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못난 아빠> 펴낸 유민아빠 김영오

   
▲ 김영오 ⓒ 투데이신문 이경은 기자

오랜 단식으로 인해 기억력 떨어져… 서서히 회복 중
작년, 성실함 인정받아 정규직 전환… 아빠노릇 꿈 물거품
단식 이후, 회복치료 받으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외쳐
정치할 생각 없다… 정치판 가면 깨끗하게 싸울 수 없어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기억력이 안 좋아져서요. 대답을 잘 못하더라도 이해해주세요”

칼바람이 불어 추위가 뼛속까지 스며드는 지난 1일, 광화문광장에서 우리에게는 ‘유민 아빠’로 기억되는 사람, 김영오 씨를 만났다.

인터뷰를 시작하기 전, 그는 오랜 단식으로 인해 뇌세포가 죽어 기억력이 낮아졌다고 했다. 점점 나아지고 있지만 일상 대화를 할 때 가끔 생각이 안 나서 답답하다고 했다. 그래서 기자에게 미안함을 전했다. 수줍고 겸손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유민 아빠의 공간, 광화문광장 한 쪽에 있는 천막 안에서 인터뷰가 시작됐다.

김영오 씨는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원회에서 활동하다가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외치며 7월 14일부터 단식에 들어갔다. 무려 46일 간 단식을 이어가다가 건강악화로 단식을 중단하게 됐다. 목숨을 걸고 단식을 이어간 그에게 악성 루머와 악의적인 소문이 쏟아졌다. 이혼 후 딸들을 적극적으로 돌보지 않았다, 딸과의 관계가 소원했다, 양육비를 한 푼도 보내지 않았다, 돈이 없다면서 고급 취미를 즐긴다 등…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결국 8월 26일, 그는 악성 루머와 보도에 대해 통장사본과 카카오톡 메시지 등을 공개하며 악성 루머에 대반격에 나섰다. 2013년 12월부터 올해 4월까지의 통장사본을 공개하며 매달 20만~30만 원의 양육비와 두 딸의 보험료, 휴대전화 비용을 낸 것을 보여줬다. 또 일각에서 ‘고급 취미’라고 비난한 국궁의 월회비가 3만 원임을 밝히며 고급 취미라는 비난을 일축했다.

그리고 지난달 30일, 자신을 못난 아비라고 말하는 그가 <못난 아빠>라는 책을 출간했다. 자신의 삶을 발가벗긴 세상에 내놓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비난받는 가족을 위해, 안전한 사회를 위해,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용기를 냈다. 정치하려고 저러는 것 아니냐는 비난도 있지만 개의치 않는다. 책을 낸 이유는 오직 하나. 사랑하는 딸 유민이의 못난 아빠이기 때문이다.

그는 1970년, 전북 정읍시 이평면 천태산 자락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춘기 시절에 학업을 포기하고 가출해 약 3년 간 방황의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중졸 학력이라 막노동 등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갔다. 20대 후반에 시작한 사업은 그에게 빚만 안겼고 빚을 갚기 위해 일만 하며 살았다. 그러다가 지난해, 비정규직으로 들어갔던 회사에서 성실함을 인정받아 처음으로 정규직 사원이 됐다. 하지만 올해 4월 16일, 사랑하는 딸 유민이를 잃어 아빠 노릇을 해보겠다는 꿈은 무너져내렸다. 그는 단식 이후 회복치료를 받으면서 현재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방지를 외치고 있다.

꿈많은 아이들이 바다 속으로 사라져갔던 4월 16일, 아직도 김영오 씨는 차가운 바다에서 아스러져간 유민이를 떠올리며 아파하고 있지만 힘을 내고 있다. 세상에 소리치기 위해서다.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 달라고,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 알고 싶다고, 진실을 밝혀달라고….

광화문광장에 있는 천막 내부는 간신히 바람만 막은 듯 몹시 추웠다. 그와 기자가 처음 들어선 천막 안은 냉기로 가득했지만, 인터뷰가 이어지자 어느새 뜨거움이 내부를 훈훈하게 데웠다.

   
▲ 김영오 ⓒ 투데이신문 이경은 기자

◆ 유민이에게 미안해서… 책으로 고백하다

Q. <못난 아빠>라는 책을 쓰게 된 계기가 궁금하다
: 내가 단식하다가 병원에 실려갔는데 입원하고 난 후 신상털기가 심해졌다. 보수 언론을 비롯해 많은 이들이 나에 대한 신상을 많이 털었다. 증거자료도 제시했지만 일부 언론이 이것을 기사화해주지 않았다. 나를 응원해주던 분들 마저도 ‘김영오라는 사람이 진짜 그런 사람이야?’라고 얘기했다. 내가 어떻게 산 사람인지 알리고 싶었다. 또 정치성향이 없고 나쁜 아빠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 책을 읽으면 사람들이 나를 이해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Q. 본인과 가족에 대한 말도 안 되는 루머, 억측 때문에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 억울한 것을 말로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나.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다. 병원에서 나온 다음에 머리를 감는데 머리카락이 많이 빠지더라. 원래 머리숱도 엄청 많았는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서 머리가 빠진 것 같다.

