 그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삶인가.

경북의 OO고등학교 1학년인 김 군(16)은 같은 반 친구들의 폭력과 따돌림으로 4년째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사람들을 피하며 만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하루 종일 방에서 나오지 않고 웅크리고 앉아 있다고 한다.

한 번은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려고 시도한 적도 있어서 가족들은 극도의 긴장감 속에 지내야 했고 급기야 주택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이사 가서도 아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할까 걱정이 되어 가족들은 외출도 마음대로 못했고 몇 년 동안 가족 여행은 꿈도 못 꾸었다. 그동안 정신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기도 했으나 좀처럼 상태가 나아지지 않고 있다.김 군의 부모는 아이가 정신 병원에 입원할 정도가 되자 아이의 장래가 끝났다며 한숨을 그치지 못했다.

장애 아닌 장애 아이를 둔 부모의 심정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누가 이 아이의 남은 인생을 책임져야 할까? 무엇으로 잃어버린 인생을 보상받아야 할까?

한 연구 기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학교 폭력의 피해를 당하고도 피해 학생의 절반 이상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왜 그럴까? 보복이 두려워서일까? 아니면 부모나 선생님께 알려 봐야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서일까? 둘 다 맞을 것이다.

이외에도 여러 이유가 있지만 요즘 아이들이 진심으로 기대고 의지할 데가 없다는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옛말에 ‘미꾸라지 한 마리가 온 개천을 흐려놓는다.’라고 했다. 학교나 학급의 분위기도 여러 학생들에 의해서 흐트러지는 것이 아니라 꼭 한두 명의 불량 학생 때문에 흐려진다. 이 한두 명을 내버려 두면 순식간에 수십 명으로 늘어날 수도 있다.

그렇게 뭉쳐진 아이들이 ‘일진’이 된다. 이들도 처음부터 뜻이 맞아 결성된 것이 아니다. 유유상종, 끼리끼리 논다는 말처럼 호기심에 그리고 재미삼아 일을 저지르다가 자연스레 모여 어울리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방이 중요하다. 호기심이 일을 일으키기 전에 막아야 한다. 호미로 막을 일도 방치하면 두레로도 막지 못한다는 말처럼 처음 학교 폭력의 조짐이 보이는 아이를 발견하면 조기에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권력도 맛을 들이면 빠져나오지 못하듯이 학교 폭력도 자꾸 하다 보면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나중에는 어떤 쾌감을 느끼게 된다. 쾌감을 느낀다는 말은 폭력에 중독되었다는 말이다. 다른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으면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심각한 중독이다.

이제는 학교 폭력도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국의 수많은 학생들이 성적, 학력 지상주의에 매몰된 채 부모의 관심 밖에서 거리를 헤매고 있다.

이들 가출 청소년이 휩쓸려 다니면 또 다른 일진이 형성된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부모의 문제도 심각하다. 그동안 우리는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들의 세계를 너무도 몰랐고 또한 모른 척했다.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변명해 보지만 사실 그것은 무관심이었다.

우리 사회는 지난 수십 년간 경제에만 매달렸고 덕분에 높은 경제 성장을 달성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과연 행복한가? GNP 2만 달러 시대의 대한민국에서 1만 달러 때보다 학교 폭력이 줄어들었는가? 목표가 잘못되었을 때는 열심히 달려 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 잘못된 결과만 커질 뿐이다. 목표가 제대로 설정되었을 때 달리고 싶은 희망이 있고 노력한 보람도 있다. 이제 경제가 아니라 삶을 돌아볼 때가 됐다.

아이를 사랑하는 것은 부모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어떤 부모는 헬리콥터 맘이 되어 늘 아이를 따라다닌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또 어떤 부모는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를 풀어놓지만 아이와 소통할 기회마저 무시해 버린다. 바쁘다는 이유가 있고 독립심을 키운다는 변명도 해보지만 일이 생긴 후에는 아무런 소용도 없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우리 아이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혹시 우리 아이가 학교 폭력의 그늘에서 시름하고 있지는 않은지, 내 아이가 폭력의 당사자는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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