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필자는 ‘위대한 한국인-부제 한민족 부국강병론-박정희시대’편 칼럼을 쓰면서 매우 조심스러웠다. 현직 대통령인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에 대한 평가라는 측면에서 조심스러웠다기보다는 우리사회 팽배한 박정희 시대에 대한 부정적 기류나 비판적 시각이 상당수 차지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자칫 독재를 미화하거나 편중된 역사인식을 가진 분석이라는 비판에 대한 고려 때문이었다. 그 당시 시대를 기록한 방대한 관련 자료를 분석해보고, 그 당시 개발독재의 반대편에 섰던 민주화인사들의 고난의 세월과 활동상을 균형감을 가지고 들여다보았다. 서울상암동 박정희 대통령기념도서관, 동교동 김대중대통령 기념도서관을 각각 방문해 후대가 이들을 어찌 평가하고 있는가를 객관적인 시각에서 들여다보고자 노력했다.<집필자 주>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5.16쿠데타이후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군부는 이른바 혁명공약의 구체적인 실천을 위해 절치부심하게 된다. 그들에게 혁명공약의 실천여부는 곧바로 불법적으로 찬탈한 정치권력에 정통성을 부여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쿠데타 군부는 국민적인 환심을 사기 위해 매우 과격하고도 즉각적인 조치들을 취하게 된다. 쿠데타 닷새 만에 2000여명의 용공분자를 체포하고 당시 일반인들의 원성의 대상이 됐던 이정재 등 정치깡패들을 체포해 거리행진을 시켰으며 사형을 집행하기도 했다. 5.16 아흐레 만에 농촌의 고질적인 병폐였던 ‘고리채’를 정리하는 ‘고리채정리령’을 공포했다. 박정희는 4000년을 지긋지긋하게 이어온 가난을 추방하자고 국민들에게 외쳤다.
쿠데타에 형식적인 가담을 하였던 장도영 중장은 거사 44일 만에 전격 제거됐다.

박정희는 경상북도 산골마을 (선산군 구미면 상모동)에서 태어나 어린시절을 대부분 농촌에서 보낸 사람으로 농촌의 헐벗고 굶주렸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터라 운명같이 생각되는 가난을 타파하자는 그의 주장은 그냥 내뱉는 정치구호가 아닌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던 한국인 모두의 삶에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와야한다는 절규였다. 그만큼 당시 가난의 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할 국가적인 과제였고 온 국민을 질곡에 허덕이게 했다.

당시 얼마나 가난이 온 국민의 삶을 힘들게 했는지 경향신문은 이렇게 보도하고 있다.

‘모든 학교에서 점심을 굶는 아동 수가 50%를 넘고 있다. 길고 긴 하루를 낮에는 학교에서 주는 빵 한 조각으로, 저녁은 물오른 겨릅대 껍질로 때우는 소녀의 얼굴빛은 누렇게 떠 있다. 소녀는 빵 한 조각을 속옷에 밀어 넣고 주위의 눈치를 살피고 있다.(경향신문 1964년 5월 19일자)’

요즘에야 너무 살이 쪄서 살을 빼기 위해 온갖 다이어트제품과 기법이 넘쳐나는 상대적 풍요의 시대에 살고 있지만 그 당시는 배고픔은 온 국민들이 직면한 현실적인 문제요 절체절명의 극복의 대상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에게 어찌 보면 민주주의는 호사였다. 당장 먹고 사는 게 급선무인 상황에서 그깟 민주주의가 무어가 대수라는 것인가라는 생각들이 민초들 마음속에 만연해 있었다. 가난은 혁명의 토양을 제공하고 이 가난을 퇴치하는 것은 곧 혁명의 정당성을 부여받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시각에서 보면 도저히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질 않는 북한의 폭압적인 독재정권이 가능했던 토양도 바로 당시 한반도를 덮고 있던 전국적인 가난이 그 이유 중 하나였다.

김일성이 제시한 “이밥(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이겠다”는 구호는 당시 북한주민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구호였다.

비록 지금의 시각에서 보면 어처구니없고, 수준 낮은 정치구호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가난을 물리치기 위해 박정희 당시 쿠데타 주역들은 장면정부시절 만들어진 경제개발계획을 기초로 해 5개년경제개발계획을 수립, 강력하게 밀어붙였다.

문제는 재원마련이었다. 나라의 곳간이 거의 텅 빈 당시상황에서 220여개 굵직굵직한 국책사업이 내재된 당시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하기 위해선 막대한 자금이 필요로 했다.

