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족오(三足烏)와 풍천장어

   
 

선문은 모진 추위를 무릅쓰고 천리 먼 곳에서 15년 동안 떠나 있던 고향을 찾아갔다. 대학후배인 연희 소설가의 요청도 있었지만, 선문 자신의 유년 시절을 더듬어 남기고 싶은 마음이 생겼기 때문이다.

마침 한겨울이라 고향이 가까워짐에 따라 날씨마저 잔뜩 찌푸렸고 차가운 바람이 차창 안으로 불어 닥쳐 윙윙 소리를 냈다. 차창 틈 사이로 밖을 내다보니 어슴푸레해지는 하늘아래 쓸쓸하고 황폐한 마을이 생기를 잃은 채 가로 누워 있었다.

선문의 가슴엔 울컥 슬픔이 솟아올랐다. 다행이라면 대학 2년 후배로 소설가인 연희가 옆에 있다는 것이 그 허무를 메워 주는 듯 했다. 시를 쓰는 선문에게 소설을 써보라는 연희는 30살이지만 아직 꿈을 꾸는 이상주의 미혼녀다. 그녀의 눈은 항시 초롱초롱하고 도시의 욕망에 물들지 않는 순수가 선문에게는 마치 고향 누이동생 같았다. 연희는 부유한 사업가 집 둘째 딸로 태어나 왜? 고통스러운 소설을 쓰는지 선문에게는 이해가 잘 안 되었지만 항시 꿈 많은 대학 1학년 시절 처음 만났던 그날 같이 변함없이 선문을 따랐다.선문역시 중키에 단발머리를 하고 문학 서클에서 만나 언제나 명랑하고 활동적인 그런 연희가 좋았다. 오늘 그녀와 함께 선문 고향을 돌아보고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기로 했다. 도시에서 태어나 가난이나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그녀는 가끔 선문의 고향에서 별을 보고 싶다고 했다.

“서울하늘에도 별은 있어. 물질의 빛 때문에 별빛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뿐이야.”
“이번 선문 선배님 고향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싶어요.”
“별은 춥고 캄캄할수록 잘 보여.”
"고창 선운사는 풍천장어로 유명하지요?”
“풍천장어는 뱀장어야. 뱀장어는 민물에서 5~12년간 살다가 8~10월에 알을 낳기 위해 바다로 가지. 난류를 따라 머나먼 태평양 한복판 심해로 나아가서 산란기에 이른 뱀장어는 등 쪽은 적동색의 금속광택을 띠고 배 쪽은 붉은빛을 띤 은백색으로 변하며 가슴지느러미는 황금색, 주둥이 끝은 흑자색을 띠어 욕정의 아름다움을 온몸으로 드러내.”
“이른바 혼인색이군요.”
“이때 소화기관은 극도로 퇴화하고 생식기관만 발달하게 되며, 이 아름다운 뱀장어는 드디어 깊은 바다 속에서 산란을 하고 죽어가.”

온몸을 욕정에 맡겨 스스로 죽는 이 아름다운 어미의 새끼들은 그 어미가 살았던 강을 향하여 여행을 한다. 댓잎처럼 생긴 이 새끼 뱀장어는 난류를 따라서 짧게는 1년 길게는 3년 동안 대양의 거친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면서 강으로 향한다. 강에 다다른 댓잎 같은 새끼 뱀장어는 하얀 실뱀장어로 몸을 바꾸는데, 인간들은 이즈음의 실뱀장어를 잡아다 키운다. 인간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실뱀장어는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 어미가 한 것과 똑같은 삶을 살게 되고, 인간의 욕망을 위해 희생될 실뱀장어는 양식장에서 사료를 먹으며 자라다 사랑의 색을 온몸에 드러내지도 못하고 불이 단 철판 위에 오르게 된다.

“풍천장어란 무슨 말인가요?”
“전북 고창 선운사 앞 고랑을 풍천(風川)이라 부르지. 본디 이름은 장수천이야. 밀물 때 서해의 바닷물이 이 고랑으로 밀려들어오면서 그 바다의 거센 바람까지 몰고 와 이런 이름이 붙었어. 이 풍천의 장어가 맛있기로 소문이 나 장어 집들은 거의가 ‘풍천장어’란 간판을 달고 있어.”

태평양 실뱀장어에서 풍천장어로 거듭나는 풍천은 고창읍내에서 내려오는 물이 선운산을 왼쪽으로 끼고 흘러 서해에 닿는다. 읍내에서 풍천을 따라 내려오다 왼쪽으로 꺾으면 선운사이다. 이 선운사 입구 즈음에 장어집이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선운사를 왼쪽에 두고 계속 풍천을 따라가면 심원면 바닷가 선문이 태어난 마을이다. 장어를 키우는 양식장은 이 동네에 많다. 장어집도 여럿 있다. 풍천에 자연산 장어가 잡히기는 하지만 수요를 따르지 못하니 가격이 세다. 보통은 풍천 일대에서 양식을 하는 장어를 풍천장어라 하고 먹는다. 고창 내 양어장이 70여 곳에 이른다.

“장어는 완전양식이 되지 않는가요?”
“인공적으로 산란과 부화를 할 수가 없어. 실뱀장어를 잡아 키울 뿐이야. 태평양 한복판에서 태어난 새끼 뱀장어는 내륙의 강을 향해 이동을 하는데, 대만 해역에서는 11월 중순에, 일본 해역에서는 12월 즈음에, 한반도 해역에서는 설 즈음에 잡히지. 실뱀장어가 잡힐 때면 국제적인 시장이 형성 돼. 한국을 포함한 일본, 중국, 대만 등의 양식업체들이 구매에 참여를 해. 풍천장어가 될 실뱀장어들도 이 국제 시장에서 사들여오는 것이야. 실뱀장어의 크기는 0.2그램 정도 되며 8개월을 키우면 250그램에 이르러 먹을 만하게 되지.”
“치어는 수입이지만 6개월 이상 국내에서 양식을 하면 국산이 되는군요.”
“맞아, 수입 장어란 외국에서 양식되어 들어오는 장어를 말하지.”

선문은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마을 마당에서 태양이 서서히 싯누런 빛을 거두어들이고 있었다. 마당가에 바다를 끼고 서 있는 5백년 된 팽나무의 바짝 말랐던 나뭇잎들이 드디어 한숨 돌리고, 그 밑으로 모기 몇 마리가 앵앵거리며 날고 있었다. 바다를 면하고 있는 농가 굴뚝에서는 밥 짓는 연기가 점점 사라져 갔다.
노인들과 남정네들은 나지막한 걸상에 앉아 커다란 합죽선을 부치며 잡담을 하고 있었고, 아이들은 펄쩍 펄쩍 뛰어다니기도 하고. 팽나무 밑에 앉아 공기놀이를 하기도 했다. 아낙네들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산채 나물 삶은 것과 송화 빛 나는 쌀밥을 날라 왔다.

선문이 태어난 건동 마을 사람들은 봄, 가을 두 번 팽나무에 풍년제를 지낸다. 이 팽나무는 낮이나 밤이나 새들의 천국이며, 특히 부엉이와 까마귀가 많이 날아 왔다. 새들이 많이 오는 해는 풍년이 든다며 집집마다 콩을 걷어 팽나무 주위에 땅을 파고 거름을 주었다. 팽나무의 끝나는 지점은 생 울타리로 둘러싼 선문이 살던 집이다.

