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미국은 대한민국 정부탄생의 산파역할을 한 우리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근현대 역사 속에 ‘운명적 동반자’ 관계이다. 최근에는 흔히 ‘전략적 동반자관계’나 ‘혈맹관계’라는 표현이 이를 대신하곤 한다. 과거 노무현 정권시절에는 이러한 대미관계가 요동치는 상황까지 갔었지만 지난날 대부분의 보수정권들은 정권안보와 국가안보차원에서 미국과의 밀월관계를 유지해왔다.

대한민국 정부출범 직후 한국의 국방력은 그야말로 보잘 것없는 수준이었다. 해방과 동시에 진주한 미군 군정당국은 대한민국의 국방력을 초기 국내치안유지가 가능한 정도의 병력으로만 유지시키려 했었고 결국 이는 대부분의 한국방어를 미군측에 과도하게 의존케 하는 결과를 초래케 했다.

이승만 정권에 뒤이은 장면정권도 국방분야의 대미의존도에 있어 전 정권과 크게 나진 것이 없었다.

박정희가 군사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한 이후 미국 정보당국은 초기 그의 사상적인 정체성에 대해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 쿠테타를 이끌었던 박정희 소장이 혁명공약 제1조를 반공을 국시 ‘국시 國是’로 내건 것은 이러한 미국의 우려를 불식시키고자한 쇼맨십(showmanship)적 성격이 강했다.

“나 박정희는 당신들 미국사람들이 의심하듯이 공산주의자가 아니다!”라는 선언이었다. 미국 측을 상당히 의식하고 만든 혁명공약 제1조였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미국은 민주당소속 JF케네디 대통령이 미국 민주당 정부를 이끌고 있었다. 5.16 군사쿠데타직후 어렵사리 성사된 박-케네디회담에서 박정희 측은 자신에 대한 미국정부의 정치적인 추인을 하는 화답으로 ‘월남에 파병할 의사가 있음’ 이라는 큰 선물보따리를 풀었다.

당시 박정희의 월남파병제안은 정치적으로 볼 때 고도로 계산된 승부수였다. 휴전선을 지척에 두고 남북이 팽팽하게 군사적인 대치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2개 사단 병력의 전투병을 월남에 파병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국가의 존망을 건 거대한 도박과 같은 것이었다. 당시 정치권 특히 야당측에서는 월남파병에 대해 초기 적극적 반대를 하였다.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와진다는 논리였다.

박정희는 결국 승부수를 던졌다. 국내여론을 뒤로하고 파병을 결정한 것이다. 케네디와의 회동시 처음 거론된 한국군의 월남파병문제는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된 이후 취임한 존슨대통령 때 정식으로 이루어 졌다.

당시 월남이라는 전쟁수렁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은 미국입장에서는 2개사단규모의 한국군 전투병력 월남전 참전은 그야말로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미군대신 피를 흘려줄 우방국을 드디어 찾은 셈이기 때문이었다. 월남파병은 한국이 6.25전쟁 당시 공산주의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준 미국에 대한 보은의 성격도 명분으로 작용했지만 더 큰 현실적 이유는 미국조야에 널리 공론화되고 있던 주한미군철수 논쟁에 대한 쐐기를 박을 필요성이 있다는 절박함과 아울러 한국이 후방전초기지로써 전쟁 물자를 조달해 벌어들이는 달러에 있었다. 마치 6.25전쟁당시 일본이 미군들의 후방물자지원기지 역할을 통해 경제를 부흥시킨 것처럼 말이다.

전쟁수행을 위해 후방보급기지역할을 한국이 수행할 수 있게 됨으로써 엄청난 금액의 달러가 한국으로 흘러 들어오게 됐고 이 달러는 결국 한국경제성장을 촉진시키는 밑거름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되었다. 36년간 일제의 의한 강압적 통치에 대한 대일청구권이 유무상보상을 모두 합쳐 5억달라 남짓이었던데 비해 한국의 월남전 참전을 통해 벌어들인 달라는 10억달러가 훌쩍 넘었다.(미국 행정부가 초기 의회에 승인요청했던 액수는 대략 15억달러 내외였다)

한국은 월남파병을 통해 이른바 월남전 특수를 톡톡히 누리게 된 것이다.

