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독도강치복원국민운동본부 정영옥 총재

독도 강치, 멸종으로 분류됐지만… 생존 가능성 있어 
영화 만드는 이유? 독도 강치,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강치 복원사업, 독도 수호운동의 일환”
일본인들, 강치 몽둥이로 때려 죽인 뒤 가죽 얻기도 

등단에 대한 여러 병폐 없애고자… <서라벌문예> 창간  
“상처, 자기 성장의 에너지가 될 수 있어”

   
▲ 정영옥 총재 ⓒ 투데이신문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일본의 독도침탈 역사는 ‘강치’로부터 시작됐다.

때는 1904년,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한 일본 어부가 울릉도에서 강치를 발견했다. 수익성이 높은 강치가 욕심이 났던 그는 조선제국과 내무성에 어업독점권과 독도편성권을 내게 된다.

우리나라는 이를 기각시켰지만 1905년, 일본 내무성은 일방적으로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명하며 시마네현 소속이라고 고시했다. 이후 강치는 일본 어부에 의해 매년 수천 마리가 남획되기 시작했다. 얼마나 많이 잡았으면 당시 강치의 핏물이 독도에서 울릉도까지 흘러갔다고 전해질까.

일본인들은 강치를 잡아 고기로 먹었고 산 채로 매달아 기름을 짜 항공유로 사용했다. 혹은 때려서 죽인 뒤 가죽을 얻기도 했다. 일본의 무분별한 살상으로 5만여 마리에 달하던 강치는 결국 자취를 감췄고 1978년에 멸종으로 분류됐다. 한 나라의 경제적 이득을 위해 귀한 생명이 처참하게 희생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민족에게 가슴 아픈 동물로 남아있는 강치를 복원하자고 외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독도강치복원국민운동본부 정영옥 총재다. 독도살리기 운동을 했던 정 총재는 강치의 아픈 역사를 알게 된 후 독도강치 복원사업에 뛰어들었다. 그는 멸종된 것으로 알려진 독도 강치가 아직 존재한다는 희망을 품고 있다. 실제 강릉 후포항 쪽에서 6월, 7월경 강치와 비슷한 것이 발견된다는 이야기를 어부로부터 들었다고 한다. 강치는 독도에서 서식하던 바다사자이기 때문에 생김새가 물개, 바다표범 등과 비슷해 많은 이들이 헷갈려하기도 한다.

현재 정 총재는 독도 수호와 강치 복원사업의 일환으로 영화 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우리나라 국민, 나아가 세계시민들에게 독도와 강치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서다. 2013년 이후부터 독도 강치와 관련된 시나리오를 쓴 것만 해도 10편이라고 하니 애정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까 싶다.  

그가 강치만큼이나 애착을 드러내는 것은 다름 아닌 ‘문학’이다. 정 총재는 공무원문학지에 등단한 시인이자 종합문예지 <서라벌문예>의 발행인이기도 하다. 2007년과 2010년에는 <가원의 시 사계>라는 시집을 두 번 펴냈으며 지난해에는 시국(詩局)이라는 봉천동 이야기 연작시를 낸 바 있다. 

<투데이신문>은 지난달 2일 서라벌문예원 사무실에서 ‘시쓰는 강치전도사’ 정영옥 총재를 만났다. 쉼없이 달려온 그녀의 독도, 강치, 영화, 문학 이야기를 펼치고자 한다.

   
▲ 정영옥 총재 ⓒ 투데이신문

◆ 강치를 계기로 독도 운동의 패러다임 바꿔야  

Q. 현재 독도강치복원국민운동본부에서 총재로 활동하고 계신다. 독도 강치와 관련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 2006년경 (사)나라독도살리기 국민운동본부라는 단체의 공동회장을 맡으면서 본격적으로 독도수호 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독도수호 운동이 단발적이고 즉각적인 대응이 아닌 미봉책에 불과해 아쉬움을 느꼈다. 어느 순간 ‘그들만의 리그’라는 생각이 들더라. 물론 다양한 일을 했지만 국민과의 소통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둘러 보니 지금까지 그런 영화가 없었다. 다큐멘터리나 단편적인 영상은 있지만 말이다. 그래서 2010년에 독도와 관련된 영화를 기획했다. 이후 시나리오를 쓰던 중 매년 (사)나라독도살리기 국민운동본부에서 진행하는 ‘독도사랑 글짓기대회’를 통해 아이들의 글에서 독도 강치의 내용을 본 뒤 강치에 대해 관심갖게 됐다.

Q. 우리나라에서 멸종으로 분류된 강치를 복원하는 것은 어렵다며 의구심을 드러내는 사람들도 많지 않나
: 캘리포니아에 있는 몬테레이 연구소의 한 연구원이 ‘독도 강치는 멸종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을 한 부분을 어느 다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다. 그 연구원이 말하기를 강치가 3만km를 왕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지능상으로는 5살 정도가 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에콰도르 등지로 이동했을 가능성을 이야기했다.