‘근심 걱정이 없구나. 이게 바로 전원(田園)의 즐거움이라!’

“추수가 끝난 가을에는 팽나무 아래서 노인들은 시조를 읊고, 벼 벤 그루터기 사이로 기어 나오는 민물 게를 잡아다 술안주를 하고, 미꾸리 메뚜기를 구워 안주로 하고 마시는 술은 간식이야. 그 당시는 익은 술항아리에서 건져다 채로 걸러 마시는 토속주가 최고였어.”
“이 마을에서 선문 선배는 자연친화적인 어린 시절을 보냈군요?”
“그렇지, 내가 기억하던 고향은 전혀 이렇지 않아.”

다음날 아침 일찍, 선문이 살던 집 대문 앞에 이르렀다. 기와지붕 위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시들어 부러진 줄기들이 바람에 떨고 있었다. 함께 살던 친척들은 거의 모두 이사를 한 모양이어서 몹시 조용했다. 선문이 엣날 집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그의 어머니께서 마중을 나와 계셨고, 뒤따라 여덟살 난 조카 홍식이도 뛰어 나왔다. 홍식이는 처음 대면하는지라 멀리서 이쪽을 향해 서서 바라다보고만 있었다.

“하루 이틀 쉬거든, 떠나기 전에 친척들을 한 번 찾아뵙고 인사를 드려라.”
“네”
“그리고 경문이 말인데, 그애가 너를 꼭 한번 만나고 싶은 모양인지, 집에 올 때 마다 언제나 네 소식을 묻더라. 내가 집에 도착할 기일을 대강 알려줬으니, 아마 곧 찾아 올거야. 그애는 결혼해서 아들도 있다. 넌 결혼 안 할 거냐?”
어머니는 연희를 바라보며 “참한 아가씨군. 오늘 아궁이에 불을 잘 때서 구들장을 따뜻하게 해 놀게 일찍들 쉬거라.”

그때 선문의 머릿속 에는 퍼뜩 한 폭의 신기한 그림이 떠올랐다.
진한 쪽빛 하늘에 황금빛 보름달이 걸려 있고, 그 아래 끝없이 파란 수박 밭을 지나면 펼쳐진 바닷가의 모래사장 있었다. 조개껍질로 목걸이를 한 열두어 살 씀 되는 소년이 손에 쇠작살을 들고서 한 마리 바다 게를 쫓고 있었다. 그러나 그놈은 날쌔게 몸을 틀어 바다 속으로 도망쳐 버린다.

그 소년이 바로 경문이다.
선문이 그를 알게 된 것은 겨우 열 몇 살 밖에 안 되던 무렵으로, 지금으로부터 20 여 년 전의 일이었다. 그땐 아버님께서도 살아계셨고, 집안 형편도 좋아서 선문은 말하자면 집안의 어엿한 부자 집 도련님이었다. 

경문의 아버지는 선문의 집 상일꾼이었다. 일 년이 지나면 계약된 새경을 준다. 선문은 그 때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뚜렷하게 기억한다. 경문이 사랑채에 기거한 후 선문에게 세상 살아가는 일을 많이 가르쳐 준 것 같았다. 경문이 사랑채에 이사 온 이튿날 그에게 새를 잡아 달라고 졸랐다. 그러자 그 애가 대답하기를,

“그건 안 돼. 큰 눈이 와야 해. 우리는 모래사장에 눈이 오면, 눈을 쓸어 빈터를 만들어 놓고, 짤막한 막대기로 대나무 소쿠리를 버티어 놓고 나락을 뿌려 놓은단 말야. 새가 와서 쪼아 먹을 때, 막대기에 잡아맨 줄을 멀리서 잡아 당기기만하면 그 새는 소쿠리 안에 갇혀 도망 갈 수 없게 되는 거야. 무엇이든 잡을 수 있어.참새든, 뱁새든, 산비둘기든, 꿩이든…….” 하고 말했다.

그래서 선문은 눈이 많이 내리기만을 기다렸다. 경문은 또 선문에게 말했다.

“지금은 너무 추워. 여름에 우리 마을로 놀러와. 우리는 수박 밭에 간다. 너도 갈 수 있어.”
“도둑을 지키는 거야?”
“목이 말라 지나가다 수박 한 개쯤 따 먹는 일 따위는 우리 동네에서는 도둑질로 치지 않아.”

그때까지 선문은 이렇게도 신기한 일이 많은 줄은 몰랐다. 바닷가에는 오색의 갖가지 조개껍데기가 있고, 또 수박에 그렇게 위험한 내력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나중에 들었지만 자기 집 닭장을 알려주고 친구들과 닭을 훔쳐다 냇가에서 탕으로 끓여 먹는 것도 있었어.”
“선문 선배, 도둑이군요?” 연희가 의아했다.
“나중에 부모가 알아도 눈감아 주는 거였어.”
“선문선배는 착하게만 살았나요?”
“중학시절, 찔레꽃이 하얗게 피던 여름밤이었어. 달빛이 은가루 같이 뿌리던 날밤에 마을 소녀 처녀들이 목욕하던 장면을 소나무 숲에서 보게 되었어. 그중에서도 유난히 달을 보고 기도를 드리는 소녀가 있었어. 벌거벗은 몸을 숨어보는 쪽을 응시하며 몸을 보여주는 것이야. 숨이 막히더군. 그 아름다운 소녀, 나중에 알고 보니 무당집 첫째 딸이었어. 이따금 다른 소녀들도 무의식으로 몸을 돌려 보곤 했지만 다리사이가 민둥산이었는데, 그녀만은 숲처럼 솟아있어, 경문에게 물었더니 그녀는 처녀라는 것이었지. 소녀와 처녀의 차이를 알려준 것도 경문이야.”

안타깝게도 여름이 지나버리고 경문은 어머니가 있는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선문은 어쩔 줄을 모르고 큰소리로 엉엉 울었다. 그 애도 부엌에 숨어서 울뿐,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엔 그 애 아버지에게 끌려가 버리고 말았다.

선문도 틈틈이 짐을 챙겼다. 서울로 이사 갈 준비를 해야 만 했다. 선문은 어머님 혼자 이곳에 남겨 둘 수는 없었다. 마침 그때 점심을 먹고 나서 차를 마시며 앉아 있던 선문은 사람이 들어오는 인기척에 돌아다보았다. 선문은 그를 보자 그만 매우 놀라서 황급히 몸을 일으켜 맞으러 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바로 경문이었다. 보자마자 대뜸 그가 경문인 줄 알았지만. 그러나 선문이 기억하고 있던 경문은 아니었다.