부수적으로 한국전투병력의 월남전 파병에 따른 전력공백을 메우기 위한 한국정부는 이른바 국군현대화를 미국정부에 요청했고 당장 한국군 전투병지원을 이끌어 내느냐가 발등의 불이었던 미국정부는 한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한국군 현대화에 막대한 미국재정을 쏟아부었다.

그야말로 한국입장에서는 월남파병을 통해 국가안보라는 거대한 승부수와 함께 전쟁을 통한 돈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겨냥한 셈이었다.

다른 시각에 본다면 한국군의 월남파병은 전투실전경험을 쌓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극한 군사적인 대치상황을 수 십 년간 벌이고 있었지만 실제 전투경험을 하지 못해 한국군의 전투능력은 의문점이었다. 이러한 한국군의 전투력 문제점을 월남파병이 자동으로 해결해 준 셈이었다.

월남전참전을 통해 한국군들이 현지에서 벌인 용감무쌍한 전공담은 한국인들에게 일종의 대리만족과 카타르시스 같은 분위기를 제공했다. 우리도 북한에게 당하는 것만이 아닌 월맹 베트공을 무자비하게 무찌르는 용감한 군대라는 그런 카타르시스… 6.25 전쟁 당시 인민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했던 약체 국군 이미지를 벋어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아울러 한국사회내 군인들의 위치와 발언권이 훨씬 강해지는 정치사회적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나중 현지에서 작정 중이던 한국군들이 베트콩 토벌이라는 명분하에 무고한 현지 민간인들까지 집단으로 살육한 만행은 베트남전이 끝난 지금까지 두고두고 베트남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 뼈아픈 민족적 상처가 되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시대를 ‘악당들의 시대’라고 평가했던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보고한 ‘프레이져 리포트’에는 1965년 미국이 처음으로 베트남에 전투부대를 파견한 이래, 한국군을 참전시키기 위한 노력이 최우선적인 순위로 다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미국이 당시 한국군을 필요로 했던 이유는 군사작전 지원 차원뿐만이 아니라 여론정치를 하는 존슨대통령 입장에서는 자유세계의 중요한 관심으로 ‘전쟁을 팔아야’했던 미 국내정치와 국제정치의 미묘한 역학관계와 관련이 있었다.

미국은 오로지 한국인들만이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부응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고 실제 박정희가 이끌던 한국정부는 1966년부터 1973년까지 5만명 규모의 군사력을 베트남에서 유지시켜 주었다.

앞서 지적한 바대로 박정희 대통령이 이끄는 당시 한국정부입장에서는 남북 대치 상황임에도불구 해외에 파병을 함으로써 국력과 국가적 성숙도를 평가받는 계기가 되길 바랬다.

이는 북한에도 역으로 미국과 한국이 혈맹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보냄으로써 섣부른 침략행위를 하지 못하게 하는 전쟁억제효과를 가져왔다.

미국이 한국군의 베트남 전쟁참가를 위해 보상한 총액은 10억달러에 달했으며 이중 9억2500만달러가 한국정부의 외환보유액으로 비축됐다. 당시 한국군에게 지급된 급여는 미군과 근접한 수준으로 제공됐지만 실제 한국군에게 지급된 급여는 동일한 전투조건에 받는 미군의 급여보다 훨씬 적은 액수만이 지급됐다. 중간에서 한국정부가 미국정부로부터 한국군의 급여를 수령해 일부만 한국군에게 지급한 것이다. 이 차액은 국가경제건설의 재원으로 활용됐다.

그야말로 한국군 장병들이 피를 흘린 댓가로 달러를 벌어들인 것이다.

박정희 시절 한미관계의 두 번째 큰 획을 그은 사건은 이른바 ‘괌 독트린’으로 알려진 닉슨의 선언이었다. 이 괌 독트린은 “아시아는 아시아 스스로 방위를 책임진다“는 것이 핵심내용이었다.

그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미국은 우방국과의 조약이행을 준수할 것이다. 둘째, 미국은 우방국의 자유가 핵무기에 위협받는다면 핵우산 방어막을 제공한다 셋째, 다른 종류의 침략에 있어 그것이 정당하다고 판단될 때 미국은 우방에 대해 군사적 경제적 지원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위협을 받는 국가는 자신의 방어에 일차적으로 책임을 져야한다는 내용이었다.