Q. 유민 양의 동생인 유나 양도 아빠에 대해 안 좋은 소문이 돌아 마음 고생이 심했다고 들었다
: 유나도 자꾸 신상털리고 나서부터 주변에 기자들이 몰리니까 학교를 갈 시간에 못 가고 피했다가 9시에 등교하기도 했다. 마음이 아팠다.

Q. 유나 양이 책이 나온 것을 보고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도 궁금하다
: 엄청 좋아했다. 아빠 보고 자랑스럽다고 하더라.

Q. 단식을 했을 때의 어려움이 책에 고스란히 담겨있더라. 그 때의 심경을 말씀해달라
: 단식할 때는 육체적으로 엄청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때마다 유민이 생각하면서 고통을 참았다. 단식 끝나고 난 후 신상털이와 비난도 힘들었다. 무엇보다 유민이 욕을 하는 것이 참기 힘들더라.

Q. 책을 낼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 나와 우리 가족에 대한 온갖 루머가 떠돌 때가 있었다. 그때 정청래 의원이 책을 써서 오해를 푸는 게 낫지 않겠냐고 하더라. 그렇지만 책을 써서 잘못되면 오히려 더 욕먹을 수도 있지 않나. 걱정을 했더니 정 의원은 “있는 그대로 진실을 쓰라”고 했다.

나한테 모든 증거자료가 다 있기 때문에 오해를 푸는 것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양육비를 안 줬다’는 말이 있어 은행에 가서 2003년부터 지금까지 보내준 서류를 떼서 봤다. 나도 얼마 안 되는 줄 알았는데 보니까 몇 천만원이더라. 이런 것들을 책에 녹여냈다. 또 단식을 하면서 매일 페이스북에 일기를 썼는데 그 일기와 더불어 내가 과거에 어떻게 살았고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내용을 넣었다.

Q. 그렇다면 이 책은 얼마 만에 완성한 것인가
: 나에 대한 음해가 시작됐을 때부터 시작해서 한 달 정도 걸렸다. 병원에서 할 일이 없어서 계속 글을 썼다. 페이스북에 써둔 일기가 있어서 좀 더 쉽게 썼던 것 같다.

Q. 단식하면서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 어떤 힘으로 버텼나
: 나는 워낙 깡이 있고 완전 소고집이다. 어머니도 말리지 못한다. (웃음) 하나를 딱 결정하면 이뤄질 때까지 하는 성향이 있다. 힘들 때마다 우리 유민이만 생각했다.

유민이만 생각하면 배가 뒤집어지고 그 안으로 물이 막 차오르는 장면이 떠오른다. 배 속에서 아이들이 얼마나 무서웠겠나. 내 자식이 그 공포를 버티고 있었는데 아비가 돼서 굶는 것을 못 버틴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 장면을 생각하니 참을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내가 부유하게 살았더라면 단식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가난에 찌들고 힘든 생활을 해봤기 때문에 가능했다. 또 유민이한테 사주고 싶은 것도 못 사주고…. 못 해준 게 너무 많았다는 것을 떠올리며 단식에 임했다.

Q. 유민이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책 제목을 <못난 아빠>라고 지은 것인가
: 그렇다.

Q. 유민 양은 어떤 딸이었나. 책을 보면 성실하고 착한 아이였던 것 같다
: 누군가가 “너 이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어”라고 하면 유민이는 하루고 이틀이고 계속 그 자리에 앉아 있을 아이다. 그렇게 말을 잘 듣는다. 만약 다른 아이들이 나가자고 했어도 “선생님이 앉아 있으라고 했잖아”라며 자리를 지켰을 것이다.

예전에 유민이가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핸드폰을 사준 적이 있었다. 당시 2만 9천원짜리 요금제를 쓰게 했는데 내게 와서 “아빠, 돈 없어서 힘들잖아. 1만 9천원짜리 요금제 제일 싼 걸로 바꿔줘요”라고 말했었다. 물론 나는 “친구들이랑 마음껏 문자하고 통화해”라며 결국 바꿔주진 않았다. 또 용돈을 주면 십 원도 안 쓰던 착한 아이였다.