강치는 바다사자과이므로 바다 포유류에 해당한다. 바다 포유류를 일반인이 만나는 일은 로또 당첨 확률보다 10배 정도 높다고 하더라. 그만큼 바다 포유류를 일반인이 만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그래서 멸종으로 분류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백령도나 포항, 강릉 이런 지점에서 “물개를 봤다”, “물범을 봤다”는 제보가 강치일 수 있다고 본다. 일반인이 멀리서 봤을 때 물개와 강치를 식별하기란 쉽지 않다. 강치는 일반인이 앞다리, 날개, 서있는 모습 등을 보고 구분하는데 떴다 가라앉았다 하는 배에서 봤을 때 그게 강치인지, 물개인지 구분이 안 될 수 있다.

강치에 대해 아는 국민들은 5%정도밖에 안 된다. 독도 강치에 대해 모르기 때문에 봤어도 봤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강원도 속초, 강릉 쪽 무인도에 있는 어부들이 말하기를 실제로 강치가 6월~7월에 온다고 하더라.

   
▲ 독도 강치 모형 ⓒ 투데이신문

Q. 일본의 독도 침탈의 시작이 ‘독도 강치’ 때문이라고 들었다
: 그렇다. 독도에 1990년경 강치가 살았고 1904년에 나카이 요사부로라는 한 일본어부가 와서 울릉도에서 강치를 본 순간 어업독점권과 독도편성권을 냈다. 당시 강치는 수익성이 좋았다. 또 1900년 초기 산업사회 당시 전 세계에서 강치, 물개, 고래잡이가 성행했다. 일본 어부는 이미 강치의 수익성에 대해 잘 알고 있었는데 울릉도에서 강치를 발견한 뒤 잡아야겠다는 욕심이 생겨 어업독점권을 조선제국과 내무성에 냈는데 기각됐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며 시마네현 소속이라고 고시했다. 이런 사실을 울릉군수가 알게 됐고 1906년경 처음 독도라는 말을 쓰며 독도를 울릉군에 편입했다.

덧붙여 이야기하자면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 이유는 일본이 강치잡이를 시작해 강치를 비행기 기름으로 썼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그해 강치 남획이 시작됐고 일본 어부가 편성권을 낸 이후로 1년에 7천~8천 마리씩 잡아들였다. 울릉도와 독도 사이가 88km인데 핏물이 독도부터 울릉도까지 흘러갔다고 하더라.

Q. 결국 강치 복원이 독도 수호운동의 일환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 강치는 일본 수탈 역사의 첫 희생양이다. 또한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말하게 된 빌미가 됐다. 강치가 없었다면 독도는 일본에 편성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한 일본 어부의 욕심에 의해 강치가 희생되고 사라졌다. 정말 슬픈 짐승 아닌가. 

한때 우리나라와 일본이 독도 분쟁을 하듯, 인도네시아하고 말레이시아가 한 섬을 갖고 23년 동안 영토분쟁을 했었다. 그런데 국제 사법재판소는 말레이시아의 손을 들어줬다. 이유는 말레이시아가 해당 섬 일대에 사는 멸종위기의 바다거북이를 복원시키는 노력을 했기 때문이다. 이를 볼 때 우리나라도 독도 강치 복원에 힘쓴다면 국제 사법재판소에서 승소할 가능성이 있다. 독도운동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고 본다. 생태학적, 환경복원으로 바꾸면 독도수호운동의 종지부를 찍을 수 있다고 본다.

Q. 왜 유독 독도에 강치가 많이 살았을까
: 독도는 동해에서 오는 난류와 북한의 한류가 교차되는 지점이기 때문에 풍부한 어종이 살고 있으며 바다사자 강치가 살기 좋은 환경이다. 강치는 물 속에 오래 있기도 하지만 포유류이기 때문에 바위에 나와있어야 한다. 독도에 가재바위가 있는데 강치가 누워있기도 하던 곳이었다. 여기서 이름을 따와 강치를 한문으로 가지어라고 썼고 가지어를 줄여서 가제라고도 했다. 그래서 독도가 한때 우산도, 승봉도, 가지도, 석도, 독도 이런 순으로 바뀌었다. 강치가 살았기 때문에 ‘가지도’라고 한 것이다. 

Q. 언제부터 ‘강치’로 불린 것인가
: 학명이 강치다. 학계에 보고되기 전 우리나라는 이미 강치를 ‘가지어’로 불러왔다. 당시 울릉도 사람들은 강치가 많았음에도 잡지 않았다. 강치를 신성시했고 강치 잡는 것을 금기로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먹을 것이 없어서 간혹 잡기는 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당시 강치가 황소 가격의 10배였기 때문에 강치 가죽으로 가방을 만들었다. 일본인들이 이런 가방 등을 대영제국박람회에 출품해서 금상, 대상 받기도 했다.

Q. 듣기로는 강치가 굉장히 똑똑한 동물이라고 하더라
: 물개보다 강치의 아이큐가 훨씬 높은데 강치의 아이큐는 사람으로 따지면 5살에 해당한다. 돌고래 아이큐가 30이라면 강치는 70정도인 것으로 알고 있다. 강릉 후포항에 오는 강치들은 어부들을 데리고 논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처럼 강치는 훈련시키면 잘 따라온다. 엄청 장난꾸러기고 익살스럽다. 사랑스럽기도 하다(웃음).

