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정통성확보를 위한 몸부림

헌정사에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엄청난 희생을 치르며 불법적으로 권력을 찬탈하고 헌정을 장악한 이들 신군부가 직면한 최대의 과제는 이른바 부당하게 권력을 찬탈한 자신들의 집권과정의 불법성과 권력의 정통성 결여 문제를 여하히 극복할 것인가였다. 바로 전 정권이었던 박정희정권이 집권초기 직면했었던 바로 그 문제가 반복된 것이다.

물론 전두환은 형식적으로는 일정한 요건을 갖추어 권좌에 오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그의 불법적인 권력 찬탈 과정이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 이들 신군부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김영삼 정권에 의해 행해질 때까지 국가기관인 검찰이 내놓았던 그 논리 즉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해괴한 논리는 늘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비겁한 권력집단 대한민국 검찰이 가장 현실에 가까운 고뇌 끝에 내린 법적 의견이었다.

과연 쿠데타가 성공해 서슬퍼런 권력을 가진 이들 신군부에게 그 집권기간 중 그 누가 법적 잣대를 들이댈 수 있다는 말인가.

검찰이란 주어진 제도적 권력 안에서 법을 집행하는 기관에 불과하지 혁명이나 쿠데타를 징계할 수 있는 정치적인 권력기관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 신군부에 대한 법적 판단 또한 그들의 집권기간에는 할 수 없었고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이들 신군부권력자들이 비권력화된 연후에나 가능했던 것이다.

제3군정시대

우리의 현대사의 시작은 미군정으로부터 시작됐다. 

해방정국은 바로 일본 총독부통치에서 미군정에 의한 통치로 교체됐고 해방의 설레임은 아마추어 미군정의 거듭된 정책실패로 무참히 교란됐다. 미군정은 우리 한민족을 일제의 압제로부터 해방시켜준 대가로 철저한 복종을 우리들에게 요구했다.

남측이 미군정치하일 때 북측 또한 소련군정치하였다. 남북공히 외국군에 의해 군정이 실시됐고 그것은 우리 한민족에게 새로운 시련과 기회를 제공했다.

미군정치하에서 미국은 적어도 한반도의 남쪽지역이 자신들의 완벽한 영향력하에 들어가기를 희망했다.

별다른 대책없이 군사적 편의에 의해 그어진 38선 그리고 남과 북을 분할해 통치한 미군정과 소련군정의 입장은 표면적으로는 비슷한 군정이었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판이하게 다른 군정이었다.

자신들이 통치점령하게 될 한반도의 남쪽지역에 대해 거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 하에서 해방군으로 진주해 엄청난 혼란을 야기했던 미군정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소련은 북한지역의 군정을 실시하기 전 치밀한 준비를 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물론 그런 치밀한 준비가 곧 좋은 정치 즉 ‘선정’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이른바 소련군 화차정부(소련군이 진주할 때 진주할 지역의 군정을 실시하기 위해 필요한 인적 물적자원을 한꺼번에 화차에 싣고 들어온다는 취지에서 나온 용어)를 수립하기 위한 초석을 까는 작업이었다.

남측은 미군정의 통치하에 동방의 자유민주주의 전초기지역할을 담당하게 됐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수입된 정치이데올로기가 이 땅에 정착되기까지는 멀고도 험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었다.

5.16 군사혁명을 통해 남한은 제2의 군정시대를 경험했다.

남한지역에서 제1군정이 미군정이었다면 제2군정은 사회혁파를 목표로 일어선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쿠데타군이 만든 군정이었다.

군정의 특징은 일사불란한 명령체계, 그리고 그 명령체계에 바탕을 둔 비교적 효율적인 정책추진이 특징이다. 물론 이러한 군정기간 중 민주주의는 희생이 불가피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세력들에 의한 통치는 표면적으로는 민간정부이지만 그 내실을 들여다보면 그것은 또다른 군정에 다름 아니다.

필자는 이를 제3군정시대(제5공화국의 다른 이름)라고 칭한다.

신군부에 의한 제3군정은 표면적으로는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에 의해 선출된 민간대통령이 통치하는 모양새를 취하였지만 내실은 강력한 군정체제였다.

일사분란한 명령체계와 대통령이라는 야전사령관을 중심으로 한 정책집행은 늘 군작전 하듯이 행해졌다.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핵심세력들은 ‘변형된 박정희식의 경제모델’의 지속적 추진을 희망했다. 정치적 세력들에 의해 행정권력의 일관성있는 정책이 흔들리거나 침해당하는 것을 희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박정희시대와 전두환시대는 시대적인 상황과 여건이 많이 달랐다.

훌쩍 커져버린 민간부문, 복잡한 경제구조, 하루가 다르게 변화를 거듭하는 국제정세 등은 이 제3군정의 핵심주체세력들의 의도대로 되어주질 않았다.

결국 전두환은 취약한 정권의 정통성을 만회하기 위해 최우선적으로 ‘경제안정화시책’에 매달렸다.

당시 전두환은 적어도 ‘경제안정’이라는 뚜렷한 경제목표만큼은 신앙처럼 지키고져 노력했다.

