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내가 사기꾼이 아니란 걸 어떻게 하면 당신이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당신들의 동료로 충분한 인물이라는 사실을 무슨 수로 증명 할 수 있을까?

최근 유명 SNS인 페이스북에서 실명확인을 시행하여 적지 않은 소란이 일고 있다. 현실에서 불리는 명칭으로 서비스를 이용해야 한다는 기준을 제시한 것이다. 미국에선 전통적인 이름을 쓰던 라코타 인디언의 계정이 차단당하는 일까지 생겼다. 법적인 이름을 대신해 별칭으로 활동하던 이들은 모니터 속 인물이 자신이라는 점을 각종 서류와 과거 기록들을 통해 입증해야만 한다. 이는 이름만으로는 지금의 내가 나란 사실을 증명 할 수 없는 인류의 독특한 사회상을 보여주고 있다.

문명의 역사 속에서 개인의 역사는 되풀이 되는 자기증명의 과정이기도 하다. 인간의 삶에선 최소한 두 가지의 증명이 필요하다. 우선, 집단으로부터 부여 받거나 획득한 임무에 자신이 합당한 인물이라는 점을 증명해야 한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보상체계와 연결되어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의 내가 가장 나다운 상태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해야 한다. 행복의 전제 조건이기 때문이다. 한 개인의 생애에서 이 둘이 하나로 일치될 때, 개인은 가장 큰 능력을 발휘하고 더 없는 충족감을 맛볼 수 있다.

하늘과 별과 사랑이 그렇게 불리우 듯, ‘나’라는 단어도 자아라는 현상을 표기하는 이름이다. ‘나’는 ‘너’나 ‘그 것’으로 대체 될 수 없는 고유한 의미이기에 별도의 입증이 필요치 않다. 사랑을 증명하려는 시도만큼 그 사랑을 희미하게 만드는 몸짓이 또 있을까. 하물며 고유의 ‘나’를 다시금 설명하는 자기증명이란 얼마나 구차한 동어반복인가. 이 반복이 덜 할 때 기회비용이 줄어들고, 보다 자기다운 역사를 축적 시킬 수 있게 된다. 그러려면 일과 삶을 하나의 무늬로 직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오늘날 우울의 스모그가 우리 머리 위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이 일치감을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르바이트 청년들이 낮은 시급을 놓고 벌이는 투쟁의 전선은 생존의 임계선이기도 하지만, 경제활동이 자아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멀어지며 생기는 불안의 저항선이기도 하다. 목표와 일치되지 않는 삶을 구조화 시킨 사회는 그들을 ‘알바’라 뭉뚱그리며 이름조차 불러주지 않는다. 불행히도 대개 그 시작은 가난이다. 가난한 이가 토익점수를 따기 위해선 독서실 자리 대신 편의점 야간 알바가 더 갈급한 자리가 된다. 부조리를 에너지 삼아 부조리한 공회전을 해야 하는 처지의 사람들은 삶이 고통스럽다.

그런데 우리사회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안팎의 일치감에 관해 '비극적인 행복’을 경험한 적이 있다. 한국전쟁 전후의 가난한 세대가 그 주인공이다. 당장의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핍진한 시대. 역설적으로 잘 살고 싶다는 극한의 의지를 표출 하면 어떤 식으로든 사회로부터 인정받는 것이 가능했다. 생존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안위를 따지지 않는 태도는 동질성을 확인 받기에 매우 좋은 자기증명 방식이었다. 그 대신 목표로 하던 ‘생존’ 그 자체를 보상으로 받았다. ‘일’이라는 행위와 ‘생존’이라는 목표가 하나의 우물에서 동시에 길어졌다.

이 가난의 프리즘을 통해 바라보는 시각차가 오늘날 세대갈등의 핵심이 된다. 요컨대 그들은 내일이 불투명한 최악의 환경을 버티면서도 목적과 행위의 일치감을 대다수 동시대인이 맛본 모순된 세대이다. 살아남음으로서 증명이 가능했다. 다만 그 만큼 자기증명 과정을 단순화 시키고 거칠게 획일화시켰다. 이들의 눈에 복잡한 청년세대는 변명만 잔뜩인 나약한 이들로 보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현대사회는 보다 복합적인 수행을 개인에게 요구하고 있고, 구성원이 알맞은 능력을 지녔는지에 대해 본질적인 입증을 필요로 한다. 전란세대가 그러했듯 개인의 비전과 삶이 일치해야 미래의 기여도 가늠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기술의 발달로 인해, 귀납적인 증서보다 삶의 과정이 증명의 수단으로서 더욱 중요해졌다. 블로그와 홈페이지 혹은 SNS는 일종의 이력서가 되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스펙으로 추론하는 개인의 노력이 아니라, 보다 실질적인 삶의 포트폴리오다.

이런 시대에 지금의 청년세대가 도전적이지 못하다고 지적 받을 지점이 있다면, 원인은 자기증명의 방법을 알려주지 않은 우리사회의 교육제도로부터 찾아야 한다. 삶의 목적과 행위의 목표가 일치되도록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한 것이다. 그 맹점의 집약인 입시과정에서 무엇이 가장 자기다운 삶인지 찾는 훈련을 하지 못했으니 세상이 두려울 수밖에 없고, 자기증명의 효율이 떨어지며 결과적으로 생존의 기회비용이 가중된다. 그리하여 혹은 자살로, 혹은 지구반대편의 테러집단으로 뿔뿔이 이탈한다. 아이들은 가장 자기다운 자신을 어떻게 찾는지 온몸으로 묻는 중이다. 그럼에도 사회는 다음세대가 보고 배울 학습권을 빼앗고 있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를 읽지 못한 결과, 사기꾼으로 의심되는 후보자나 아무런 정치적 비전이 검증 안 된 후보자를 대통령으로 만들기도 했다. 작금엔 부적격의 백화점이랄 수 있는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대한민국의 총리로 선택하는 세상을 만들었다. 시대가 요구하는 자기증명의 방법이 개인의 역사에 소구되는 시점에, 그 간 쟁취한 계급의 사다리 개수만을 논하는 사회가 보여줄 수 있는 전형이다. 대한민국은 현재 누군가 살아온 역사를 증명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포기하고 있다. 페이스북 같은 일개 IT 서비스 회사조차 요구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이다. 청문회 기간 동안 이 후보자가 증명한 것은 대체 무엇일까.

곽경택 감독의 영화 ‘똥개’ 후반부에서, 이름대신 똥개로 불리던 철민은 동네 건달 진묵과 일전을 앞둔다. 엄마 없이 자라며 평생 존재감을 느끼지 못했던 똥개로선 사사건건 마주치던 진묵을 이기고 싶어 했다. 그 때 아버지가 여동생 삼으라며 데려온 정애가 인상을 쓰며 똥개를 말린다.

“혹시… 안가믄 안대나?”
“갈끄다. 요번에는 학실하게 좀 보여주야 된다.”
“머를 보여주는데?”
똥개가 잠시 당황한다. 곧이어 목을 내밀고 말한다.

“…..내, 내를!”

이름없는 똥개조차 자신을 증명하겠다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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