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빚 권하는 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빚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빚은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만국민의 그림자가 되어 몸집을 불리고, 대물림되고, 인류 최후의 날까지 번영할 것처럼 보인다. 빚은 개인의 심신을 옥죄며 그 자유의지마저 한낱 꼭두각시로 만들어버린다. 나는 지난 몇 년 간 학자금 대출금을 갚느라 줄어드는 통장잔고에 나의 자존감을 투사하며 살아온 바 있다. 그런데 기적처럼 원금상환이 끝나고 드디어 매월 20일 미동도 않는 통장잔고를 마주하면서 왠지 모를 불안이 엄습하는 기이한 체험을 했다. 빚 갚는 행위에 오래도록 종속되었던 탓에 빚을 갚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히려 더 불안한, 역설의 극치를 나는 맛보았던 것이다.

빚을 진 인간은 금융자본주의가 생산하는 주체상이다. 고로 빚은 현대사회의 인간상을 빚어내는 주형틀이다. 이 주형틀은 채무를 이행하겠다는 약속을 채무자의 기억 속에 고정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고통을 가한다. 예컨대 채권자는 부채 액수만큼 채무자의 살을 정확하게 측량하여 도려내거나, 채무자의 자유나 생명까지도 담보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고통의 기제를 통해 채무는 죄책감의 형태로 자연스럽게 채무자에게 내면화된다. 일찍이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죄Schuld’의 개념이 ‘부채Schulden’에서 유래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말하자면 부채는 복수(複數)의 죄요, 죄의 덩어리인 셈이다. 그렇다면 부채란 “이미 찍힌 이빨자국 위에/다시 찍히고 찍히고 무수히 찍힌 이빨자국들을/하나도 버리거나 지우지 않고/작은 몸속에 겹겹이 구겨넣어/작고 동그란 덩어리로 뭉쳐놓은 껌”(김기택, <껌>)과 같지 않은가.

이 “살처럼 부드러운” 껌은 채무자의 몸에서 잔인하게 썰어내어진 살덩어리와 훌륭하게 조응하는지라 문학 속에서 죄의식이나 죄책감의 은유로 곧잘 등장하곤 한다. 김애란의 <침이 고인다>에서, 학원 강사인 주인공에게 어느 날 친하지도 않은 후배가 불쑥 찾아와 얹혀살게 된다.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려진 이 후배는 당시 엄마가 주고 갔다는 인삼껌을 반으로 쪼개 주인공에게 건넨다. 인삼껌은 엄마가 아이를 버릴 때 함께 버려진 죄책감인 셈인데, 후배는 이를 주인공에게 쪼개어 줌으로써 제 인생의 고통을 함께 나누어주십사 간청하는 것이다. 주인공은 인삼껌 반쪽을 넘겨받았으나, 제 몸 하나 간수하기도 벅찬 생활을 하고 있어 결국 후배를 내치고 만다.

후배가 떠난 뒤 주인공은 “살점처럼 피로하게 늘어”진 반쪽짜리 인삼껌을 씹으며,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그것이 아직도 달다는 사실에 놀란다. “입 안 가득 달콤 쌉싸름한 인삼껌의 맛이 침과 함께 괴었다 사라지고 사라졌다 괸다.” 죄책감이라는 정서적 형태로서의 부채가 이제는 껌의 단맛이 침샘을 자극하는 생리적 반응으로 변모하였다. 빚을 감당하는 것이 우리네 신진대사의 일부와 같은 것이 되기에 이르렀으니, 이 어찌 놀랍지 아니한가.

그러나 빚이 도처에 만연한 사회에 빚을 감지하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당장의 통장잔고가 아니라 우리의 의식구조와 사회 전반에 빚이 미치는 영향을 거시적으로 가늠하는 것은 점점 더 요원해지고 별도의 노력을 들여야만 간신히 가능할 정도로 빚의 횡포는 전방위적이다. 부채를 자양분으로 삼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빚잔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빚에 대한 매우 왜곡된 가치를 우리에게 주입시키기 때문이다. 예컨대 할부나 리스lease 따위는 현명하고 풍요한 소비를 약속하는 것처럼 도처에서 묘사되곤 하지만, 미래를 저당 잡힌 현재의 풍요가 자승자박에 다름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는 목소리는 많지 않다. 우리가 새살이 채 돋아나기도 전에 그것을 뜯어 먹는 기이한 사회에 동참하고 있음을 진지하게 성찰할 가능성은 희박해 보인다.

오랜만에 껌을 한 통 사서 입안에 호기롭게 털어놓고, 턱을 움직여 이빨자국을 힘차게 남기며 질겅질겅 씹어보자. “아무리 짓이기고 짓이겨도/다 짓이겨지지 않고/조금도 찢어지거나 부서지지도 않”는 껌을, 단물이 다 빠지고 턱이 피로해질 때까지 천천히 음미한 뒤 가차 없이 뱉어보자. 이는 우리의 처지에 대한 꽤 훌륭한 자조적 행위가 될 수 있을 터이다. 거짓 논리와 거짓 개념이 판치는 사회에 혀끝으로 느끼는 것보다 더 직접적인 깨달음은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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