   
▲ 김영오 ⓒ 투데이신문 이경은 기자

◆ 일부 언론, 세월호 관련 진실보도 안 해

Q. 책을 보니 ‘자고 일어나니까 유명해졌다는 말’을 실감했다고 나와있더라. 의도하지 않게 유명세를 타게 됐는데 부담스럽고 싫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 엄청 부담스러웠다. 나는 유명세 얻으려고 단식을 시작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단식을 3일만 하면 특별법 통과가 될 줄 알고 시작했던 것이었다. 내가 단식을 오래 하니까 ‘유민아빠 죽는다’라며 국민들이 흥분했고 이에 정부는 신상털기로 나를 매도시킨 게 아닐까 싶다. 정부에서 이번 참사의 진상규명 등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다 보니 의도치 않게 내가 어느 순간 유명인이 된 것이다. 길을 지나가면 나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 밥을 먹으러 식당도 제대로 못 간다.

Q. 단식으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했을 때보다 살이 좀 오른 것 같다. 건강상태는 어떤가
: 단식 당시 46kg대였는데 지금은 55kg까지 나간다. 다만 기억력이 좀 떨어졌다. 또 아직 소화를 제대로 못 시켜서 하루에 밥은 아침, 저녁 두 끼만 먹고 있다.

Q. 일부 언론에서 김영오 씨에 대해 비난을 쏟아내기도 하고 근거없는 유언비어를 퍼트리기도 했다. 언론에 대한 원망도 있을 듯하다
: 세월호 참사가 발생하고 단식을 하면서 언론에 대해 많이 알게 됐다. 언론이 진실을 보도했으면 정부가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에 대해 늑장을 부리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 내보내줬으면 특별법은 7월 16일에 벌써 통과가 됐을 것이다. 그런데 언론이 정부에 대한 말만 써주고 유가족이나 국민이 원하는 말은 안 써주더라. 그러다 보니 국민들도 지친 것 같다.

◆ 단식하며 SNS로 세상과 소통하다

Q. 단식을 할 때, 한 사회복지사의 권유로 페이스북에 글을 쓰게 됐다고 들었다
: 사실, 페이스북이라는 것을 어떻게 하는지도 몰랐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사회복지사가 지금 단식하고 있는 것을 국민에게 알리고 싶으면 페이스북을 하라더라. 그래서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반응이 없었다. 처음에는 하루 방문자수가 2~10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100명이 넘어가고 1000명이 넘어가고 32일째 되는 날은 230만 명까지 방문해주셨다. SNS의 위력을 다시 한번 느꼈다. 어쨌든 많은 분들이 관심가져 주셔서 페이스북에 일기를 쓰게 됐다. 언제부터인가 글이 올라오기를 기다리는 분들도 있었다.

Q. 당시 많은 시민분들의 응원이 있어 큰 힘이 됐을 것 같다
: 그렇다. 일반 시민분들의 응원이 참 많은 힘이 됐다. 만약 유가족만 끝까지 단식했으면 이렇게까지 못했을 것이다. 내가 단식할 때 제주도에서 비행기 타고 온 분도 있었고 부산, 경남 하천 등 멀리서 찾아와주시는 분들이 정말 많았다. 그래서 힘을 낼 수 있었고 쓰러질 수 없었다. 시민들이 나를 위해 멀리서 기차타고, 비행기타고 단식장에 와주시는데 내가 쓰러지면 안 된다고 생각해 끝까지 버텼다.

Q. 책을 보면 단식 이후 동부병원에 입원했을 때 국정원으로 추정되는 남성이 따라붙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당시 상황을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 당시 국정원 직원이 내 담당 주치의였던 이보라 선생한테 와서 몇 가지를 물어보고 갔다는 소리를 들었다. 또 원장한테 가서 이보라 선생이 어떻게 해서 내 주치의가 됐는지 물었다고 하더라.

Q. 사찰 당한 것을 밝히기 위해 법원에 증거보전도 신청한 것으로 알고 있다. 국정원 직원인지 아닌지 밝혀지진 않아 단언하기는 어렵지만, 어쨌든 누군가가 감시하고 쫓아다니는 것을 느낀 건가
: 그렇다. 사찰 당하고 있는 것을 항상 느꼈다. 4월 16일부터 사찰을 당한 것 같다. 참사가 발생한 이후 정보요원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팽목항, 진도 실내체육관에 깔려 있었다.

