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박정희 대통령 시절 즉 60년대 초반부터 그의 급서거 시기인 70년대말까지 한국경제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울 정도로 그야말로 세계경제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초고속 성장을 했다. 요즘은 3% 전후의 저성장으로 여기저기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노정되고 불협화음이 들려와 격세지감을 느끼지만 그의 집권기간 중 이룩한 눈부신 경제성장 지표는 두고두고 한국민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고 그때 그 시절에 대한 향수가 인구에 회자가 되고 있다.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박근혜 후보에 대한 상당수 국민들의 지지는 바로 이러한 박 후보의 부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표로 결집되어 나타난 대중적인 현상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박정희 대통령의 후광을 입어 당선됐음을 의미하며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만일 박근혜 대통령이 그 기대에 미치질 못하는 경우 그 지지표는 일순간에 실망과 대중의 배반 즉 분노로 바뀔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박정희 대통령, 그는 어떻게 이처럼 단기간 내에 GDP 100달러라도 되지 않던 세계최빈국 대한민국을 중진공업국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 있었을까.

1966년 당시 한국의 1인당 GNP가 130.8달러, 같은해 필리핀은 269달러로 동남아시아에서 선두그룹에 들어있었다. 6·25당시 미군을 제외한 참전국 중 제일 먼저 한국에 전투병력을 파병한 필리핀은 한국에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었을 정도였다. 우리의 국민소득에 비해 두배 이상 높았던 필리핀이 오늘날 한국과 벌어진 경제격차를 보면 상대적으로 한국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경제성장을 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장충체육관이 당시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앞서있던 필리핀 원조로 건립되었다는 것을 주지의 사실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전 국민적인 가난극복의 과제에 대해 역설했고 그리고 당대를 희생하고서라도 반드시 후손에게는 보다 나은 세상을 물려주고자 호소하고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그는 당시 협소한 내수시장과 낮은 유효구매력을 한꺼번에 극복할 수 있는 전략으로 외연적 성장전략 즉 수출제일정책을 채택했다. 부존자원은 거의없고 인구는 넘처나는데 이를 극복할 방안을 찾는다는 것이 쉽질 않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부국강병의 요체는 한정된 국가적인 재원을 집중해 우선 농업중심의 사회를 공업중심의 사회로 변모시키는 것이었다.

그가 채택한 부국강병정책의 핵심은 바로 이 공업화를 통한 한국사회의 대개혁이었다.

역사적으로 보아 늘 우리보다 한 수 아래로 생각되던 일본(왜국)이 우리 보다 앞서 급성장할 수 있었던 핵심이 바로 서구문물의 선제적인 수입과 공업화정책의 성공에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한국도 더 늦기 전에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한 공업화정책과 수출주도정책만이 대한민국을 세계최빈국에서 벋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확신했다.

1967년 4월 17일 오후 1시 30분 대전공설운동장에서 있었던 대통령 유세연설에서 그는 1차 5개년 계획기간 중 3400여개의 공장이 새롭게 세워졌다고 선언했다.

1964년 수출 1억달러 돌파를 계기로 1977년 수출 100억달러 달성에 이르기까지 수출은 박정희 정권의 목표이자 생존전략이었다. 1967년 28개 수출전용공단인 구로수출산업공단준공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 산업공단을 건설하고 수출을 독려했다.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함으로써 재임 중 9개 고속도로건설을 강행하는 등 산업근대화에 심혈을 기울였다.

1973년 포항제철이 준공됨으로써 중화학공업정책의 첫 결실을 맺게 된다. 포항제철은 온국민이 반대한 한일국교정상화와 대일청구권행사를 통해 일본으로부터 받은 청구권 자금으로 건설한 ‘국민기업’이었다. 그것은 민족사에 가장 치욕적인 36년간의 식민지 일제통치의 핍박과 설움과 분노, 민족적 자존심을 미래를 희생과 맞바꾼 상징적 사건이었다. 철저한 실용주의자인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이러한 선택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후대에 맡겼다. 포철신화의 연출은 박정희, 주연배우는 박태준이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의 선택에 대해 야당정치세력과 학생 등 의식있는 민중은 분노하였지만 그는 민족중흥과 조국근대화의 필요성에 대해 역설하며 반대세력을 제압해가며 자신의 의지를 관철해 나갔다. 지금의 시각에서 본다면 대단히 정치적으로 인기없는 참으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다. 북한이 아직까지 일제36년에 대한 대일청구권협상을 마무리 짓지 못한 것과 비교해 보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저돌적인 한일국교정상화 및 청구권협상 마무리는 그만큼 당시 박정희 혁명정권이 금전적으로 다급했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당시 너무도 화급히 진행되고 마무리되었던 이 대일청구권 졸속처리 두고두고 한일간 역사적인 부담으로 작용되고 있다.

그는 중화학공업육성과 더불어 국산병기제조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나날이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 당시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와 주한미군의 군사력에 의존하던 국방을 자주적인 국방으로 변환시키고져 노력했다.

