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요즘 TV를 들여다보면 미식시대가 따로 없다.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먹방을 연출하는 <테이스티로드>부터 촌구석에서 하루 온종일 밥 해먹는 것으로 소일하는 <삼시세끼>, 매주 선정된 몇 식당들을 놓고 품평회를 벌이는 <수요미식회>에 이르기까지, 바야흐로 일차적인 욕구의 전성기다. 미각에 대해서 뭐 그리 할 말이 많을까 싶지만, 곰곰이 따지고 보면 미각만큼이나 주관적이고 무궁무진한 감각도 없다. ‘맛Geschmack’이라는 단어에는 ‘취향’이라는 의미가 필연적으로 들어 있다. 이는 우리말의 ‘입맛대로 하다’라는 용례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입맛, 취향이라는 주관에 대해서는 사실상 시시비비를 가릴 수 없는 셈이다. 내가 생굴은 싫어하고 익힌 굴만 좋아한다 해서 그 누구도 나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다.

문학에서도 ‘맛’은 주관의 총화로서 즐겨 등장하곤 한다. 예컨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나오는, 너무나 유명해서 웬만한 사람들은 그 숨 막히게 긴 책을 읽지 않고도 줄줄이 꾀고 있는 마들렌의 일화를 들 수 있겠다. 나 역시 읽지 않은 그 책에서 프루스트는, 마들렌 한 조각을 따뜻한 홍차에 적셔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어린 시절의 콩브레가 기억 저편으로부터 마법처럼 깨어나는 놀라운 체험을 서술한다. 이 때 홍차에 젖은 마들렌의 맛은 작가의 의지와 상관없이 오로지 자신의 감각에 입각하여 그 ‘맛’으로부터 과거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바, 이를 ‘무의지적 기억’이라고 한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미각은 일생동안 경험한 모든 맛에 대한 기억을 은밀히 간직하고 있는 아틀란티스와도 같은 셈이다. 미각이라는 자물쇠에 기억 속의 맛과 꼭 맞는 열쇠를 찾아 끼우기만 한다면, 기억 속의 세계는 빗장을 열고 우리를 그 속으로 기꺼이 인도해줄 것이다.

그러나 기억의 세계가 퇴색하여 그곳으로 들어가는 것이 요원하게 된다면 어떨까? 심지어 강제적이고 지속적인 외압에 의해서 말이다. 조지 오웰의 <1984>의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빅브라더와 전체주의 당에 의해 사회의 모든 것이 통제되는 곳이다. 당의 기록국에서 일하는 주인공 스미스는 과거에 출간된 신문의 기록과 사건을 당의 필요에 따라 수시로 조작하여 진실을 폐기하는 작업을 맡고 있다. 그 스스로도 과거의 기억에 대해서, 그리고 과거의 역사에 대해서 오리무중에 빠져 있다.

이는 맛에 있어서도 다르지 않다. 당원들은 정해진 식당에서 규정된 음식만을 배급받는다. 형체를 알 수 없이 걸쭉한 스튜와 딱딱한 빵, 기묘한 맛이 나는 ‘승리 커피’와 사카린 따위가 그것이다. 기록 조작에 힘입어 매년 경제성장과 물자 생산을 초과 달성했다고 당은 떠들어대지만, 식전술이라도 들이키지 않고는 먹기조차 힘든 형편없는 음식들을 배급받으며 스미스는 전에도 음식 맛이 이랬는지 자문해본다. 그러나 모든 것이 통제되어 기억마저 흐릿한 상황에서 아무리 머릿속을 더듬어봤자 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억압된 사회에서는 개인의 주관이 아무리 자유롭다 한들 무용지물에 불과하다. 마들렌에 대한 프루스트의 놀라운 기억도 작가가 호화로운 병실에서 한가로이 누워있었기에 가능했을지 모를 일이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맛이라는 것, 취향이라는 것도 결국은 사회적 조건에 예속된 주관에 불과하다.

그런가하면 잘 다듬어지고 훈련된 미각은 개인적 욕망의 도구로 휘두를 수도 있다. 로알드 달의 <맛>에서 한 유명한 미식가는 친구의 집에서 포도주를 맛보고 그 원산지를 알아맞히는 내기를 하는데, 어느 날은 감별하기 까다로운 포도주가 등장하자 그것을 맞히면 친구의 딸을 내놓으라고 제안한다. 포도주를 몇 모금 마신 뒤, 그는 마치 그 포도주가 태어난 농장으로 단숨에 날아갈 태세로 달변을 늘어놓더니 기어코 정답을 내놓고야 만다. 그러나 이는 미식가가 식사 전 몰래 포도주를 미리 확인해둔 치밀하고 교활한 책략의 결과인 것으로 드러난다. 그렇다면 정답을 미리 알고서 포도주의 맛에 대해 그가 늘어놓았던 장광설은 친구의 어린 딸을 곧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는 음흉한 욕망의 맛에 대한 품평이었을까?

이렇게 늘어놓고 보니 맛이라는 것이 결코 순수하게 주관적이기는 힘들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사회와 개인 간의 역학관계라던가 특수한 상황에서 비롯하는 무수한 요소들이 나의 미각에 쉴 새 없이 끼어들어 영향을 미칠 것이다. 맛, 혹은 취향의 주관성이야말로 변화무쌍하고 기만적인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다른 감관들에도 확장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다. 내가 보는 것, 듣는 것, 느끼는 것은 오로지 나의 순수한 주관만이 작용하여 얻어진 것인가? 사실은 그 주관성이야말로 다른 모든 외부적 조건들의 최하위에 놓인 하수인은 아닐까? 매일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들에도 가끔은 반성적 시선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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