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삼국지인물전>, <역사, 어제이면서 오늘이다> 외 4권

【투데이신문 김재욱 칼럼니스트】임진왜란 초기에 충주 탄금대에서 전사한 인물이 있다. 신립(申砬, 1546-1592)이 그 주인공이다. 신립은 왜군의 전력을 무시했고 무리하게 배수진을 쳤다가 패한 무능한 장수로 알려져 있다. 따지고 보면 이 패배는 조선 정부의 허술한 국방정책에 원인이 있지만, 어쨌든 결과가 좋지 않았으므로 신립은 두고두고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이러다보니 신립을 소재로 한 몇 가지 전설도 생기게 됐다. 그 중 하나가 신립은 ‘귀신’ 때문에 패했다는 이야기다.

신립이 젊었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신립은 산 속에서 사냥을 하다가 길을 잃었다. 날은 저물었는데 산 속에 사람 사는 집이 있을 리가 없다. 이 때 부터 ‘전설의 고향’에 나올 법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저 멀리에 불빛이 보였다. 신립은 그 불빛이 있는 곳으로 갔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이 한 채 있다. 문을 두드리자 소복을 입은 처녀가 나온다.

“길을 잃었소이다. 하룻밤 묵게 해 주시오.”

“아니 되옵니다. 이 집에는 남자가 살 수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이 집은 도깨비 소굴입니다. 아버지와 오빠가 모두 도깨비한테 죽었습니다.”

“그런 나쁜 놈들을 봤나. 내가 그 놈들을 없애 주겠소!”

처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립은 방에 들어가 호롱불을 켜고, 칼을 옆에 두고 앉았다. 처녀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처녀의 말대로 집 마당에 도깨비들이 모여들었다. 우두머리 도깨비가 말했다.

“어? 이 집에 남자 냄새가 나는구나. 죽으려고 환장했나 보구나. 하하하. 어떤 놈인지 보고 오너라.”

졸병 도깨비는 의기양양하게 신립이 있는 방으로 왔다. 그런데 신립이 앉아 있는 걸 보고는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두목님, 저 방 안에 신립장군이 앉아계십니다.”

“뭣이? 신립장군께서?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사실 신립은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도깨비들이 자신을 알아보는 것도 모자라 겁을 집어 먹자 자신감이 생겼다. 문을 박차고 나섰다.

“이놈들! 네 놈들은 어째서 무고한 사람을 죽였더냐.”

도깨비들은 신립을 보자 모두 바닥에 엎드렸다.

“아이고, 장군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여기는 원래 저희들이 사는 곳인데 사람들이 들어와서…….”

“닥쳐라! 그런다고 사람을 해쳐? 오늘 네 놈들을 다 없애버리겠다.”

“아이고, 장군님, 목숨만은 살려줍시오. 다시는 이곳에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도깨비들은 왜 신립한테 꼼짝하지 못했을까? 하늘의 신장(神將)이 좌우에서 신립을 보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립은 하늘이 내린 장수였던 것이다. 도깨비들은 신립한테 큰 절을 하고는 황급히 그 자리를 떴다.

다음날이 되었다.

“그 도깨비들은 내가 쫓아내 버렸소. 낭자께서는 이제 편히 지내실 수 있습니다.”

“외람된 부탁이오나 장군께서 저를 거두어 주실 순 없으신지요? 저는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습니다. 받아만 주신다면 무슨 일이든 하겠습니다.”

“죄송하지만 저에게는 정혼한 여인이 있습니다. 낭자의 부탁을 들어 드릴 수는 없겠습니다.”

처녀는 다시 간곡하게 부탁했지만 신립은 매몰차게 거절을 했다. 인사를 하고는 그 집을 떴다. 신립은 한참을 가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신립의 뒷모습을 보고 싶었던지 처녀는 지붕 위에 올라서 있었다. 신립은 순간 당황했지만 가던 길을 가려했다. 잠시 후 처녀는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 그렇게 하면 신립이 자신을 구하러 올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신립은 처녀를 구하지 않고 가던 길을 재촉했다. 신립은 또 한참을 걸어 정혼녀의 집에 도착했다. 장인은 신립을 보자마자 이렇게 말했다.

“쯧쯧, 자네 사람을 죽였구먼.”

“장인어른,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그런 일 없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지금 자네 등에 업혀 있는 처녀는 누구란 말인가.”

이 전설은 신립의 처신을 비난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기존의 무능력함에 불인한 성격, 고지식한 태도까지 보태버린 것이다. 이 이야기를 만든 사람은 장수가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사람이면서 살리기도 하는 사람인데 신립한테는 잔인한 마음밖에 없었고, 그래서 전쟁에서 패했다는 사실을 전하려하지 않았는가 한다.

하늘과 같은 국민은 정치인들에게 권력이라는 신장(神將)을 붙여줬다. 그런데 정치인들은 국민을 위해 신장을 부리지 않고 있다. 살릴 수 있는 시간이 있었음에도 그 시간을 허무하게 보내버린 사람들. 라면에 달걀을 넣어서 먹은 것도 아닌데 그게 무슨 잘못이냐고 되묻는 사람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앞에 두고 기념촬영을 하기에 급급했던 사람들. 죽음의 원인을 밝혀 달라고 울부짖는 유족들에게 ‘모르면 가만히 있으라’고 윽박지르는 사람들. VIP를 ‘거론’했다는 걸 꼬투리 삼아 어떻게든 조사를 지연시키려 했던 사람들. 국민이 죽어 가고 있는데 몇 시간 동안이나 ‘행방이 묘연’했던 단 한 사람.

“당신들의 등에는 누가 업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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