박정희 집권기간 중 인권문제 등을 거론하며 미군 철수를 강행하려는 미국 카터정부와의 갈등에서 박정희는 독자적인 핵개발을 하려고까지 하였다가 1975년 박대통령의 명령에 의해 포기됐다. 한국은 북한보다 훨씬 이전부터 자기방어용 핵무기를 개발하고자 했으나 미국의 압력으로 결국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미군철수는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판단으로는 국가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인식됐다. 남북간의 군사력 불균형을 그나마 미군이 커버해주고 있었는데 미군병력이 철수하면 한반도에 급격한 힘의 불균형이 초래돼 결국 북한의 오판과 남침을 가져올 것이라는 절박함이 있었다. 결국 박정희 대통령은 미군철수를 기정사실화하고 한국 스스로 방위능력을 증강하는 이른바 ‘율곡사업’을 전개했다. ‘율곡사업’은 자주국방을 위한 노력인 동시에 미군철수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기도 했다.

당시 중화학공업정책을 책임지고 진행하였던 오원철 경제2수석의 회고에 의하면 창원공업단지내 병기창을 만들어 총포 등 병기류를 자체 생산했다. 필요한 경우 일부병기는 해외에서 구매하기도 하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일일이 직접 결재했다고 회고했다. 그만큼 최고지도자의 자주국방과 부국강병에 대한 집착을 보여주는 대목이랄 것이다. 청와대 대통령집무실 내에는 한반도전체가 나타난 지도가 항상 걸려있었는데 그 지도에는 늘 최근 남북한의 병력배치현황이 자세히 표시돼 있어 박정희 대통령 스스로 늘 제2한국전쟁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어쩌면 북한에 의한 끊임없는 도발은 당시 박정희 대통령으로 하여금 내부역량을 결속하고 다지는 좋은 자극제였던 셈이다.

중화학공업육성정책과 더불어 농촌과 도시간의 소득격차를 줄이기 위한 새마을 운동이 제창됐다. 새마을운동은 국가가 주도한 국민운동이었다.

근면·자조·협동의 기본적인 정신과 실천을 범국민적·범국가적으로 추진해 국민의 총체적인 참여로 국가발전을 가속적으로 촉진시키려는 목적하에 행해진 풀뿌리 지역사회개발운동이다. 이 범국민적 운동은 단군 개국이래 최대의 농어촌 주택 개량사업에서 자연환경 보호 보존, 토지관리 기법도입, 과학적인농사 경영기법 도입이라는 획기적인 사업으로 평가된다. 사회질서 운동과 도덕 재무장운동이라는 사회과학적측면에서도 성공적인 개혁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지붕을 볏짚 대신 슬레이트 또는 함석으로 대체개량, 담장바로잡기, 마을 안길 정비 등이 주된 사업내용이었다. 1972년부터는 주민지도자의 발굴·훈련 및 그 활용에 역점을 두면서 사업내용도 애당초의 환경개선사업, 즉 물리적인 생활 및 영농기반조성사업을 발전적으로 추진하면서 전향적 의식계발사업과 생산소득사업 등을 포괄하는 종합적인 것으로 확대됐다.

애당초 농촌을 겨냥한 새마을운동은 적지 않은 도전도 겪었지만 전통적 체계의 농촌을 현대적으로 변환하도록 충격을 가하는 데 크게 성공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농촌사회에 팽배돼 있었던 봉쇄성, 숙명론적 체념성, 지역지향성 등을 극히 단기간 내에 전국적인 규모로 타파하는 데 성공한 것으로 최근 국제적으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자립의지가 있는 농촌마을 우선적으로 정부가 지원함으로써 농촌지역을 빠른 시간내에 근대화시키는 촉매역할을 했다. 새마을운동은 당시 민족중흥이라는 국자적인 아젠다를 실천해나가기 위한 위로부터의 사회운동적 성격을 띤 국민총동원체제 같은 것이었다.

후일 이 새마을운동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계승됐으나 동생 전경환씨에게 이를 맡기우면서 국민들로부터 외면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박정희 대통령은 국토의 효율적인 이용을 위한 이른바 국토이용에관한법률을 지정해 전국토를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했다. 특히 지금의 시각에서 보아도 탁월했던 것은 도시외곽지역에 대한 그린벨트의 지정이었다. 도시의 부분별한 팽창이 가져올 폐해를 미리 예측하고 추진한 그린벨트는 그 후 수십년간 지속되며 도시의 허파노릇을 했다. 그 과정에서 부당하게 개인의 재산권이 과도히 제한되는 폐해를 낳기도 했다.

제3공화국 경제수석 비서관으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입안과 집행에 직접 참여한 오원철 전 수석은 “당시 자본과 기술 및 경험 등 아무런 밑바탕이 없는 불모의 상태에서 오로지 공업국가로 입국해야 한다는 지도자의 과감한 관점의 전환과 더불어 온 국민의 성공에 대한 강한 믿음과 의지가 있었기 때문에 기적적인 경제적 성과가 가능했다”고 회고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모든 자원과 의지를 하나로 모아 놀라울 정도의 높은 국가적 효율성을 발휘케한 유용한 수단이었다”는 입장을 밝혔다.

물론, 고속 성장에 따르는 부작용도 상당했다. 고속 성장은 다른 말로 ‘압축’된 성장이다. 선진국이 장기간에 걸쳐 진행한 것들을 너무도 빨리 건너 뛰었기에 문제점도 많다는 분석이다.

빈부의 격차, 재벌밀어주기에 따른 기업 구조 불균형, 경제성장 최우선 정책에 따른 정치·사회 미성숙, 도시인구 과밀화와 농촌인력 부족, 환경오염 등은 성장의 그늘이다. 박정희 정권이 지금의 한국경제 성장의 핵심이었다는 점에서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그 후 한국사회의 많은 문제점의 핵심 역시 사실상 박정희 정권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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