요컨대 베트남전쟁을 겪으면서 미국 닉슨정부는 아시아 국가들로 하여금 미국에 지나치게 의존함으로써 자신들이 베트남에서 겪었던 것처럼 갈등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정책을 피하겠다는 선언이었다. 베트남전쟁에서 퇴로를 염두에 둔 미국의 대외정책변화였다.

이에 대해 당시 한국 박정희 정부는 즉각적인 우려를 표명했다. 가장 지배적인 우려는 과연 미국이 한국의 유사시에 강력한 동맹으로 남아있을 것인가에 대한 우려였다.

괌 독트린의 한국적용은 한국에 심각한 안보불안문제를 일으켰다.

실제 1970년 미국은 괌 독트린을 한국에 적용 2만명 규모의 병력을 한국으로부터 철수시킬 예정이었다. 한국은 미국이 과거 이른바 ‘에치슨라인’선언을 해 결국 북한으로 하여금 6.25전쟁 발발의 빌미를 제공한 선례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미군을 빼는 계획에 대해서는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했다.

미국정부는 한국에서의 미군철수 시나리오를 적시한 국가안보결정비망록(National Security Decision Memorandum-NSDM 48)을 발행했다.

한국입장에서는 비무장지대로부터 미군 2개 사단을 철수하는 것은 미국을 자동적으로 개입시키는 ‘인계철선’의 손실을 의미했고 한국인들의 안보불안감은 극에 달했다.

이러한 안보불안은 곧바로 대한민국 스스로 국방물자를 생산하고 군사적인 자립으로 나아가려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미국은 한국이 경제적으로 성장함에 따라 한국 스스로 국방물자를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다양한 정책을 고려했다. 반면에 한국은 미국의 이해나 정책과는 별개로 간혹 갈등을 일으키면서 국방물자 생산의 급속한 확장에 강하게 전념했다. 이에 반해 전반적으로 미국은 한국이 국방예산의 상당부분과 소모성 무기들에 대해 미국에 의존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1968년 4월 경 한국정부는 우선 미국 콜트사가 생산 중인 M-16소총 생산시설을 한국내에 설립하기를 희망했으나 미국 정부는 불허했다가 69년 6월경 미국의 인가하에 M-16소총공장을 한국에 건설하는 것을 승인했다. 그러면서도 미국정부는 한국정부의 방위능력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북한을 공격하는데 사용되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당시 미국의 대한방위정책은 한국측에 소모성 군수물자를 제공하는 것이지 한국의 방위산업을 강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미국정부의 대한방위정책의 변화가 감지됐다. 미군철수계획과 맞물려서 미국은 한국으로 하여금 고속해안초계정, 쾌속정, 헬리콥터,M-48탱크, M-60기관총,지대지미사일,M-16소총 생산을 지원했다. 그러나 전투기생산과 같은 핵심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한국 측의 요구를 승인하지 않았다.

한국정부는 상황적 요구에 따라 때로는 미국과 공동으로, 때로는 한국 독자적으로 방위산업의 광범위한 발전을 추진했다. 한국정부는 이를 위해 ‘국방과학연구소’와 ‘무기개발위원회’ 등 2개의 핵심적인 방위기구를 설립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미국 민주당정부에 의해 추진되던 미군철수정책실행에 따른 전력공백을 우려해 자체적인 핵무기개발에도 비밀리에 착수했다. 이를 위해 프랑스와는 핵연료재처리시설을, 벨기에와는 연료 재처리 연구설비 도입을 논의했다. 그러나 핵재처리시설에 대한 한국과 프랑스간 협상이 진행되다가 1975년 한국의 모든 핵무기 프로그램이 갑자기 취소됐다. 이 결정의 뒷면에는 한국의 핵무기 자체 제조기도에 대한 미국정부의 압박이 엄청나게 작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일 이 때 한국이 핵무기를 자체적으로 제조 운영할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면 그것은 북한보다 훨씬 앞서 한국이 한반도내에서 비대칭전력을 갖게 될 수도 있었다는 의미가 되며 오늘날 북한의 핵무기개발로 인해 야기되고 있는 한반도상황이 어떠한 형태로 전개되었을지는 모를 일이다.

'기부 앤 테이크(give and take)'의 냉혹한 국제정치역학관계 법칙을 비교적 잘 활용했던 뛰어난 협상가 박정희 집권기간 중 한국과 미국과의 관계는 이처럼 팽팽한 긴장과 견제의 연속이었다. 절대 박정희는 미국측이 보았을 때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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