키는 배가 커졌고, 옛날에 발그스럼 하던 둥근 얼굴은 누르스럼한 회색으로 변했으며 깊은 주름이 잡혀 있었다. 눈도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언저리가 온통 벌겋게 부어 올라 있었다. 바닷가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은 하루종일 불어 닥치는 바닷바람 때문에 대개 이렇다는 것을 선문도 알고 있었다.
이때 선문은 너무 흥분하여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몰랐다. 단지,  “아, 경문 형. 반갑군…….” 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계속해서 하고 싶은 말들이 꿰어놓은 구슬 같이 연달아 떠올랐다. 참새, 산토끼,날치, 조개껍질, 수박서리, 닭서리 , 그리고 영원히 비밀로 하자던 여름밤 소녀 와 처녀들의 시냇가 목욕장면 훔쳐보기……, 그러나 어쩐지 무언가에 가로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고, 그 말들은 머릿속에서 만 빙빙 돌 뿐,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입술은 움직였지만 그도 역시 아무 소리도 못했다.
마침내 그는 공손한 태도를 취하더니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주인님!”

선문은 오싹 소름이 돋는 듯 했다. 그들 둘 사이가 슬프게도 두터운 장벽으로 막혀져 있다는 것을 알고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다보며, “차돌아! 주인님께 인사드려라.”

그리고는 등 뒤에 숨어 있던 아이를 앞으로 끌어냈다. 그 아이야 말로 15 년 전의 경문이었다. 단지 안색이 나쁘고 야위였으며 목에 조개껍질 목걸이가 없을 뿐이었다.

“이놈이 넷째입니다. 아직 세상 구경을 못해서 부끄럼 만 타고 …….”

어머니가 경문이의 말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안방에서 나왔다.

“ 노주인님, 보내주신 편지는 벌써 받았습니다. 정말 어찌나 기뻤는지,작은 주인님이 돌아오신다는 말을 알고 …….”
경문은 이렇게 말했다.
“아니, 왜 이렇게 서먹서먹하게 구나. 너 나 하고 부르지 않았나? 옛날처럼 선문이라 하게.”어머니는 기쁜 듯이 말씀하셨다.
“노 주인님, 무슨 말씀을 ……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그땐 어린아이 여서 아무 것도 모르고…….”
하면서 경문은 또 차돌이 에게 이리 와 인사를 드리라고 했지만 아이는 부끄러워서 저의 아버지 등 뒤에 숨듯이 바짝 붙어 있었다.
“그 애가 차돌인가? 넷째지, 낯선 사람뿐이라 부끄러워하는 것도 당연하지, 홍식아, 차돌이를 데리고 가 놀아라.”
하고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홍식이는 이 말을 듣고 차돌이에게 손짓을 하자, 차돌이는 가벼운 걸음으로 홍식이와 함께 밖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경문에게 앉으라고 권하셨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연희를 바라보며 겨우 자리에 앉았는데, 콩 자루를 내밀면서 말했다.

“겨울이라 변변한 게 없습니다. 이 건 푸른 콩을 말린 것인데, 얼마 안 되지만 저희 집에서 말린 것입니다. 주인님이 맛보시라고……,”

선문이 그의 생활 형편을 묻자, 그는 머리를 흔들 뿐이었다.

“말이 아닙니다. 셋째 아이들 까지도 거들고 있지만, 그래도 먹고 살 수가 없어요. 세상이 뒤숭숭하고,……농사를 지어 봤자 품삯, 비료 값, 농약 값도 안 나오고.

그는 집안일이 바쁘다면서 집으로 돌아갔다.
옛집은 점차 선문에게서 멀어져 갔다. 고향의 산천도 선문에게서 멀리 떨어져간다. 선문은 보이지 않는 높은 담에 둘러싸여 외톨이가 되어 몹시 숨 막히는 것 같은 자신을 느낄 뿐이었다.

“선문 선배, 이곳의 밤은 어머님과 한방에서 지내고 싶어요. 아마 우리를 부부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어쩐지 쓸쓸하게 보여요.”
“ 연희씨, 고마워. 하지만 애들의 마음은 아직 하나로 이어져 있어. 홍식이는 바로 차돌이를 생각하고 있지 않는가? 난 그 애들이 또 다시 나나 지금 사람들처럼 단절이 생겨나지 않기를 바래.”

연희는 생각했다. 희망이란 것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게 곧 길이 되는 것이다. 몽롱한 그녀의 눈앞에 바닷가의 파아란 모래사장이 떠올랐다. 짙은 쪽 빛 하늘엔 황금빛 보름달이 떠 있었다.

그날 밤 연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어나서 물을 마시고 살그머니 방 밖으로 나왔다. 선문 어머니는 낮에 고된 일 때문이신지 곤한 잠에 빠졌다. 목이 말라 타는 듯 한 갈증이 들었다. 하늘에는 별이 가득했고, 칼날 같은 바람이 스쳤다.멀리서 개짓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녀는 선문이 있는 방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거절당하면 거절당하는 대로 손해될 것은 없다고 생각한 연희는 기회가 있는대로 구혼하기로 결심했다. 기회는 있었으나 그 때마다 알맞은 말이 나올 것 같지 않다는 두려움이 그녀의 입을 다물게 했다.

다음날 아침이 되었다. 건동(建洞) 사람들이 잠이 들면 모르는 척 같이 잠들었다가, 건동 사람들이 깨어나면 시치미를 뚝 때고 파수를 서는 팽나무는 그래서 나무이기 전에 건동 사람들이기도 하다. 새벽이 되면 앞 시냇물에서 피어오른 안개는 들판을 더듬어 팽나무 앞에서 멈춘다.

아침 날 팽나무 앞에서 선문은 기도를 올렸다. 동네 사람들이 동짓날 팽나무에 팥죽을 뿌려주면서 제사를 올릴 때 우상 숭배구나 속으로 비웃었다. 그러나 지금 선문이 말하는 희망 역시 선문이 만들어 낸 우상이 아닌가? 단지 그들의 소망이 아주 가까운 것이라면 선문의 소망은 막연하고 아득하다는 것뿐이다.

“선문 선배, 나중에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시면 이곳을 잊을까요? 나는 선배님이 기억하도록 해드리고 싶어요.”
“ 고마워.”

오십을 갓 넘은 여인은 항시 머리를 곱게 빗고 흰 모시적삼 같은 옷을 입었다.
그녀는 아들을 장가보낸다는데 불만은 없었다. 하느님으로부터 축복받은 농사 일을 시키고 싶었지만 아들이 조금 지나치게 머리가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보는바에 의하면, 아들과 함께 내려온 처녀는, 품행이방정하고, 검소하며, 공부도 많이 했다니까 “만일 아들이 장가를 들겠다면 승낙을 해야지 …….”
하고 선문의 어머니는 중얼거렸다.
“선문 선배는 언제 이 마을을 떠났나요?”
“이곳을 떠나 고교시절에는 도청소재지 전주로 올라갔어. 그곳은 다음에 다녀가기로 하지.”
“다음 기회에 혼자 올수도 있으니, 참고로 전주와 완주에 대해 소설을 쓰는데 참고 할 사항을 적어 주세요.”
“연희씨, 고교 시절 전주에서 보낼 때 적어 놓은 글이 있어, 이거야.

