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새마을 운동, 그 작은 불꽃이 한국의 역사를 바꾸다

   
▲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한강의 기적’은 정치,경제,사회적 다양한 요인이 복합적이고도 상승적으로 작용해 이뤄졌는데 경제개발5개년계획과 함께 주목할 말한 일은 바로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시작된 새마을 운동이다.

지역사회개발운동으로써의 농촌새마을 운동의 시작은 1970년 4월 22일 개최된 지방장관회의에서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의욕적인 젊은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부락민의 협력과 이러한 노력과 협력을 위해 일선 행정책임자들의 사기진작방안 연구와 지원을 도모토록 하고 이런 운동은 새마을 가꾸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고 알뜰한 마을 만들기 운동이라고 해도 좋을 것” 이라고 천명한데서 비롯됐다.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관련부처였던 내무부는 세부지침을 마련 행정말단 조직인 리와 동단위까지 농한기 등을 이용한 마을 공동사업을 하도록 지침이 하달됐다. 아울러 당시 정부는 한 마을당 300포대의 시멘트를 일괄 지원했다.

당시 정부는 이 시멘트의 사용을 주로 마을 공동작업 예컨대 마을 진입로 넓히기, 교량 및 배수시설 건설, 마을우물 고치기, 마을 미화작업 등 공동목표에 사용할 것을 한정했다. 이러한 목표들은 마을주민의 총의를 통해 공동으로 해결하기 쉬운 것들이었다.

그렇다면 왜 그즈음에 당시 정부가 느닷없이 시멘트를 300포대씩 전국에 뿌려대며 농촌 가꾸기 사업에 손을 대게 된 것일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당시 한국은 이른바 경제개발5개년계획에 의거 국가자원을 특정분야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고속성장의 기초를 막 닦고 있던 상황이었다.

휴전 직후인 1953년부터 1961년까지의 연평균 경제성장률이 4.8%에 불과했던 반면 1962년부터 시작된 경제개발5개년계획은 수입대체산업육성과 수출주도의 경제개발 전략 성공으로 섬유,비료,시멘트,전력 등과 같은 수입대체 품목이 양산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됐다.

이 기간 시멘트 생산양은 137 만톤을 생산 국내수요량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는 상황이었다.

더욱이 이 시기 외자도입이 급증하며, 이에 따른 외채상환부담 증가 등 경제압박요인이 발생하게 됐고자연 1차 산업인 농업에의 투입여력이 상대적으로 저감됨으로써 도농간의 격차가 점점 벌어지게 됐다.

이 기간 농림수산업부문은 5.0%의 경제성장률을 목표로 하였으나 실제성장률은 2.3%에 그쳐 그 낙후상태를 면치 못하는 상황이었다.

박정희 정권 입장에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위한 내수시장의 확충과 식량증산을 통한 소득증대가 절실히 요청되는 상황이었다. 특히 만성적인 쌀부족 현상은 공업화과정의 커다란 걸림돌로 작용하였는 바 국민경제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식량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상황이 겹치게 되어 결국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이 강구되기 시작하였는 바 이것이 바로 농촌새마을 운동의 점화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우선 농업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으로 생산기반 확충과 생산성 제고가 최우선과제로 제시됐다. 경지확장, 마을안길 넓히기, 경지정리 사업 등이 구체적인 사업대상이었다. 아울러 농업용수 개발과 하천의 정비 등도 행해졌다. 천수답에 의존하던 한국의 농업은 관개수로의 정비로 한해(旱害) 극복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단위당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종자개량, 농약의 개발과 사용, 그리고 유기질 비용증산 등도 이뤄지게 됐다. 아울러 공동단지 조성,공동 농기계구입 등 영세성 극복을 위한 작업도 병행해서 추진됐다.

원래 세계각국별 근현대사를 보면 산업화 과정에서 도농간의 격차의 심화현상 혹은 소득의 불균형 문제는 단순히 경제적 문제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복잡한 사회문제가 나타났다. 특히 극심한 소득불균형 문제는 구성원들로 하여금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갖게 하고 반혁명의 의식을 키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쿠데타로 집권 집권과정의 정치적 정통성을 결여한 박정희 대통령의 입장에서 이러한 사회불안요인의 급증은 결코 이롭지 못하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사전에 제거돼야만 했다.

산업화 과정에서 급증한 이농현상은 풍부한 저임금 산업인력의 도시유입이라는 긍정적 효과에도 불구, 여전히 사회불안 요인으로 작용했다.

