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2002년 한국대통령 평가위원회에서 분야별 역대대통령에 대한 평가를 내린 바 있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등 6명 대통령 중 전두환 대통령은 종합순위 5위를 기록했다. 특히 이 평가에서 전두환 대통령에 대해 국민들은 민주성과 도덕성 부분에 있어서 그를 매우 혹독하게 평가했다.

그의 재임기간 중 실시된 일련의 정책들 즉 교복자율화 정책이나, 통행금지 해제 등은 당시 많은 국민들에게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86아시안게임이나 88올림픽게임의 유치 등도 비교적 호평을 받았던 정책들이었다. 그러나 그의 집권과정의 정통성 부족은 국민의 폭넓은 지지기반을 가질 수 없는 태생적인 이유가 되었다.

그는 정통성 시비와 이에 항거하는 민주화 항쟁에 대해 무지비한 제제를 가했고 국민들은 그의 집권기간 중 행하여진 전두환식 공포정치 속에 제대로 비판적인 의견을 표출할 기회를 봉쇄당했다.

그에 대한 여론은 집권기간 내내 매우 차가웠다.

한국정치 속에서 국가지도자의 퍼스널리티(personality)와 역량은 매우 중요하다. 대통령에게 부여된 막강한 권한은 그가 국민을 위해 선정을 행할 때 비로소 그 빛을 발휘한다. 그러나 권력의 위임자인 국민을 무시하고, 짓밟으며 강권으로 그 권력을 행사하려 할 때 당장은 국민들을 참고 인내하지만 결국 권력을 부여한 그 국민들에 의해 그는 권좌에서 축출되거나 퇴임 후 혹독한 시련과 평가에 직면해야만 한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분명 국민에게 있고 권력은 바로 그 국민들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전두환 대통령 퇴임 후 진행된 이른바 5공 청문회를 통해 그는 혹독한 국민의 질책을 받았고 그의 측근들이 구속되었는가 하면 그 자신 그의 부인 이순자 여사와 함께 한국 현대정치사상 초유의 유배생활과 같은 ‘백담사행’을 한 동안 해야만 했던 것은 그 당시 그의 부당한 집권과정과 권력행사에 대한 국민적인 정서를 나타낸 것이라 볼 수 있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그의 폭압적인 진압과정 등 국민들의 민주화 열기를 폭압으로 제압하고, 수많은 국민들의 피의 희생을 낳게 한 행위는 그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우리사회 일각에서는 아직까지도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폄훼와 왜곡을 일삼는 세력들이 엄연히 존재한다. 그들은 아직도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공식적인 명칭대신 구태어 ‘광주사태’란 표현을 고집하기도 한다. 이들 입장에서는 광주민주화항쟁은 폭도들의 난동이나 체제불순세력들의 불순한 폭동정도로 애써 깎아 내리려는 의식이 잠재해 있는 듯하다. 그들에게 대한민국은 자신들만이 애국심과 정통성을 주장할 자격이 있는 선민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대단히 잘못된 시각이다. 이들은 전라도사람들을 ‘불온한 땅’에 사는 잠재적인 폭도정도로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 좁은 땅에서 그렇게 이들은 한 민족을 편 가른다. 참으로 가련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ugly Korean들이다. 한반도 밖 외국인들의 시각에서 바라보면 이 좁은 땅과 이 위에서 사는 이들이 모두 같은 ‘Korea’요 ‘Korean’들로 보이는데 말이다. 심지어 이 세계 많은 이들이 북한사람과 한국사람 조차 구분하지 않고 모두 ‘Korean’이라고 부르는데 말이다.