사람들은 전주, 하면 무얼 떠올릴까? 전주의 상징인 덕진동에 있는 건지산,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기린봉, 견훤이 쌓았다는 남고산성, 만경대 바위에 새겨진 정몽주의 시, 갑오농민전쟁의 공방전이 벌어졌던 완산칠봉, 임진왜란의 싸움터로서 피로 얼룩진 전마(戰馬)를 씻었다는 세마천, 1380년 이성계가 황산(荒山)에서 왜구를 토벌하고 귀환하다가 연회를 베풀었다는 오목대와 이목대, 전주 이씨 시조의 위판을 모셨다는 조경묘, 풍남동과 교동 일대에 기와집이 즐비하게 늘어선 한옥보존지구를 들 수 있다.

“ 선문 선배, 정몽주의 시라니 단심가 말고 어떤 시가 있나요?”

남원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끌고 개경으로 돌아가는 이성계는 전주 한옥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오목대에서 연희를 베푼다. 여기에서 이성계는 한나라를 창업했던 유방이 불렀던 대풍가를 읊는다. 자신의 새로운 나라를 세우겠다는 야심을 넌지시 비춘 것이다.

-유방의 대풍가(大風歌)
큰 바람 일어나니 구름이 나는 도다.
위엄을 해내에 떨치고 고향에 돌아왔도다.
어떻게 하면 용맹스런 군사를 얻어 사방을 지킬 수 있을까

이런 이성계의 모습을 본 종사관 정몽주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그가 말을 타고 달려간 곳은 전주천을 건너 남고산성 만경대이다. 그는 이곳에서 북쪽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쓰러져 가는 고려의 운명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한다. 왕조의 한을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읊은 시 ‘석벽제영’은 현재도 만경대 바위에 새겨져 있다.

-정몽주의 석벽제영(石壁題詠)
천길 높은 산 돌길 비끼어 올라서니 이 마음 걷잡을 수 없네.
푸른 산은 은연히 부여국을 다짐했건만 누런 잎은 백제성에 흩날리어 쌓이고
구월의 높은 바람에 나그네의 시름은 깊고 백년의 호기는 서생으로 그르쳤네.
하늘가에 해는 저물어도 뜬 구름은 합해지는데 고개를 돌려 속절없이 옥경만 바라보네.

“선문선배,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 했어요.”
“그 때문인지 몰라도 현재 오목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지만 정몽주의 시가 새겨진 바위는 이름 모를 잡초들과 함께 바위에 새겨진 글자마저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훼손돼 있어.”
“선문선배, 전주 풍속을 계속 알려주세요.”

그럴 듯한 산수화 한 폭 담긴 합죽선이나 삼태극 선명하게 돌아가는 태극선, 좋은 물에 모시발보다 고운 대발로 떠낸 한지, 명인명창의 요람 대사습놀이, 덕진 연못에 장관으로 피어나는 연꽃, 그리고 기린봉 위로 떠오르는 달·한벽루에서 보는 실안개 드리운 남대천 경치·남고사에서 울려오는 저녁 종소리, 전주팔경을 헤아리며, 버들잎을 꿰뚫는다는 상징적 이름을 지닌 천양정(穿楊停) 활터에서 이따금 정적을 깨트리며 따악, 딱 들려오는 화살이 과녁에 맞는 소리나, 저녁 햇살 받으며 남대천 맑은 물 밑의 속살 같은 모래 속에서 건져 올린 모래무지로 요리한 오모가리 탕, 양지머리 푹 고아 만든 육수로 지은 고슬고슬한 밥에 콩나물·쇠고기육회·고추장·참기름을 넣고 철따라 갖가지 양념과 보기 좋게 뿌리는 고명을 섞어 놋숟가락으로 썩썩 비빈 다음 황포 묵 얹어 내놓는 비빔밥, 새우젓으로 간을 본 콩나물국밥에 곁들여 마시는 뜨끈한 모주 한 사발을 마시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 지금은 비록 아예 사라지고 없거나 희미하게 잔영처럼 남은 것도 많지만 이들 모두가 한때는 예향(藝鄕) 전주, 전통과 문화의 도시 전주에 윤기를 돌게 하던 아름다운 이름들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전주가 조선왕실의 관향(貫鄕)으로서, 조선조 오백 년 동안 감영이 자리한 전라도의 수부(首府)로서 행세해왔다는 사실에서 말미암는다. 그게 아니라면 태조의 어진과 그것을 안치하기 위한 경기전이 굳이 이곳 전주에 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 전주성의 남문에 ‘풍남문’이란 이름을 붙였을 리가 없으며, 반쪽만 남은 전주객사가 그처럼 위풍이 당당한 까닭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이렇게 선문이 전주에서 만나는 유형, 무형의 문화유산에는 조선왕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선문선배, 완주에 대해서도 알려주세요.”

연희는 행복이라든가 정열이라든가 도취라든가 소설에서 쓰는 그렇게 아름답게 느껴졌던 말들이 실지 인생에 있어서는 정확하게 말해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인지 알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완주에 대해 물어보았다.

“연희 작가, 완주에 대한 것을 따로 적어 놓은 글이야”

전주를 외곽에서 감싸고 있는 완주는 예전 같으면 온전히 전주의 일부여서 따로 이 나누어 부를 일이 없었다. 하지만 지척이 천 리라고, 두 곳에 남은 유물·유적을 놓고 보면 차이가 없는 것도 아니다. 전주가 조선조 오백 년을 지내면서 그 이전의 전통을 깨끗이 벗어버리고 조선의 전주가 되었다면, 완주는 아직도 조선 이전 훨씬 먼 시절의 소식을 면면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맛깔스런 산채나물 집, 경천면에 있는 멋스러운 화암 사나, 산자락 끝난 벌판에 널찍하고 평평하게 자리 잡은 아늑한 송광사는 절 자체, 혹은 건물 하나하나도 나름대로의 미덕을 보여주면서 아울러 선문을 먼 백제의 시간으로 초대하는 절이다.
전주·완주를 벗어나 동쪽으로 길을 잡으면 이내 가파른 오르막이 시작되고, 한번 올라선 고갯길은 잠시 낮아지는 듯이 하다가 다시는 내려갈 줄 모르고 앞으로만 이어진다. 진안고원이 시작된 것이다. 그런 고원의 중심으로 점점 다가서는 진안고을 초입, 거기서 말의 귀처럼 두 봉우리를 쫑긋 세운 산 하나를 만난다. 마이산이다. 산 전체가 그대로 거대한 역암덩어리인 이 산은 1억 년의 세월이 빚은 자연의 불가사의이고, 그 안에 숨어 있는 탑사의 돌탑들은 한 인간의 의지가 이룩한 인조의 신비이다.

진안을 지난 길은 무주로, 장수로 갈려나간다. 길은 비록 갈리지만 어느 길을 잡아도 이제는 실개천같이 이리저리 휘도는 길이 자꾸만 산 속으로 빨려들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그 길이 가닿는 곳이라면 어디를 막론하고 산이 아니면 들어설 수 없는 삶의 자취들을 만나게 된다. 이를테면 무주의 적상산성과 그 안에 남은 사고터·안국사도 그렇거니와, 구천동 긴 골짜기의 입새에 있는 나제통문이나 반대로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한 백련사도 그런 범주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장수는 같은 산악지역이면서도 좀 다른 문화를 보여준다. 한때 이 심심산골의 자제들에게 유교 이념을 심어주기에 여념이 없었을 장수향교 대성전을 보면서 산보다는 도회와의 친연 성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든지, 매운 향기로 꽃다웠던 논개를 기리는 의암사 와 논개 생가를 들여다보면서 선문이 전북에서 고교시절을 보내다 서울로 대학진학 때문에 올라와 자리 잡은 곳이 관악산 자락아래 봉천동이다. 이곳 봉천동 s대학교에서 만나게 된 한국사를 가르치던 스승이 강봉천(奉天)선생이다.

