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흔히 노태우를 “가발 쓴 전두환”이라고 평하곤 한다. 그 권력의 뿌리가 같다는 해학적 표현이다.

자칫하면 정권의 이양과정에서 숱한 국민의 피를 부를 뻔했던 전두환 시대의 종언은 1987년 6.29선언이라는 극적인 정치이벤트를 통해 평화적인 정권교체의 모습으로 국민들에게 선을 보였다.

12.12 사태 이전부터 철저히 전두환의 후임보직자리를 이어받은 노태우는 이제 대통령자리마저 물려받게 되기에 이르렀다.

전두환은 자신의 후임이 자신의 퇴임 후를 보장해주길 바랬다. 보복이 일상화된 후진적인 한국정치행태를 볼 때 숱한 국민적인 희생을 부른 광주민주화항쟁이나 삼청교육대문제 등 퇴임후 자신에게 닥칠 정치적인 보복을 전두환은 심각하게 고민했을 법하다.

그나마 퇴임후 자신을 보호해줄 사람은 자신의 육사동기로서 줄곳 함께 군생활을 하는 동안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노태우를 미는 것 말고는 딱히 퇴임 후를 보장해 줄 안전장치가 없다고 판단하였기에 전두환은 6.29라는 극적인 정치이벤트를 통해 노태우를 새로운 국가최고지도자로 국민들의 뇌리에 각인시키고, 자신의 퇴임 후를 보장받는 고도의 정치방정식을 세우게 된다.

당시 국내상황은 그야말로 권위주의정권과 민주화세력의 양보 없는 한판승부가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폭발적으로 번져나가는 대중들의 민주화 욕구를 잠재울 방법이 딱히 없었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하나는 그 동안 그가 해왔던 방식으로 민주화의 열기를 폭압적으로 잠재우는 방식이었다. 

실제 6.29 직전 한국사회 전국의 민주화 열기는 폭발직전이었다. 연일 학원가에서는 전두환 정권타도를 외치며 학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김영삼, 김대중 등 야당 정치인이 중심이 된 정치권도 물실호기라 이 분위기를 어떻게든 자신들의 정치행보에 유리하게 이용하려고 전력을 추구하고 있는 입장이었다. 민주화 인사들 또한 이제는 더 이상 권위주의 정권이 이 땅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힘으로 밀어 부쳤다.

전두환 입장에서는 이러한 폭발적인 민주화열기를 잠재울 뾰족한 대안이라곤 계엄령을 통한 군부를 동원하는 수밖에 없었다. 실제 전두환은 자신의 집권초기 그리하였던 것처럼 군을 투입해 이러한 민주화 열기를 강압적으로 잠재우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시대적인 상황은 그리 호락호락하질 않았고, 그가 천재일우의 기회를 틈타 집권했던 7년 전의 상황과는 전혀 상황이 다른 쪽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특히 미국 측은 이러한 전두환의 군부동원을 통한 민주화 열기 탄압시도에 대해 엄중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전두환에게 경고했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갔다. 군을 동원하지 않는 경우 자칫 4.19혁명과 같은 방식으로 정권이 붕괴될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역사의 시계가 흐르고 있었다.

6.29 선언은 전두환이 연출한 정치이벤트였다. 겉으로는 노태우 당시 민자당 후보가 민심을 읽고 전두환에게 결단을 촉구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기실 6.29선언의 모든 각본은 전두환으로부터 나왔다.

6.29선언은 그 당시 재야에서 요구하는 거의 모든 요구사항들이 총망라돼 있었다. 6.29선언을 ‘가발 쓴 전두환’ 즉 노태우가 주도하게 함으로써 노태우의 정치적인 입지를 결정적으로 공고히 해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단임제 약속을 지키고 권력을 평화적으로 이양하는 최초의 대통령이라는 “도랑치고 가재잡는’ 전두환식 고난도 정치이벤트가 펼쳐젔다. 효과는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국민들은 환호했고 단순에 국민들은 ‘가발 쓴 전두환’ 노태우를 새로운 대통령으로 선택했다. 재야세력이 전두환에게 허를 찔린 것이다.

노태우… 그는 전두환과 그 태생에 닮은 정치군인이었지만 더 이상 전두환식 권위주의 정치를 펼칠 수가 없었다. 그 당시 사회적인 분위기와 민주화 열기가 권위주의 정치를 받아들이질 않았다. 한국이 산업화에 성공하는 동안 정치민주화가 뒤쳐져 있었지만 이제 이 정치민주화 과정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인 과제가 된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노태우는 어쩌면 본의 아니게 ‘가발 쓴 전두환’으로서의 자신의 태생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역사적 소임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위대한 보통사람의 시대’를 선언한 노태우 그러나 그의 리더십은 국민들의 기대에 한참이나 못미친 나약한 리더쉽으로 비춰졌다. 보스기질이 다분한 전임 전두환과는 확 대비가 되는 그의 성격적인 우유부단함이 더더욱 이러한 현상을 부채질 하였다. 항간에는 ‘물태우’라는 조롱까지 공연연하게 나돌았고 노태우 자신 자신에 대한 이러한 조롱을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것은 시대가 그에게 강제한 숙명이기까지 했다.

당시 시대적인 분위기는 전임 전두환에 대한 법적인, 정치적인 단죄였다. 후일 김영삼 정권에 의해 ‘법적인 단죄’가 내려지기까지 노태우는 버틸 수가 없었고 그는 결국 전임 전두환을 백담사로 유배시키는 선(정치적인 단죄)에서 전임 전두환과 거리를 둬야만 했다.

노태우의 대통령 재임시절 단행된 각종의 정책을 살펴보면 그러나 오히려 그가 내린 정책들이 훗날 한국사회와 정치에 미친 영향이 적지 아니함을 우리는 알 수 있다.

특히 그가 미련할 정도로 밀어부친 북방정책은 그를 지지했던 보수층들로부터 조차 철저한 외면과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음에도 불구 결과적으로 놓고 보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국가적인 이익에 궁극적으로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랜기간 우방으로 있던 대만을 버리고 중국과의 국교를 수립함으로써 미국 일변도의 편중된 무역구조가 균형을 찾았고 오히려 오늘날은 미국과 일본을 합친 것보다도 월등히 높은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은 순수히 노태우정권시절 추진되었던 북방정책에 힘입은 바 크다.

오늘날 세계최고의 공항이라고 평가받고 있는 인천국제공항건립도 노태우시절 이뤄졌다. 200만호 건설이라는 대통령 공약에 따라 군사작전을 하듯이 밀어부친 주택공급확대정책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던 집값을 단기간내 안정화시킴으로써 후일 시대적인 요청에 부응한 성공한 부동산정책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물론 단기간내 수도권주변에 대규모 베드 타운(bed town)을 건설함으로써 또다른 부동산 투기붐을 조성하였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없는 것은 아니나 공급부족이라는 구조적인 문제에서 발생한 부동산 폭등을 비교적 단기간내에 물량공급정책으로 맞불을 놓음으로써 근원적인 대책을 신속히 수립시행했다는 측면에서 결코 노태우가 ‘물태우’만은 아니었음이 입증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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