1980년대 당시 필자 또한 당시 학생의 신분으로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객관적이고도 상세한 정보를 접할 수 없었다. 당시 ‘광주’관련 모든 정보는 신군부로 대표되는 정부에 의해 엄격히 통제된 상황이었고 간간이 비공식적인 채널을 통해 입수되는 유언비어 수준의 정보를 접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당시에는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모든 정보가 언론보도를 통해서는 거의 ‘실체적 진실’을 알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필자가 1981년 서울대학에 입학을 해보니 학내 분위기는 그야말로 ‘폭풍전야’ 같았다. 당시 교정에는 늘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불만과 폭정에 대한 항거분위기가 대학전체를 휩싸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연일 학내에서는 살인마 전두환 정권을 타도하자는 대자보가 비밀스레 나붙었고 교직원들이나 학내상주하고 있던 사복경찰들이 대자보를 부착하거나 학내 데모를 주동하는 주동자를 색출하기 위해 쫓고 쫓기는 숨바꼭질이 계속되곤 했었다. 당시 대학은 거대한 용광로같이 부글부글 끊고 있었다.

이제 30여년이 지나 역대정권의 부국강병정책을 분석하고 그 시대를 회고하며 전두환 편을 집필하며 필자는 비로소 객관적인 시각으로 그 시대의 참상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국회도서관 그 방대한 서고를 뒤지며 찾아낸 그 시절 아픈 역사적인 기록들을 도저히 폭정에 대한 분노와 희생자들에 대한 눈물 없인 볼 수 없었다. 아무리 상황논리가 지배하는 정치라지만 같은 동족 같은 국민에 대해 어떻게 그토록 잔인하고 폭력적으로 대할 수 있었을까.어떻게 그런 그를 국민들은 대한민국의 국가지도자로 8년 동안이나 받아들였을까.

아니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당시 대한민국 국민들에게는 당시 별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듯하다. 총구를 들이대고 최규하 대통령과 각료들을 겁박하며 정권을 찬탈하고, 군의 명령계통을 깡그리 무시한 채 자신의 상관인 계엄사령관을 당시 엄연히 헌법상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재가도 득하지 아니한 채 불법으로 체포 감금하는 등 하극상을 연출하고, 권력장악을 위한 치밀한 시나리오를 통해 합법을 가장한 불법쿠데타를 통해 대통령이라는 최고 권력의 자리를 움켜쥔 그에게 국민들은 숨죽이며 그의 등장을 그저 관객으로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던 영화같은 현실이 당시 전개됐었기 때문이다.

그는 집권기간 중 김대중 사면, 한강개발사업, 88고속도로와 중부고속도로의 건설, 부실기업정리, 수입 및 자본자유화 등 혁신적인 조치를 전개해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사망 후 전게된 권력의 공백기를 재빠르게 채우고 오랜 기간 ‘박정희식 독재정치’가 심어놓은 ‘타율적인 안정감’을 ‘전두환식 공포정치’로 대치하는데 그는 표면적으로는 성공했다.

전두환식의 공포정치는 그러나 ‘진정한 의미의 부국강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국민을 볼모로 공포정치를 펼치며 국민들로부터 참다운 지지를 이끌어 낸다는 것은 난센스다. 국민적 지지가 없는 부국강병 정책이란 사상누각이며 모래성 같은 것이다.

겉보기에 철옹성 같아 보이는 대부분의 독재정치나 공포정치의 최후는 비슷하다. 언젠가는 국민적 자각과 분노가 촉발되고 결국 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것이다. 반복적으로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현재 3대째 봉건적인 권력세습을 통해 공포정치를 이어가고 있는 북한정치체제도 마찬가지 운명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전두환은 정의사회구현을 명분으로 ‘삼청교육대’를 만들어 사회적 부적응자, 부랑아, 패륜아 등을 그야말로 빗자루로 청소하듯 쓸어 담아 군부대내 삼청교육대에서 가혹한 ‘인간개조 교화훈련’을 실시했다. 그곳에는 인권이란 ‘사치’스러운 수식어였고, 그야말로 최근 인권유린의 대명사인 북한의 정치범수용소 못지않은 ‘지상지옥’을 연출했다. 지금으로부터 불과 30여년 전 이 땅에서 벌어진 일들이다.