“연희 작가, 전주, 완주를 아는데 참고가 되었어?”
“선문 선배, 언제 시간을 내서 직접 전주와 완주에 함께 오고 싶어요. 어머님 부탁을 이루고 싶어요.”
“ 어머님의 부탁…….?
“ 어머님은 집안의 손이 귀하다고 하더군요.”
“ 서울에 올라가면 우리역사에 대해, 특히 고조선 시대를 알아보기 위해 한국학에 혜박 한 강봉천 선생을 뵙고자 해, 같이 가면 어때?”
“선문선배, 왕조의 뜰을 소설로 쓰려니, 단군시대 자료와 김일성 시대 북한 자료가 없어 고민 중인데 잘 되었어요.”

서울에 돌아가는 중에도 연희는 생각했다.

“밀월의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신혼여행을 떠났어야했다. 이름만 입에 뇌어 보아도 상쾌한 여러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면 함께 지낸 다음날은 몸도 마음도 녹아버린 것 같은 또한 더없이 즐거웠을 것이다. 선문은, 어머님의 말을 들으면 독자인데 왜? 결혼을 안 할까? 혹시 후배남자들을 그리 좋아하니 동성애자일까? 많은 생각이 스쳐갔다.”

우리나라의 찬란한 북방역사인 고조선·고구려·발해 관련 드라마, 한국과 일본에 고조되는 민족주의 열풍으로 이러한 시점에서 삼족오에 숨어있는 역사정신과 철학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가 있으리라 본다. 선문과 연희는 이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선문의 고향에서 서울로 돌아온 3일 후 관악산 줄기에 있는 신림동 봉천(奉天)선생이 거주하는 은천아파트를 찾아갔다.

현재의 세계 인류는 생활 범위와 사회적인 진출 대상을 협소한 지상 세계로부터 광활한 우주 세계로 확대하여 적용시키고 있다. 따라서, 세계의 인류는 높은 문명의 수준을 토대로 하여 비약적인 발전과 의욕적인 전진을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비약적인 현상의 전개는 반드시 단시일 내에 성립된 것이 아니고, 인류가 오랜 노력과 시련을 극복한 뒤부터 가능하였다. 우리나라의 역사도 세계 역사 발전에 따라 점진적인 자세를 취하여 고도한 세계문화 수준에 육박하고 있다.
강봉천 선생 서재 안에 도착하여 인사를 올리고 김연희 후배 작가를 소개했다.

“강선생님, 우리는 앞으로 고난의 역사, 비과학적인 역사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역사에서 생산적이고 자주적이며, 유용성을 강조하여야만 전진에서 비약을 다짐할 수 있지요?”
“유박사, 또한 우리나라의 역사가 발전할 자세를 취하고 전진하기까지는 어떠한 경로를 밟고 걸어 왔는가를 이해하여야 해. 그러기 위하여 우리는 선인의 유물 유적을 통한 정밀한 관찰력, 세심한 검토를 우리 민족의 유래와 그 기원 및 사회생활을 더듬어 점진적인 해결점을 찾아내야 할 것이야. 특히 반만년 역사를 창조 발전 유지해온 인물 산맥의 특성과 변천은 어떠한 가를 살펴보아야 하지.”
선문은 자신의 사무실에 있는 중에도 겨울 관악산에서 모이를 줄 때 유난히 봉천의 주위를 떠나지 않던 까마귀를 잊을 수가 없었다. 환영이었을까? 하얀 빛깔의 까마귀 한 마리가 머리에 남아 있다.
선문은 봉천 선생이 써준 까마귀 밥 나무 글을 읽어 보곤 했다.

-까마귀밥나무
산지 계곡의 큰 나무 밑에서 자라 생김새만으로는 검은 까마귀란
이미지를 찾을 수 없이 고운 만큼 봄놀이 술잔모양을 한 정겨운 노랑 꽃
잎 가장자리에 톱니가 있는 까마귀밥을 달여서 옻오른 독을 치료하고
가을에 익어 까마귀가 즐겨 찾던 겨우내 달려있는 붉은 열매
관악산 정상부근 정적의 눈발 속에 어미 새가 세상 다할 때까지
부모를 보살피는 까마귀의 효도 오래 잊지 않도록 까마귀밥을 찾는다.
까마귀는 겉이 검다하여 속까지 검을까 겉 희고 속 검은 인간 세상을 보면
진실이란 외모로 찾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마음을 느껴보기 위해
까마귀 날개처럼 눈비가 내려도 찾아드는 빛깔 좋고 향기로운 어린잎
까마귀밥 열매 같은 밥을 구해놓고 까마귀의 고운 성품을 닮고 싶다.

“역사에서 발견한 봉황과 고조선 고구려 상징 새인 삼족오(三足烏)를 닮은 하얀 까마귀를 봉조(鳳鳥)라 부르기로 했어요. 천년에 한번 본다는 희귀조, 강원도 정선에 흰 까마귀가 등장하여 나라에 좋은 일이 있을 징조이길 기대합니다.”
“역사교육은 나라의 혼을 가르치는 게야.”
“강봉천 선생님, 우리나라의 역사는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철기 시대의 여러 단계를 직접 간접 밟으면서 발전해 왔지요?”
“우리의 선조들은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무늬 없는 토기를 제작, 사용하면서 청동기 문화를 개발하고 세계문화 와의 기맥을 통하게 되어 새롭게 사회를 발전시켜 문화가 발전해 나감에 따라 앞선 문화를 소유한 고대 인물들은 아직 뒤진 문화에 머무르고 있던 씨족 사회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여 이시기에 성림된 국가가 고조선이야.”

이어 철기문화가 보급되자 한반도의 여러 곳과 만주에 많은 나라들이 세워지게 되었다. 이시기의 사람들은 인류발전의 기반인 농지를 개간하고 농업생산력을 증대시켰다. 따라서 이때부터 농업이 모든 산업의 주축을 이루게 되었고 또한 이들은 시초에는 부족 연맹이거나 읍락. 군장 적인 형태를 가졌지만 차차 정치제도를 정비하면서 삼국성립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삼국은 동일한 민족에 의해 세워진 나라들이지만, 나라가 세워진 시기나 지리적 위취. 경제 발전 그리고 대외 관계 등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나타내면서 발전하였지요?”
“우리나라에서 삼국이 성장하던 시기에 중국에서는 후한, 위, 진, 남북조, 수.당의 통일 제국으로 연결되는 혼란과 대립의 시기에 처해 있고, 이에 따라 삼국의 대외적인 항쟁이나 삼국 서로간의 투쟁은 이와 같은 국제적인 환경과 연결되어 더욱 민감하고 특징 있게 전개 되었으며 고구려는 만주의 넓은 지역 및 한반도의 북부 지역을 통합 장악하면서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는 민족의 방파제로서의 임무를 수행하였고 백제는 중국 남조와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 무역 국가로 발전하여 일본에 문화를 전달, 크게 깨우쳐 주었으나 후에는 뒤늦게 발전한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기는 등 수세에 몰리게 되었어.”