혁명군부는 어떻게 이 재원을 마련할 것인지 고민을 거듭했다. 당시 혁명군부가 구상했던 재원조달방법은 화폐개혁을 통한 재원마련, 증권시장에 부당한 개입 즉 작전을 통한 재원마련 등이 거론됐다. 그러나 경제에 대한 지식이나 경험이 있을 턱이 없었던 군인들의 이러한 위험천만하고 순진한 구상은 처절한 실패로 결론이 나고 말았다. 화폐개혁은 단지 ‘환’이 ‘원’으로 바뀐 것 말고는 별 효과를 거두질 못했다. 쿠데타 직후 만들어진 중앙정보부가 주도해 일으킨 것으로 보이는 증권파동 등 당시 4대 의혹 사건은 가뜩이나 정통성 획득을 위해 절치부심하던 혁명군부 세력들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결국 이들은 외자로 재원조달방향을 돌리게 된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국가신인도라는 게 보잘 것이 없었고 국민소득 100달러도 채 되질 않는 세계 최빈국 대열에 있던 대한민국에 돈을 쓰라고 선뜻 외자를 빌려줄 국가나 국제금융기관은 어느 곳에도 없었다.

실제 혁명군부들이 국가재건계획을 총망라한 제 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을 들고 IBRD(국제부흥개발은행)를 찾았지만 상대는 그 많은 사업을 그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에서 동시에 한다는 것이 말도 되질 않는다고 일축했다.

초조해진 박정희는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을 일본으로 보내 한일국교정상회 회담을 비밀리에 진행하도록 지시했다.

당시 국민정서는 해방된지 15년 남짓 흐른 상황으로 일본과는 절대로 화해할 수 없는 불구대천지 원수라는 정서가 워낙 강했던 터라 이러한 한일국교정상화 논의자체가 매우 위험한 공작이라는 것쯤은 혁명군부도 잘 알고 있었지만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혁명군부는 찬밥더운밥을 가질 처지가 되질 못했다. 후일 김종필-오히라 회담으로 알려진 이 한일국교정상화 원칙합의를 통해 한국은 지난 일제 36년간의 일제에 의한 모든 수탈과 강압적인 통치를 5억달러 차관공여로 ‘퉁’치게 된다.

혁명군부는 상처투성이인 국민적 자존심과 일본에 대한 민족적 분노를 5억달러로 교환한 셈이었다.

최근까지 일본정부가 위안부문제에 대해 이미 끝난 사안이라고 발뺌하는 그 근거는 바로 이 한일국교정상회담합의에 기초로 하고 있다. 일본정부는 이미 36년간의 일제통치에 대해 대한민국정부에서 5억달러를 받고 모든 구상권을 포기하기로 한 것이니 추가 사과나 보상은 불가하다는 입장인 것이다.

보는 이의 각도에 따라서 보면 참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불평등협상이요 민족의 원한을 5억달러에 팔아먹은 제2의 이완용과 같은 짓이었다는 극단적인 평가를 하는 이들도 있다. 왜냐하면 일본의 한국에 대한 태도나 역사인식을 보면 자신들은 이미 이 한일국교정상화협상에 의해 과거의 죗값을 다 보상했고 더 이상 사과할 것도 협상할 것도 없다는 그릇된 인식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전기를 마련해준 셈이기 때문이다. 혁명세력들이 단기적인 목표에 집착한 나머지 역사를 바라보는 긴 안목이 결여되었음을 읽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에서는 당시로는 긴박한 경제재건을 위한 재원마련을 할 뾰족한 방도가 없었기에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입장도 있다. 국제기구마저 등을 돌리는 상황에서 그나마 재원을 마련할 길은 역사적 평가는 나중에 받더라도 우선 급한 대로 자금을 끌어다가 국가재건을 위해 사용해야할 필요조건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기에 그 모든 비난에도 불구하고 이를 강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입장이다.

양측이 누가 옳고 그름을 떠나 한일국교협상에서 얻은 이 재원은 경부고속도로와 포항제철건설 등 주요 국가기간시설 투자에 투입됐고 이것이 기화가 돼 드디어 ‘한강의 기적’의 물적 토대가 만들어지게 되는 극적인 계기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사실이 됐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지난해 낸 <한국경제의 성장요인 분석> 보고서에 따르면, 1970년 우리나라 경상가격 GDP는 2.8조원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2011년에는 1237조원을 기록해 무려 446배나 증가했다. 1970년부터 40년 간 연평균 실질성장률은 7.2%였다. 시기별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각각 9.0%와 9.7%을 나타냈다. 세계대전 후 패망했던 독일의 고속성장을 가리키는 ‘라인강의 기적’이 한국에서도 일어나 1970년대부터 한강의 기적을 일구며 승승장구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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