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삼국지인물전>, <역사, 어제이면서 오늘이다> 외 4권

【투데이신문 김재욱 칼럼니스트】자식이 있는 부모한테 “당신의 자식이 죽었다면 어떨 것 같은가?”하고 묻는다면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크게 한 소리 들을지도 모른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재수 없다’고 욕을 먹거나 한 대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지만, 이런 생각을 한다는 것 자체에 거부감이 든다. 혹시 말이 씨가 될까봐 두렵기도 하다. 실은 나부터 그런 생각이 든다. 두려움 또는 슬픔의 감정을 느끼기도 전에 귀를 막아 버리고 싶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내는 부모들이 꽤 많다. 이들 역시 ‘내 자식이 죽는다면?’이라는 물음 자체를 던지지 않았던 사람일 것이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 실제로 벌어졌다. 더 이상 살아서는 만날 수 없는 내 자식을 꿈에서 만난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다.

「죽은 딸아이를 꿈에서 만나고」 2수, 「夢殤女(몽상녀)」 二首

1.
세밑 전 새벽꿈에 나타난 죽은 딸아이 歲除前曉夢殤兒(세제전효몽상아)
다섯 살까지 살다가 세상 떠난 지 2년. 五歲生今二歲離(오세생금이세리)
말 배우고 즐거이 놀 때 얼마나 기뻤던지 學語嬉遊惟悅孝(학어희유유열효)
가르치지 않았어도 서책 보며 중얼중얼 尋書念說不勤師(심서념설불근사)
선악은 타고 난다는 걸 알겠는데 從知善惡由天得(종지선악유천득)
현명한 사람, 어리석은 사람의 죽음은 누가 관장하는가. 孰管賢愚入地爲(숙관현우입지위)
뚜렷한 얼굴모습, 잠깐 새 떠나버려 眉目分明俄已去(미목분명아이거)
늙은 아비 베갯머리 눈물이 더디 말라. 龍鐘枕上淚乾遲(용종침상누건지)

2.
늦게 낳은 아이라 지극히 사랑하여 人情鐘愛晩生兒(인정종애만생아)
피난 가는 배 안에서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지. 避寇舟中膝不離(피구주중슬불리)
부윤(府尹)으로 부임할 때 데리고 갈까 생각하다가 提挈擬將隨尹府(제설의장수윤부)
말을 꺼내자마자 어느새 무양(巫陽)이 내려와 버렸다. 語言翻已下巫師(어언번이하무사)
고운 너 타향에 묻고 몹시 슬퍼했는데 埋香慘絶他鄕寄(매향참절타향기)
예전 같은 모습으로 꿈속에 나타나 주었구나. 入夢依然昔日爲(입몽의연석일위)
내 강가에 와보니 네 생각 알 것 같아 及我江干知汝意(급아강간지여의)
강 서쪽 천 리 밖에선 왕래가 더뎌서 그랬단 걸. 江西千里得通遲(강서천리득통지)

조선 중기의 문인인 간이(簡易) 최립(崔岦, 1539-1612)의 작품이다. 최립은 선조 말기의 뛰어난 문장가였다. 개성 사람이었는데 시에서의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 글씨에서의 석봉(石峯) 한호(韓濩)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일컬어졌다. 시보다는 문장에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지만, 옛 사람들은 시와 문장 모두에 능했으므로 우열을 가리기가 무척 어렵다.

위의 작품은 제목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어린 나이에 죽은 딸을 꿈에서 보고 난 후에 지은 시다. 아이의 죽음을 극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비교적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행간에 짙은 슬픔이 배어 있는 작품이다. 어린아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나이에 말을 배우고 아빠 옆에서 재롱을 떤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아빠의 책을 뒤적거리며 혼자서 중얼중얼 거린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일 뿐이지만, 나한테는 특별한 일상이다. 내 아이와 함께하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일상을 더 이상 겪을 수 없다. 늘 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아이는 앞으로 영영 내 곁에 없을 것이다. 슬픔도 슬픔이지만, 먼저 원망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이렇게 착한 아이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으면서, 데리고 갈 때는 왜 나쁜 사람만 데리고 가지 않는가. 하늘이 무심하다는 건 알았지만, 막상 그 무심함이 나한테 적용되니 원망하는 마음을 가누기 어렵다. 설상가상 꿈속에서 나타난 아이는 한 번 안아볼 사이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사라졌다기보다는 뜻밖에 딸을 만나서 놀란 마음이 아빠를 꿈에서 깨도록 한 게 아니었을까. 꿈에서 깨버린 아빠는 딸의 귀엽고 예쁜 모습이 새삼 떠오르자 소리 없이 눈물짓는다. 꿈이라서 더 슬프다.

이 아이는 늘그막에 얻은 귀염둥이였다. 아무래도 늦게 얻은 자식이 더 애처로워 보이는 게 인지상정이다. 한 순간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했었는데 야속하게도 하늘이 이 아이를 데려가 버렸다. 두 번째 수의 4구에 등장하는 무양(巫陽)은 여성 무당인데 상제의 명을 받고 혼백을 주관한다고 한다. 일종의 저승사자인 셈이다. 무심한 무양은 아빠와 딸이 작별인사를 나눌 시간도 주지 않고 둘을 갈라놓았다. 갑작스럽게 아이의 죽음을 맞이한 아빠는 몹시 슬퍼하면서 아이를 묻었다. 이제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하니 더 슬펐다. 그런 아빠의 마음을 알았을까. 아이는 아빠를 찾아왔다. 그 때 못 다한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인가. 아빠는 꿈에서 깨어 강 앞에 섰다. 강 건너편 멀리 떨어진 어느 곳에 사랑하는 딸이 아빠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빠도 딸도 그 강을 건널 수 없다. 강은 이 세상과 저 세상을 가르는 경계선이기 때문이다. 그제야 아빠는 딸이 왜 꿈속으로 들어왔는지 알아차린다. 그 먼 거리를 걸을 수 없고, 강을 건널 수도 없기에 아빠의 꿈속으로 날아온 것이다. 딸은 생전의 모습 그대로를 아빠에게 보여준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아빠, 나는 저 세상에서 이렇게 그대로 있어. 그러니 너무 슬퍼하지 마.’ 두 번째 수의 마지막 7ㆍ8구는 독자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남의 자식이 죽어도 이렇게 슬픈데 내 자식이 나를 두고 저 세상으로 떠난다면 슬픔만으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아플 것이다. 이래서 ‘내 자식이 죽었다면?’이라는 질문은 던지고 싶지 않다. 그러나 한 번 쯤은 해볼 만한 질문인 것 같다. 이 시를 읽으며 감상에 젖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겪고 있는 평범한 일상은 알고 보면 특별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는 점, 남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여기는 사람이 많아 질 때 비로소 이 세상은 ‘살만해 진다’는 단순한 사실을 깊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에 그렇다.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이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진솔한 슬픔, 한 방울의 눈물을 보낸다. 이것밖에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 더욱 마음이 아픈 건, 자식의 죽음을 통곡하는 부모를 앞에 두고도 눈물 한 자락 흘리지 않는 사람도 이 세상에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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