그 후로도 오래 동안 고구려는 수.당과 치열한 대결을 계속하였다. 한편 한반도에 가장 늦게 발전을 이룬 신라는 뛰어난 지도자가 당과 손잡고 백제. 고구려를 단일국가로 통합하고 발전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당이 오히려 고구려 등을 자기네 영토로 편입하려 하자 즉각 고구려. 백제 유민과 일치단결하여 당군을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축출함으로써 자주적인 삼국통일을 이룩하였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치면서 발전해 간 삼국시대는 선조들이 다양한 능력을 발휘하여 위대한 인물들의 활약으로 문화를 창조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이 시대 사람들은 사회 윤리와 명예를 매우 존중하였는데, 그러한 예로서 원광법사의 세속 5계나 애국 애족.단결 협동의 내용 등을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정신적 바탕이 있었으므로, 삼국시대 사람들이 강력한 외세의 침입을 막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고대 왕국을 발전시켜 나갈 수 있었다. 고유의 전통을 보다 세련된 형태로 향상 시키고 민족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뛰어난 인물들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봉천(奉天) 선생님, 삼족오는 어떤 새인가요?”
“삼족오에는 천리에 바탕을 둔 한민족의 통치철학이 숨어있어. 세 발 달린 까마귀, 삼족오는 태양 안에 살면서 천상의 신들과 인간세계를 이어주는 신성한 신조(神鳥)이지. 태양의 사자로 알려져 있는데, 광명숭배의 원 뿌리로서, 동아시아의 천자 국 이었던 배달-단군조선-북부여-고구려의 상징이지. 다시 말해, 천손인 하늘백성 의식을 갖고 있던 한민족 고유의 상징인 새야.”
“그런데, 삼족오의 다리는 왜 셋이며, 왜 하필 불길한 새로 알려진 까마귀이며 또 검은 새일까요?”
“이는 한민족의 역사정신이 왜곡된 오늘날, 우리민족의 고유철학을 모르고선 그 의미를 알기 어렵지. 고구려 고분벽화에 그려진 삼족오 형상은 검은 새로서 하나의 몸통에 세 개의 발이 달려 있어. 이것은 바로 한민족의‘삼신일체(三神一體)와 광명정신을 역사상에 현실화시켜 이상세계를 구현하려는 철학을 상징한 것이야.”

“강선생님, 삼신일체란 무엇인가요?”
“우주 천리를 크게 깨우친 동방의 한민족은 천지이법의 대도를 인간역사 속에 적용했지. 단군의 건국이념인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로 혼연일체가 되는 천지인합일(天地人合一)의 삼신일체사상을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생각하고 사고하는 만물의 영장이 된 인류가 처음 깨달은 우주관이며, 이후 이 삼신일체사상은 개인과 개인은 물론 산과 들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한민족 집단을 소통시켜 하나로 화합하고 통합하여, 국가를 이루는 바탕이 되었으며, 조선은 단군이라는 탁월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가 흩어진 한민족의 집단들을 무궁화나무가 자라는 4계절이 뚜렷한 아름다운 강산에 정착시키고 교육시켜, 하나의 단일민족 하나의 국가로 세운 아침의 나라라는 뜻이야.”

“조선은 진실로 하늘이 만든 나라이며, 근화(槿花)의 땅이라 한 말이군요?”
“근화(槿花)는 무궁화라 하는데, 유달리 조선 사람들이 이 나무를 특별히 사랑하는 까닭으로, 또한 조선을 무궁화 강산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이에 대대로 이어 내려온 역사를 돌이켜 보니, 이 말은 밝고 또렷한 역사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하늘이 보호하사 또한 영원히 함께 한다는 것이야.”
“태초 단군의 천지인(天地人)이 하나라는 삼신일체(三神一體) 삼신사상(三神思想)은, 홍익인간(弘益人間) 즉, 널리 인간 세상을 이롭게 하기 위해, 하늘의 문을 열어 무궁화로 한민족의 땅을 정하고, 건국한 동방의 밝은 해가 뜨는 아침의 나라 조선(朝鮮)의 통치이념이며, 대대로 한민족의 정신문화가 되었군요?“
“이 삼신일체는 3신이 각각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주체는 한 몸이고 작용으로서 조화(造化)·교화(敎化)·치화(治化)의 3대 권능을 두루 갖추어 한 몸에 지녔다는 뜻이므로 삼신일체의 도를 크게 깨쳐서 하늘의 광명정신을 통치원리에 구현하고자 한 것이며 이것이 바로 단군조선시대의 삼한관경제(三韓管境制)이지”

“강선생님, 또, 삼한관경제란 무슨제도인가요?”
“유박사, 고조선은 신교의 삼신 가운데 만물의 질서를 바로잡는 치화신의 도가 실현될 때야. 그래서 단군왕검은 삼신의 원리에 따라 나라를 삼한 즉, 진한, 변한, 마한으로 나누어 다스렸어. 이것이 바로 고조선의 국가경영제도인 삼환관경제이지. 단군왕검은 대단군으로서 요동과 만주지역에 걸쳐 있던 진한을 통치하고, 요서지역의 변한과 한반도 북부의 마한은 각각의 부 단군이 통치하였어. 마한은 하늘의 정신, 변한은 땅의 정신, 진한은 천지의 주인이요, 중심인 인간을 상징하였어.”
“삼한으로 나누었으니 도읍지도 세곳인가요?”
“진한의 첫 수도는 송화강 아사달이었고, 변한의 첫 수도는 안덕향으로 지금의 하북성 당산, 마한의 첫 수도는 백아강으로 지금의 평양이었어. 이중에서 진한의 수도는 3번 이동하였는데, 송화강 아사달에서 백악산 아사달 이후 장당경 아사달로 천도했어. 변한의 수도도 안덕향에서 창려를 거쳐 해성으로 3번 천도 했지만, 마한의 수도는 이동하지 않고 계속 평양이었지.”
“그런데, 중국 한족은 그들의 정체성이 확립된 한(漢)나라 때에 와서 동이족의 천자국 상징인 삼족오를 불길한 새로 폄하시켰지요?”
“우리 민족도 그 영향을 받아 까마귀가 흉조라는 선입견을 갖게 되었어. 삼족오는 동방의 광명사상과 천자국이 한민족임을 상징하지.”