지난 국정감사에서 안전행정부 소속 정청래 의원이 경찰청으로부터 받은 자료를 보면 세월호 유가족의 동향을 알아보기 위해 지난 4월 16일부터 8월 8일까지 투입한 정보경찰 누적인원이 1055명이라고 하더라. 불법사찰을 위해 동원된 경찰이 1055명인 것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유가족들은 항상 뒤와 옆을 돌아보며 다녔다. 그 정도로 의심을 했다.

Q. 왜 그렇게까지 했을 것이라고 보나
: 우리가 묻고 싶은 부분이다. 왜 따라다녀야 하나, 이유가 뭐냐, 우리는 그냥 진상을 밝혀달라고 외친 것 뿐이었는데 말이다.

   
▲ 김영오 ⓒ 투데이신문 이경은 기자

◆ 정치할 생각은… ‘없다’

Q. 책을 통해 ‘정치는 안 할 것이다’라고 밝혔지만 일각에서는 ‘정치하려고 저러는 것 아니냐’고 삐딱하게 바라보기도 하는데
: 정치의 ‘정’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보고 정치로 나가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뭐, 정치인으로 키워준다면 고맙다. (웃음) 그러나 나는 정치할 생각이 없다. 내가 만약 지금 정치판에 뛰어들면 나도 저 사람들과 똑같아지는 것이다. 그래서 정치하는 게 싫다. 여기서 깨끗하게 싸우는 것처럼 정치판에 가서 깨끗하게 싸울 수 있다면 가겠는데 안 된다는 것을 알았다.

Q. 세월호 참사 전에는 사회에 대해 무관심했고 정치도 몰랐다고 하셨다. 그런데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던데
: 참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받았다. 일반 시민을 비롯해 시민단체, 과거 참사 당했던 분들까지 큰 도움을 주셔서 감사했다. 그런 분들한테 보답을 하는 것은 내가 다시 봉사자로 나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회에 갚고 싶다. 어찌보면 우리 유민이가 이런 눈을 뜨게 해준 것이다. 앞으로 대한민국에 어려움이 닥칠 때 그들과 함께 외치고 촛불도 들어주고 힘을 실어줄 것이다.

Q. 지난달 7일, 세월호 특별법이 본회의를 통과했다. 이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어차피 세월호 특별법은 이미 본회의 통과가 됐지만 본회의 통과보다 중요한 것이 시행령이다. 그 다음 진상조사위원회 구성이 어떤 사람인지가 중요하다. 여당 성향도 아니고 야당 성향도 아닌, 철저하게 진상만 규명할 중립적인 인사가 돼야 한다.

광화문광장에서 텐트를 안 빼는 이유 역시 이걸 빼버리면 여야가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물에 물 탄듯 해버릴까봐서다. 시행령이 제대로 되는지, 진상조사위원회에 중립적인 인사가 제대로 심어지는지 등을 지켜보고자 남아있는 것이다. 제대로 이뤄지지 않을 경우 다시 일어날 것이다. 정치인들에게 바라는 점은 유가족이 나서지 않고 편안하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알아서 해달라는 것이다. 지금 얼마나 춥나. 세월호 유가족들이 하루 빨리 집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해줬으면 한다.

또 이준석 선장에게는 징역 36년이 선고됐고 살인죄는 무죄로 판결이 났다. 승객들이 죽을 것을 알면서 가만히 있으라고 말한 것에 대해 살인죄가 적용되지 않은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진실을 은폐하지 말고 관련 책임자 처벌이 확실하게 이뤄져야 한다고 본다.

Q. 시복미사 때 프란치스코 교황과 만난 것이 인상깊었다. 당시 심정이나 소감이 어땠는지 궁금하다
: 시복미사 때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주셔서 참 감사하고 도움이 많이 됐다. 수구언론이 진실한 보도를 안 해주는데 교황님을 만나면 전 세계 언론에 알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교황님을 만나게 돼서 세계에 세월호 참사의 진상이 알려지게 돼서 감사했다. 우리나라 언론은 도저히 못 믿으니까 (교황과의 만남을 통해) 세계 언론이 ‘세월호’를 다루면 정부가 압박받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래서 교황님을 만나고 싶었는데 만나주셔서 정말 고마웠다.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지금 와서 보면 전 세계 언론이 알고 있음에도 변함이 전혀 없다는 것. 이것이 어마어마하게 속상하다.

Q. 세월호 유가족이 교황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은 정부가 유가족의 말을 들어주지 않고 진상규명의 의지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 박근혜 대통령이 5월에 유가족과 면담하면서 언제든 찾아오라고 했고 담화문을 통해 유가족이 원하는 대로 해준다고 하지 않았나. 처음에는 ‘내 잘못이다’라고 해놓고 나중에는 ‘대통령 소관이 아니다’라고 하고 국회에 들어갈 때 유가족 쳐다봐주지도 않았다. 나는 뭐라고 판단을 못하겠다. 이런 상황에 대해 국민들이 판단해주기를 바라고 있다.