논리적 비약의 위험성은 있으나 새마을운동의 농촌으로부터 점화가 시작된 요인 중에는 정치적인 요인도 무시할 수 없었다.

1968년 1월 21일 일단의 북한에서 남파된 특수부대요원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1.21사태’로 명명된 이 사건은 한국전쟁 휴전 후 발생한 가장 충격적인 남북간의 적대적 사건으로 남한은 북한에 의한 게릴라식 테러부대공격을 곧 한국에 대한 선전포고로 보고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입장을 선언하는 등 긴박한 상황으로 치닫게 됐다. 이 사건의 여파로 향토예비군이 창설되는 계기가 됐다. 

물론 당시 이러한 일련의 긴박한 상황이 모두 새마을운동 개시의 핵심적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기는 무리가 따르나 적어도 남북한 고도의 긴장관계 하에서 한국은 나름의 자구책 이른바 ‘체제경쟁’에 박차를 가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가지게 한 것으로 추론해 볼 수 있다.

1972년 4월 4일 제4회 농촌부업경진대회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더 살기좋은 농촌을 건설해 보겠다는 결심으로 합심해서 일해서 우리의 농촌이 잘사는 농촌이 되면 우리나라가 튼튼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것이 곧 요즘 우리가 말하는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것입니다”라고 말한다.

결국 1970년 말 새마을운동이 시작된 것은 경제사회적 요인 이외에도 군사안보적 요인 등 정치적인 요인도 상당히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새마을 운동은 이처럼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필요성과 함께 최고국가지도자의 강력한 정치적 의지에 의해 출발, 독려되기에 이른다. 

1970년 4월 22일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제창 출범돼 거의 한 세대에 걸쳐 중단없이 지속되어 온 새마을운동은 그 동안 많은 변화와 굴곡을 경험하면서 발전돼 왔다.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며 ‘시행착오와 실수’ 등도 있었지만 대체적으로 새마을운동은 성공적으로 전개되었으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본다면 ‘영광과 긍지’가 앞섰다고 볼 수 있다.

‘한강의 기적’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고속성장의 또 다른 축인 ‘새마을 운동’은 당시 한국인의 의식구조에 대대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가난과 수탈의 역사 속에 찌들어 있던 한국인들은 “우리도 하면 잘 살 수 있다!”는 자심감을 가지게 됐고 이것을 결국 국민의식의 각성과 의식의 근대화를 낳는 계기가 됐다.

국민의식의 각성과 근대화는 결국 민주적인 정치이념과 체제를 가능하게 했다. 민주주의란 결코 배고픔과 굶주림 속에서는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체계적인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새마을운동을 통해 한국농촌은 절대적인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이 비로소 가능해졌고, 결국 이러한 현상은 더 나은 정치체제 즉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실현을 가능하게 한 것이다.

한국이 세계역사에 유래가 없을 정도로 빠른 시일 내 민주화와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경제성장이라는 선행지수가 있음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경제개발 초기 자칫 극단으로 치달을 수도 있는 노사관계가 새마을 운동을 통해 순화되고 사측은 노동자를 자기식구처럼, 노동자는 회사와 공장을 자기것 처럼 아끼는 바람직한 노사관계가 정착되는 계기도 마련되게 됐다.

‘농촌새마을운동’에 이은 ‘도시새마을운동’ 초기 각 사업장별로 활발히 전개된 분임토의활동은 생산성향상은 물론 산업현장 내 노사간의 대화의 장을 마련함으로써 근로자들은 현장을 자신의 삶의 터전이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소득을 만들어 내는 진정한 일터로 인식했고, 사용자측 역시 근로자들을 위한 적극적인 애로사항 청취를 통해 근로자를 가족처럼 생각하는 등 노사간의 평화적, 우호적 관계가 형성됐다.

이른바 새마을운동을 통해 직장을 ‘제2의 가정’처럼 생각하자는 운동이 붐을 이루었던 것이다.

당시 많은 기업주들 또한 노동력을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자본가의 우월적 지위에서가 아닌 가장의 위치에 서서 근로자의 불편한 점을 어려운 점을 보살펴 직장을 제2의 가정화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오늘날 극한대립으로 치닫곤하는 노사갈등을 심심치 않게 언론에서 보곤하는 살벌한 현실에서보면 그야말로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들릴 뿐이다. 노사 모두 한번쯤 그때 그 시절을 곱씹어 볼 일이다.