전두환식 정의사회구현 정책구호는 기실 자신의 집권과정의 반민주성과 폭력성을 은폐하기 위한 전두환식 공포정치의 시작이었다. 당시 삼청교육대 관련 기록을 면밀히 검토해 보면 삼청교육대 입소자 중에는 ‘이유없이’, ‘까닭없이’ 어느 날 갑자기 끌려가 온갖 반인륜적인 처우를 받다가 비참하게 숨을 거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식’으로 멀쩡한 시민들이 수도 없이 끌려가 전두환식 공포정치의 희생양이 되어야만 했다.

“말 안 들으면 언젠간 당신도 저렇게 될 수 있다”는 전두환 정권이 들려주는 그 무언의 무시무시한 시그널, 그 브레이크없는 권력의 횡포에 대부분의 국민들은 애써 침묵하였고 내 집안 내 새끼나 열심히 챙기는 ‘순치된 국민’이 되어 갔다. 반면 부당한 전두환식 공포정치 권력에 항거하는 소수의 인사들은 때로는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혹독한 시련기를 맞이해야만 했다.

8년간 온 국민들이 오금을 펴지 못하게 하며 나는 새도 떨어뜨린 전두환식 공포정치도 권력의 말기가 다가옴에 따라 사회 이 곳 저 곳에서 파열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박종철 고문살해사건, 권인숙 성고문사건 등 전두환식 공포정치의 말초단위에서 자행된 반인륜적인 인권유린사건은 당시 권력중심부에까지 그 파장이 미쳤다. 거기에 장영자-이철 사건, 대통령 친인척 부정비리사건과 같은 권력형비리사건이 더해져 국민들의 정권에 대한 분노는 그 비등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최근까지도 일부 우리 국민들 사이에는 전두환 시절이 좋았다고 회고하는 이들도 꽤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사람은 그저 확 잡아족쳐야 따라 온다는 일본인들에 의해 교묘히 각인된 ‘엽전근성’, ‘노예근성’론자들이 적지 않다.

이들은 삼청교육대도 당시 상황 하에서는 ‘필요악’이었다고 미화해 주장하곤 한다.
특히 전두환 시절을 찬양하는 이들은 전두환의 ‘보스주의 인성론’을 전면에 내세우곤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급작스러운 유고로 촉발됐던 당시의 국가적인 대혼란을 수습하려면 전두환과 같은 카리스마를 가진 강력한 국가지도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며 그였기 때문에 당시 국가적인 혼란을 비교적 원만히 수습하고 국가발전의 초석을 닦았다는 주장이다.

전두환이 10.26이후 혼란상황에서 12.12 하극상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나, 경제성장과 안정의 기로에 서 과감히 안정기조를 택하고 밀어부친 점, 고집스러울 정도로 물가안정을 추진한 것 등은 전두환의 비범한 결단력을 보여주고 있음은 분명하다.

부하와의 관계에서 그가 보여준 절대적인 ‘보스기질’이 장세동과 같은 전두환에 대한 무한 충성을 하는 현대판 ’생육신’을 만든 대목에서 권력의 세계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배반’에 눈살 찌푸리는 우리 국민들은 아주 높은 점수를 주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 측근들의 전두환에 대한 ‘충성’과 ‘생육신’이 된 것이 ‘국가’와 ‘국민’ 그리고 장구한 ‘민족역사’를 향한 것이 아닌 ‘개인’을 향한 것일 때 얼마나 그 패악이 큰 것인지 예리한 눈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다.