“강선생님, 전 강토에 민족정신의 상징인 무궁화를 심어야 하겠군요.”
“일제는 무궁화가 태극기와 함께 민족지도자들에서부터 일반 민중에 이르기까지 민족과 조국을 상징하는 강력한 존재임을 간파하고, 무궁화를 우리 민족과 멀리 떼어놓기 위한 흉계를 꾸몄어. 그들은 무궁화를 볼품없는 지저분한 꽃이라 경멸하여 격하시켰으며, 어린 학생들에게 '무궁화를 보면 눈병이 난다'느니 심지어 눈이 먼다고 까지 하여 멀리 피하여 가도록 가르쳤어.”
“국화말살정책을 강행, 무궁화를 심지 못함은 물론 심어진 무궁화를 모두 캐내도록 하고 무궁화를 캐어낸 자리에는 벚꽃을 심도록 하였다지요?”
“이는 우리 민족의 혼을 뿌리 채 말살하고 일본인화하겠다는 그들의 식민지정책을 그대로 드러낸 것이지”
“강선생님, 여의도 윤중로 벚꽃을 톱으로 자른 심정을 이해하겠네요.”
“유박사, 벚꽃을 톱으로 자르면 일본의 만행과 무엇이 다른가.”
“예, 선생님, 꽃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
“미국에 입양 갔다가 조국에 영구히 귀국한 그녀의 양부가 보내온 무궁화란 글이 있어.”
“어떤 이야기인가요?”
“무궁화란 글이야. 이승희라는 입양자 친모에 대한 기억이 살아있는 그녀는 성인이 된 후에도 무궁화처럼 외롭게 살아간다. 열 살의 어린 소녀시절 자신이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용서할 수 없어 치료하지 못한 그 깊은 상처 포기나누기나 꺾꽂이라도 왕성한 번식력 때문에 잘 지탱하는 무궁화 꽃처럼 살고파 잘잘못을 훌훌 털며 고국에 돌아 왔으나 회복하기 어려운 멍든 자국 지고 갈 마음의 짐을 생각하면 눈물이 마르지 않아 부르튼 손 지문은 타오르고 무궁화동산은 언제 세워질까? 조국에 돌아온 교포의 양부가 보냈어.”
“강선생님, 입양은 많은 상처를 남기는 군요.”
“한국에서 입양 할 수 있다면 좋을 터인데 이것이 어렵더군.”

“강선생님, 고구려 고분벽화에 붉은 태양과 그 속의 삼족오는 무엇을 의미하는가요?”
“여기에는 대우주의 광명정신과 천리대로 나라를 다스리고 태양처럼 밝고 순수한 생명정신으로 살고자 했던 하늘백성인 우리 선조들의 정신이 깃들어 있어. 고구려 건국 당시 주몽의 아들 온조는 백제를 건국하고, 또 다른 아들 비류왕자와 그를 따르는 유민들과 그 후손들이 백제를 거쳐서, 일본에 건너가 일본건국의 주역이 되었지. 이때 비류왕자의 무리를 통해 건너간 고구려 천자국의 상징이 일본 역사 속에 살아남아서 천황이나 천황 호위군의 상징이 되었어. 그리고 오늘날 일본 축구국가대표팀의 상징물이 되었어. 하지만 일본은 역사적으로 삼국시대 문화를 전수 받은 아류 국이므로 천자 국이라 할 수 없음은 명백하네.”

“지금 동북아 3국 한·중·일 간에는 역사전쟁이 치열하지요?”
“지금의 독도분쟁과 중국의 동북공정은, 동북아의 천자 국 자리를 두고 싸웠던 4700여 년 전 대전처럼, 동북아의 패권을 둘러싼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적 패권전쟁’의 성격이 내재되어 있어. 동북아 패권시대에 단군조선-부여-고구려의 역사맥을 관통하는 삼신일체, 삼한일체의 천리와 역사통치정신을 상징하고 있는 삼족오의 철학정신을 되짚어보는 것은 한민족의 혼을 되찾는 일환으로서 소중한 의미가 있으리라 보네.”

“고구려는 왜 삼족오를 섬겼는가요?”
“고대에 한반도에서 삼족오로 상징되는 태양을 섬겼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마을을 지키는 솟대에 있는 새도 까마귀였을 것으로 추측되며 실제로 학계에 보고된 바로는 남해안 일부와 제주지역에서 솟대에 까마귀를 만들어 꽂아 놨다는 것으로 봐서 그러한 가능성이 크지.”
“설날의 전날을 까치의 설이라고 하는데, 이때의 민속을 보면, 고대부터 밤에 화롯불을 피워 태양의 정기를 북돋는다는 의미로 활활 타오르게 하는 행사를 했던 것으로 들었어요.”
“이러한 고대의 종교적 영향이 동북아 지역에 퍼지면서 한반도와 중국, 일본에 삼족오에 대한 숭상과 설화가 분포하게 된 삼족오는 한국의 것만은 아니군요?“
“별개의 이야기로, 물론 호랑이도 좋은 의미지만, 삼족오의 문양을 일본의 축구협회에 쓴다는 게 별로 기분은 좋지 않아. 동북아 지역에서 삼족오를 능가하는 상징물은 없기 때문이지. 고대부터 숭상했던 사신인 좌청용,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상징적 의미도 크지만, 삼족오의 의미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의미야.”

“강선생님, 듣고 보니 그렇군요.”
“고려 최고의 명필가 이암의 저서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보면 8세 단군 우서한이 재위 중이던 갑인 7년(BC 1987년)에 삼족오三足烏가 날아와 대궐 뜰 안으로 들어왔는데 그 날개의 길이가 석 자나 되었다는 말이 나오고, 또 고구려 진파리 고분에서 출토된 ‘해’를 보면 둥근 원 안에 삼족오가 있고 원을 따라 12개의 점이 박혀 있어. 원은 태양이고, 12개의 점은 십이지지신을 뜻하지. 십이지지신을 땅으로 데리고 온 분이 환웅이고, 그 이름을 붙여 준, 분이 바로 치우천황이여.”

“왜 태양 속에 사는 새가 검은 새일까요?”
“그것은 태양의 흑점과 일치해. 고대 사람들은 태양의 흑점을 보고 태양 속에 비단을 두른 검은 불새가 살며 그 새가 미래를 예언해 주는 태양신이라 믿었어. 그래서 삼족오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등에서 민족을 상징하는 깃발에 쓰였고, 고구려는 이를 국조로 삼았으며, 삼족오란 발이 셋 달린 까마귀를 말하지.”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할 것 없이 삼족오 깃발을 민족의 상징으로 그렇게 소중히 다루었군요.”
“삼족오는 고구려 쌍영총·각저총을 비롯한 수많은 고분 벽화에 그려 있고 청자·불화 등 여러 곳에서 발견되지. 중국 사학자들은 이것이 중국에서 탄생한 신화이고 고구려가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삼족오는 처음부터 고구려 이전, 즉 부여는 물론 고조선 때도 우리 문화 속에 존재했지.”

“삼족오를 섬기며 고구려를 세운 동명성왕은 어떤 인물인가요?”
“나는 천제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모신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가 무리 짓게 하여라. 고구려의 건국 왕, 동명성왕 고주몽에 대해 기록을 남긴 첫 자리가 뜻밖에도 광개토대왕비라는 점은 신비롭지. 5세기에 세워진 이 비석의 비문이 주몽의 탄생 담으로부터 시작돼.”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가 영웅 서사시 동명왕편을 썼지요?”
“장편 동명왕 산문시를 쓴 것은 1193년, 그의 나이 25세 때의 일이었어. 고주몽의 생애를 그린 이 동명왕편에 대해서는 오늘날 학계의 평가가 풍성하지. 고구려가 다름 아닌 우리 민족사의 줄기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극적으로 그려내 역경을 이겨내는 슬기로운 왕의 모습을 통해 후손에게 자긍심을 심어주었다는 점에서 그렇지. 처음에는 믿을 수 없어서 귀신이고 환상이라 생각했는데, 세 번 거푸 탐독하고 음미하니 점차 그 근원에 이르게 되어, 환상이 아니고 성스러움이며, 귀신이 아니고 신(神)이었다고 서술했고, 주몽의 나이 겨우 일곱 살이었을 때에 남달리 뛰어나 스스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쏘면 백발백중이었고 부여의 속어에 활 잘 쏘는 것을 주몽(朱蒙)이라고 하였으며, 이것으로 이름을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어.”