Q. 언론에 대한 불신도 많이 생긴 것 같다
: 그렇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지금은 ‘보수 진영일까, 진보 진영일까’라고 생각한다. 이게 먼저 생각이 들 정도로, 아무리 우리나라 언론이 정부 편에 서 있는 언론이 많다고 하지만 세월호 참사를 실어주고 진실하게 보도하는 언론사도 많다고 생각한다. 진실을 제대로 보도하는 언론인들이 있기에 희망이 보인다.

Q. 날씨가 점점 추워지고 있다. 언제까지 광화문광장을 지킬 것인가
: 정부는 우리에게 믿음과 신뢰를 주지 않았다. 여당은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은폐하려고 했고 야당은 그것을 멀리서 불구경한 것과 다름없다. 여당과 야당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광화문을 지키는 것이다. 빨리 해결해 집에 가고 싶다.

Q. 세월호 유가족 대책위원회의 계획이 궁금하다
: 일단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알려면 배를 먼저 봐야 한다. 배 내부를 보는 것을 시작으로 차근차근 진상을 밝혀야 한다. 또 앞으로 해야 할 일은 정부가 무언가를 밝히지 않고 덮을 때를 대비해 유가족들이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예를 들면 정부에서 잘못하고 있다면 우리가 제시해주고 증인이 안 나오면 나오게끔 할 것이다. 판단이 안 될 때는 일어날 것이고 압력을 가할 것이다. 여기서 압력은 진실을 밝히기 위한 압력을 말한다.

Q. 세월호 특별법을 두고 일각에서는 유가족이 특별법을 말하면서 특혜나 보상을 요구하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 이에 대한 입장이 듣고 싶다
: 세월호 특별법은 유가족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다. 세월호 특별법에 ‘세월호’라는 이름이 들어가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것 같다. 원래는 안전한 나라 만들자는 것이 특별법의 목적이다. 내가 종종 지방으로 간담회를 간다. 그 이유는 이 부분을 설명하기 위해서다. 또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참사가 왜 벌어졌는지 파악하고 재발방지를 위해 움직이고 있다. 결국, 세월호 특별법의 제정 목적은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이다. 유가족하고 변호사 등 몇백 명이 모여서 몇 달 동안 머리를 짜내며 만들었다.

나 역시 지금까지 받은 것 없는데 돈을 받았다는 유언비어가 나돌고 있다. 페이스북 댓글 등을 보면 ‘5억 받았다’, ‘10억을 받았다’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심지어 누군가는 나보고 47억을 받았다고 하더라. 참 속상하다.

Q. 앞으로 바라는 점은 무엇인가
: 앞으로 저희가 계획은 진상규명이 철저하게 이뤄지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것이다. 안전한 나라 될 때까지 끝까지 지켜볼 것이다.

Q. 끝으로 국민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 중·고등학생, 특히 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이번 세월호 참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져줬다. 아마 또래 친구이기 때문에 더 관심이 가나보다. 세월호 특별법이 제정됐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 국민 여러분도 힘들겠지만 지치지 마시고 끝까지 도와달라. 안전한 나라를 만드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다.

   
▲ 김영오 ⓒ 투데이신문 이경은 기자

…“유민이는 참 기특한 딸입니다. 그리고 저는 참 못난 아비입니다. 주말에 유민이를 만났다고 해도 세월호가 침몰하지 않는 건 아니었겠죠. 아니죠, 저와 장난치다가 발목이라도 다쳐서 수학여행을 못 가게 됐다면 죽지는 않았겠죠. 부질없는 생각만 해봅니다. 마지막 한 번이라도 더 볼 수 있는 기회를 제 스스로 차버렸습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못난 아비입니다”

…“누구보다 갈등이 생기는 것을 싫어하고, 갈등이 생기면 꾹 참는 게 제 성격입니다. 화가 나도 웬만하면 참는 편이죠. 어떤 일이든 원만하게 해결되기만을 바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맨 앞에 서게 됐습니다. 아직 진상 규명이나 책임자 처벌은 제대로 시작도 못했고, 저는 그 싸움을 피하고 싶지 않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아이의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단원고 2학년 학생이었던 유민이의 아빠이기 때문입니다.”

…“아빠, 난 뭐 하면 좋을까?”
“너 수학 좋아하잖아. 그쪽으로 알아보는 건 어때?”
그리고 한 달 뒤 유민이는 세월호를 탔습니다.

-<못난 아빠>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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