계엄해제를 요구하는 국민을 총칼로 도륙하고 권력을 찬탈한 부당한 정권과 권력에 대한 ‘충성’과 ‘생육신’적인 ‘충신화’는 ‘대한민국과 그 역사 그리고 국민들’에 대한 ‘충성’과는 아무런 연계성을 가진 것이 아니며 그들만의 리그 속에 굳건한 결속력을 다진 ‘오야봉’과 ‘꼬봉’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역사의 무대 속에 갑작스레 이 그 기회를 잡은 특정 이해집단의 ‘보스’와의 ‘의리’나 ‘이해관계’로 당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굳건한 결사체 의식‘정도로 보는 것이 보다 정확한 시각이라고 볼 것이다.

필자가 이렇듯 혹평하는 이유는 그들이 집권기간 내내 그리고 그 이후 그들이 보인 각종 행태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들 집단은 권력기간 중 그리고 권력의 언저리를 떠난 이후에도 결코 대한민국의 역사와 국민을 위해 ‘멸사봉공’을 했다는 흔적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네들은 집권기간 중 권력을 이용 천문학적인 규모의 부당한 축재를 하고, 그것을 숨기기 위해 온갖 편법과 불법을 동원해 이 축재한 재산을 숨기기 위해 온갖 해괴한 짓을 서슴지 않은 것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김영삼 정권에 의해 12.12 군사쿠데타에 대한 사법적인 단죄가 내려지고 난 이후 그들의 행태를 보면 더더욱 가관이다. 심지어 내란죄 가담자들에 대한 법원의 훈장과 서훈취소 반납명령과 군인연금자격박탈 결정에 대해 최근까지도 그 의무를 해태하거나 불복하고 심지어는 군인연금을 지급해 달라는 민사소송을 제기했다는 소식도 들리고 있어 참 듣는 이들로 하여금 씁쓸한 감회를 가지게 한다.

전두환시절에 대한 향수를 가지는 것은 자유로운 사상을 허용하는 대한민국 헌법체제하에서는 그 개인의 자유일 것이나 한번쯤 자신 스스로 어느 수준의 역사인식을 가지고 있는가는 자문해볼 필요가 있다 하겠다. 전두환 시절을 그리는 이들이 누리는 오늘날의 ‘민주주의’와 ‘자유’는 바로 당시 그 자유를 쟁취하기 위해 스러져간 숱한 민주화 인사들과 권력에 의해 핍박받던 이들의 피로 얻어진 것임을 깨달아야한다.

과거 이명박 대통령이 후보시절 자신이 현대건설에서 땀을 흘릴 때 민주화 인사들이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는 망발에 가까운 한심한 표현을 하기도 해 숱한 이들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그런 이를 2007년 우리는 대한민국의 17대 대통령으로 뽑는 참으로 어리석은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리고 또 후회하고 말이다.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1980년~1981년은 한국경제가 20년 만에 최악의 상황에 빠졌던 기간이었다. 그가 인기없는 안정화정책을 고집스럽게 끌고 간 점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당시 한국사회 내 폭발하는 민주화열기를 잠재워가며, 각 이해당사자들의 욕구를 짓누르고 임금동결, 쌀 수매가 인상억제, 금융긴축정책 등을 밀고 나감으로써 노동자, 농민, 기업인들의 불만을 촉발케 하였지만 안정기조를 굳굳히 유지해나간 것은 전두환식 권위주의체제하였기에 가능했던 일들이었다. 그가 경제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도 인정해야한다.

특히 고도의 인위적인 조작의 결과이긴 하였지만 분출하는 민주화열기를 일거에 잠재운 후임 노태우 당시 민정당 후보의 6.29 선언 전격수용조치와 연이은 권력의 평화적인 교체노력은 그에 대한 숱한 혹평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우리 역사에 남긴 엄청난 과오에 대해서는 제아무리 화려한 수식어로 그의 업적을 포장하려한들 결코 지워지지 않을 듯하다. 역사라는 무대에서 ‘악역’을 한 주연급 연기자들의 이름은 천년을 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지도자나 정치지도자들은 늘 역사를 두렵게 생각해야한다. 자칫 자신대에 저질러진 그릇된 행동으로 인한 오명이 자손만대에 걸쳐 계속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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