전두환시절 그 많은 경제지표가 결코 우호적이질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임기말년 적어도 물가안정이라는 목표만큼은 확실히 달성한 대통령이라는 칭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취임초기부터 흔들리지 않고 강력하게 추진한 경제안정화 정책의 결실이기도 했다.

전두환 정권의 강한 정부론

전두환정권은 강한 정부를 주창했다. 그 자신 평생 군인의 길을 걸어온 강성이었기에 정치인들의 야합과는 체질적으로 맞질 않았다. 그렇다고 정치를 아애 없앨 수도 없고…

그들이 선택한 것은 ‘강한 정부’ 즉 ‘정치외풍’에 시달리지 않고 정책을 일관되게 끌고 나갈 행정부 중심의 국정운영이었다. 그에게 3권분립원칙은 거추장스러운 외피에 불과했다.

전두환정권 내내 국회는 통법부로서의 기능에 국한되었고 , 국회에서 통과된 각종 법률은 주로 행정부가 발의가 법률이 주를 이루었다.

전두환은 박정희식의 ‘압축성장모델’방식을 답습하지는 않았다. 다만 일종의 ‘관리체제방식의 경제모델’을 따랐다. 성장위주의 경제정책기조를 큰 틀 안에서 유지하되 박정희식과는 다른 모델이었다.

자연 불안정한 정책보다는 우직스러우리만치 한 가지 정책을 밀고 나갔다. 당시 경제수석을 맡았던 김재익에게 "경제는 당신이 대통령이야!"라고 한 말은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곤 한다.

박정희와 비교 경제에 대한 이론과 실무 모든 면에서 전두환은 모자랐지만 철저히 전문가인 경제정책 실무자의 입장을 경청했고 따랐으며 김재익 등 경제각료나 경제수석들에게 상당한 권한을 위임함으로써 정책이 표류하는 것을 방지했다.

원래 민주주의란 다소 비생산적이고 비효율적인 면이 있는 정치시스템이다. 늘 상대가 있고 토론과 설득의 과정이 존재하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고 때로는 기한 내 목표달성이 어려운 경우도 생긴다.

정당정치란 토론정치요 설득, 즉 정치적인 반대세력에 대한 인내를 가지고 설득해야하는 노력이 뒤 따르므로 자연 군정과 같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하는 정치 시스템에는 잘 맞지 않는다.

박정희와 마찬가지로 전두환도 자신의 정책입안과 수행과정에서 비효율을 극도로 경계했고 자연 자신의 명령을 받들어 ‘칼처럼’ 수행할 수 있는 일원적인 명령체계조직인 행정부중심의 정책수행시스템을 선호했다.

물론 행정부내에서도 정책수행에 대한 여러가지 해법이 존재하고 방법론이 있기에 마찰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전두환은 이에 개의칠 않았고 줄곧 자신이 신뢰한 경제정책참모들이 외압에 시달리지 않고 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나갈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줬다.

철권통치와 경제안정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두환정권 내내 정통성시비로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가까스로 무력으로 국내 끓어오르는 민주화열기를 가라앉히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결국 미봉책에 불과한 것으로 영원히 그 민주화열기를 잠재울 수는 없었다.

특히 1980년 봄 불붙기 시작한 민주화의 열망은 철권통치만으로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전두환정권은 바로 이러한 불안한 정치상황을 잠재울 묘책으로 경제안정정책을 선택했다.

분출하는 민주화요구는 경찰과 검찰 안기부 등 권력기관을 총 동원해 억압했다. 심지어 스포츠까지 정치적 민주화의 열기를 식히는데 사용됐다. 전두환 정권기간 중 3‘s 산업 즉 향락산업(Sex) ,영화산업(Screen), 스포츠산업(Sport)이 단구이래 최대 활황기를 맞이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전두환 그 자신이 스포츠광으로 국가지도자의 스포츠에 대한 남다른 관심은 국가적인 관심으로 서서히 전이됐고 역설적으로 전두환 정권시절 한국에서는 국제적인 스포츠경기가 꽃을 피웠다.

그것은 전두환정권의 집권과정의 비합법성과 민주화에 대한 열기와 관심을 보다 비정치적인 분야로 전이시키려는 의도하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됐다.

전두환정권의 철권통치는 결국 숱한 민주화세력의 침묵 혹은 ‘지하화’를 가져왔다. 살아있는 권력에 대항해 싸우기에는 당시 민주화세력의 희생이 너무 컸던 까닭이었다.

철권통치의 전면에는 바로 ‘전두환식 경제안정화정책’이 있었다.

전두환 집권초기 치솟던 소비자물가는 점차 정책의 일관성 때문인지 제자리를 찾아갔다. 더욱이 때마침 국제유가가 안정화되고 이에 따른 국내수출품의 국제경쟁력 강화는 물가안정이라는 환상적인 결과를 전두환 정권에게 가져다줬다.

먹고 사는 문제가 늘 급선무인 민초들에게 전두환정권의 집권과정의 폭력성과 불법성은 이제 점점 국민들의 뇌리 속에 잊혀져 갔고 국민들은 철권통치에 순치돼갔다.

이 시기는 결국 우리 국민들이 ‘민주화’와 ‘경제안정화’라는 두개의 가치를 서로 맞바꾼 시기인 셈이다. 

<다음 호에서 계속…>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