국가사회와 각 분야별 조직이 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때 분명 국운이 융성했었고, 갈등하고 반목하며 분열되면 쇠락했던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일 것이다.

‘한강의 기적’ 신화는 이처럼 전국적인 사회운동인 새마을운동의 체계적이고도 정열적인 전개과정을 통해 착착 진행되어 갔다.

새마을 운동의 성공적인 전개과정은 모름지기 당시 한국의 국가최고지도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조국근대화에 대한 집념과 이를 믿고 따른 전 국민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5000년의 역사 속에 가난에 찌든 한국인들은 바로 이 국가최고지도자의 집념에 동조함으로써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하면 된다!”라는 긍정적 의식구조를 형성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구체적인 국가비전을 제시했다.

몇 년내 1000달러 국민소득,100억달러 수출 등 누구라도 이해하기 쉬운 용어로 국가의 비전을 제시했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맬 것을 독려했다.

초기 새마을운동을 전개하면서 국민들이 자신을 믿고 따라준다면 몇 년도까지는 가정 가정마다 자가용이 한 대씩 가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식의 희망과 꿈을 불어넣었고, 국가지도자 자신도 그 목표달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솔선수범했다. 만일 그가 자신이 제시한 목표들을 지키지 못했다면 그것은 고도의 정치선전 (propagenda) 에 불과했을 것이나 박정희는 상당부분 이를 실천에 옮겼고 많은 국민들은 그것을 실제상황으로 느꼈으며 외국인들은 ‘한강의 기적’을 경이로운 눈으로 지켜봤다.

새마을 운동은 끊임없는 정신교육을 통해 실천을 강조했다. 새마을운동이 성공한 핵심요인 중 하나는 바로 농민교육, 체험자에 의한 교육을 반복적으로 행함으로써 범국민적인 참여를 유도할 수 있었고 사업전개과정에서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다.

새마을운동은 농민과 노동자를 지도한 행정공무원들의 헌신적인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새마을사업을 일선에서 지도하는 공무원들이 직접 발로 뛰면서 국가최고지도자의 정치철학과 이념을 현장에 까지 전달하기 위해 밤낮으로 뛰었고, 그들의 땀흘림이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그대로 투영됐다.

그러나 달도 차면 기우는 법.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의 최측근 중 한 사람이었던 중앙정보부 김재규 부장에 의해 박정희 대통령은 시해되고 마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당시 한국사회를 충격 그 자체로 몰아넣었던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인 10.26 사태는 새마을운동의 최고지지자요 보루였던 박정희 대통령을 잃게 됨으로써 그 구심점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새마을 운동의 모든 것을 한 순간에 정지시키고 말았다.

원래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을 배경으로 추진되었던 운동인지라 그의 사거는 운동의 추진력의 상실을 의미했다.

물론 그의 사거 이후 박정희 대통령의 뒤를 이은 군사정권인 제5공화국 전두환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에 의해 새마을운동이 다시금 추진되긴 하였지만 이미 빛바랜 사진과 같은 일이었다.

새마을운동의 열기가 박정희 대통령시절만 할 리 없었고 더욱이 박정희대통령 사거 후 권력의 공백기간 중 우리의 현대역사상 가장 잔인하고도 폭력적 방법으로 권력을 거머쥔 전두환의 새마을운동에 대한 정치적 비중은 이미 상당부분 희석될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전두환의 대통령으로서의 집권기간 중 새마을 운동의 사유화 논쟁은 새마을 운동이 그간 조국근대화의 기치하에 수없이 많은 치적을 쌓아왔음에도 불구, 특정인의 전유물인 양 사유화하는 바람에 그 의미가 급격히 퇴색되고 한국인의 뇌리에서 점점 잊혀져갔다.

안타깝게도 70년대 한국사회를 변화시키는데 크나큰 역할을 하였던 사회적 운동으로써의 새마을운동은 현재 점점 한국인들의 뇌리 속에 잊혀져 가고 있다.

한국인들은 새마을운동이 더 이상 한국의 현재상황에 맞지 않으며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것은 유행 지난 옷가지처럼 장롱 깊숙히 처박혀 점점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유독 변화에 민감한 한국인들이기에 과거를 돌이키기에는 현재의 한국인들의 삶이 버겁기 때문일까.

한 국가의 부국강병전략차원에서 보아 ‘새마을운동’은 분명 ‘한강의 기적’을 낳게 했던 한 부분이자 우리 한국인들의 유산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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