“강선생님, 고조선의 영토를 회복한 광개토대왕은 어떤 분인가요?”
“18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올라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이 갖추어준 바탕에서 대정복 전쟁을 수행하였어. 국경은 북쪽으로 연 나라와 남쪽으로 백제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에까지 고구려의 튼튼한 힘을 과시하며 지경을 넓혔으며, 숙신과 동부여마저 그 위력 앞에 떨게 하였지. 그가 이룬 최강 고구려는 아들 장수왕에 이르러 절정을 치닫는데, 그 같은 고구려의 화려한 면면은 광개토대왕비의 비문으로 남아 오늘날 우리에게 여실히 전해져.”
39년의 짧은 생애 동안 그가 이룩한 이 공적은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3개의 대륙을 정복하고 최초로 동, 서양의 융합을 이루며 핼레니즘 문화를 형성했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20세에 왕위에 올라 13년만에 그리스, 페르시아,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하고 33세에 돌연사로 생을 마감한 정복 왕 알렉산더와도 비견되는 우리 민족의 자랑이다.

“강선생님, 광개토대왕 비문은 어떤 내용인가요?”
“‘왕의 은택이 하늘까지 미쳤고, 위엄은 온 세상에 떨쳤다. 나쁜 무리를 쓸어 없애자 백성이 모두 생업에 힘쓰고 편안하게 살게 되었다. 나라는 부강하고 풍족해졌으며, 온갖 곡식이 가득 익었다. 그런데 하늘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았나 보다. 39세에 세상을 버리고 떠나시었다.’고 새겨져 있어“
“인간은 역사를 창조했고 그것을 유지 발전시킨 분이군요.”

“고구려 을지문덕은 어떤 장군인가요?”
“구한말에 단재 신채호는 을지문덕 전 이라는 전기까지 써서 을지문덕 같은 영웅이 다시 출현해 쓰러져가는 민족을 구해줄 것을 기원하기까지 했던 장군이지.”

“장군의 살수 대첩은 어떤 내용인가요?”
“을지문덕은 적진에 들어가서 이미 저들의 양식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 그래서 을지문덕은 적을 더욱 지치게 만들기 위해 일부러 작은 싸움을 하여 패하는 척 달아나는 작전을 펼쳤지. 하루에 일곱 차례 싸워 수나라 군대가 모두 이기기도 했어. 우중문은 우문술 등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군대가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마침내 살수를 건너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과 불과 30리 되는 곳에 와서 진지를 구축 하였어.이때 을지문덕은 우중문에게 보낸 멋진 시가 있지.”
“ 어떤 시지요?”

-그대의 신기한 전략은 하늘의 이치를 알았고
기묘한 계책은 땅의 이치마저 통달 했네
싸움에 이겨 공이 높았으니
만족한 줄 알았거든 이제 그만 멈춤이 어떠하냐.-

“겉으로는 우중문을 칭찬하는 말이지만, 시 속에 담긴 뜻은 그를 야유하는 소리였군요?”
“지금 고구려 깊숙이 공격해 왔지만 실상은 너희가 포위되었다는 것을 슬쩍 알려 준 시였어. 수나라는 그때서야 고구려의 진짜 전략을 알게 되었어.”
“우문술 장군의 말을 이제야 알겠군. 이곳에서 살아나갈까?”
“우중문 장군, 때가 늦은 것 같아.”
군량도 떨어진 상태에서 더 이상 공격을 해보았자 이길 수 없음을 깨달은 그들은 퇴각을 결정했어. 을지문덕은 퇴각하는 적을 공격하기 시작했지. 쫓기던 그들은 살수에 이르렀어. 살수는 오늘날 청천강이라고 알려져 있고 이곳에서 수나라 100만 대군를 수공법으로 전멸시킨 대승이지.”
“사실 수나라는 변방의 오랑캐인 선비족에서 출발했기 때문에 고구려가 높이 대우해 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 물론 이 시는 실력에 근거한 고구려 사람들의 대륙적인 기질, 호탕한 면을 보여주기도 하지.”

“ 수문제의 뒤를 이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꿈꾼 수나라 양제의 야망을 무참하게 수장시킨 살수대첩을 설명해 주세요.”
“서기 612년, 수양제는 위풍도 당당하게 113만3800명의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진격에 나선 수나라 군대의 규모가 어찌나 컸던지, 맨 앞과 맨 뒤의 거리가 거의 일 천 리에 가까울 정도였지. 게다가 황제를 따라나선 관료들의 행렬도 맨 앞과 맨 끝이 80리 거리였지. 이런 수나라 군대의 기세를 꺾고 그들에게 참패의 추억을 안긴 것이 살수 즉 청천강에서 고구려의 대승이었어. 살수대첩에서 기가 꺾인 수나라는 뒤이은 몇 차례의 전쟁에서 '체력'을 완전히 소진한 끝에 결국 멸망하고 말았으니, 살수대첩은 세계사적으로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어.”

“수나라 조정이 말하는 조공은 무엇인가요?”
“19세기까지의 중국인들은 로마교황청도 중국에 조공을 하고 대영제국도 중국에 조공을 한다고 자랑했지만, 그것은 엄연히 대가관계를 전제로 한 물물교환이었어. 그런 이익이 없었다면, 저 멀리 사는 영국인들이 배에 물건을 가득 싣고 그처럼 열심히 중국을 들락거린 이유를 설명할 수 없을 것이야. 마찬가지로, 조선국과 중국 간의 조공도 실은 그런 것이었어.”

“ 강 선생님, 고구려의 연개소문은 또 어떤 분인가요?”
옆에서 두 사람의 이야기를 열심히 적고 있는 연희는 목이 마르지만 갈증을 참았다. 그때 마침 무슨 생각이 나서였는지 봉천이 일어났다. 주방이 달린 곳으로 갈 모양이었다. 연희는 따라가서 준비해 놓은 녹차를 끓여서 서재로 가지고 왔다.
“아까 누구이야기였지?”
“연개소문이 였어요.”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를 고립시키고 나서,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까지 공격했지만 연개소문이 직접 전투에 나선 고구려는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어. 이후 665년 연개소문이 죽을 때까지 당나라는 더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으나 연개소문은 후계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지. 그의 후계자가 된 큰아들 남생이 동생들과의 권력 다툼 끝에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어. 연개소문은 뛰어난 군사지도자로서 고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던 강한 고구려를 이끌었지만,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후계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는 비난은 여전히 그를 따라 다니고 있어.”

이야기를 마치고 차를 한잔씩 마신 후에 선문과 연희는 인사를 하고 봉천의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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