강치는 에콰도르, 캘리포니아, 우리나라 독도까지 전 세계적으로 세 군데에 있다. 덧붙이자면 강치는 사람과 사이클이 비슷해 18년 가량을 산다. 어미 강치가 아기강치를 3년 간 돌보는데 우리 나이로 따지면 청소년기까지 키우는 것과 같다. 1년에 한 마리를 낳고 성인이 될 때까지 키우는 셈이다. 어미강치는 아이들을 돌보고 숫강치는 먹이를 가져오거나 책임감을 갖는 등 사람과 비슷한 부분이 있다.

Q. 현재 독도 강치가 멸종으로 분류돼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1974년경 일본 훗카이도에서 포획된 것을 끝으로 자취를 감췄다는 얘기도 있다. 뿐만 아니라 2006년에는 환경부가 복원하기 힘들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점들을 볼 때 독도 강치 복원사업이 ‘불가능한 것 아니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은데
: 캘리포니아 강치를 가져와 강치 복원사업을 하는 것을 두고 학자들은 웃기는 얘기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독도의 상태를 1900년도로 바꿔놓고 싶었다. 캘리포니아 강치와 독도 강치의 염기서열의 편차가 4%라고 하더라. 예를 들어 인디언들 한국에 데려와서 한국인으로 만들어 놓는다면 충분히 살 수 있다. 다시 말해 문화인류학적으로 볼 때 가까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사람인 것은 같지 않나. 그래서 캘리포니아 강치를 데려올까도 생각해봤는데 당시 몬테레이 연구소 연구원이 ‘독도 강치가 멸종되지 않았을 수 있다’고 말해 희망이 생겼다. 또 강릉 후포항 쪽에서 6월과 7월에 강치가 오는 것을 스킨스쿠버들이 봤다는 인터뷰가 있다. 환경부는 이런 상황을 몰랐기 때문에 강치가 역사적으로 멸종됐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Q. 일본인들이 강치를 어떻게 잡았는지 궁금하다. 듣기로는 포획수법이 잔인했다던데
: 일본인들이 강치를 어떻게 잡았냐면 먼저 새끼를 포획한다. 그럼 어미가 오는데 그때 어미를 잡는다. 이후 숫강치가 아내와 자식을 구하러 왔을 때 그런 숫강치를 잡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은 강치 고기를 먹었고 기름을 짜서 항공기 기름으로 사용했다. 강치는 버릴 게 없었다. 심지어 일본인들은 강치 태아까지 꺼내 기른 다음 서커스단에 팔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본인들은 강치를 잔악하게 몽둥이로 때려서 죽인 뒤 가죽을 얻어냈다. 죽일 때 총이나 칼로 죽이면 가죽이 손상되므로 몽둥이로 때려서 죽인 것이다. 또 산 채로 거꾸로 매달아 기름을 짜냈다.

   
▲ 정영옥 총재 ⓒ 투데이신문

◆ 독도 강치 영화 준비 중… 전 세계시민에 공감 얻었으면 

Q. 독도 강치를 주제로 영화 제작을 준비하고 계신데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고 싶다
: 일단 강치를 복원하기 전에 강치를 알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도 강치가 남획되던 시대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울릉도에 사는 한 소년과 강치가 만나 부상당한 강치를 치료하면서 교감을 나누고 일본의 대대적인 강치잡이가 시작됐을 때 소년이 항거하는 이야기다. 소년과 아버지의 갈등도 나온다. 아버지는 일본의 어부에게 어선을 붙여주고 소년은 강치를 보호하고 싶은 마음을 다룰 것이다. 강치가 무엇이고 역사적으로 왜 중요한지 설명하고 복원의 당위성을 말하며 일본 수탈 역사의 첫 희생자인 것을 상징성있게 영화로 나타내고자 한다. ‘독도는 우리땅’이라는 말을 일단 뒤로 빼고 강치를 앞세워 휴먼 감동으로 영화를 기획했다. 이 영화가 우리나라 국민뿐만 아니라 전 세계시민들의 공감을 일으켰으면 한다. 

Q. 영화에서 나오는 강치의 모습이 어떨지 기대된다
: 일단 국민들이 강치를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예쁘게 표현하고 싶다. 그래서 영화에 나오는 강치를 모두 CG처리할 계획이다. 원래 캘리포니아에 있는 마린메멀케어센터(marine mammal care center)라고 강치를 돌보는 곳이 있다. 거기에서 촬영하려고 했는데 강치가 착하고 사랑스러워도 바다사자는 맹금류나 마찬가지라서 위험할 수 있기 때문에 전부 CG처리하기로 했다. 원래 마린메멀 케어센터에서는 강치가 세계에서 영화 주인공이 되는 것은 처음이라 고무돼 있었는데 촬영이 안 된다고 하니 심란해했다. 나 역시 안타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Q. 가능하다면 전부 CG가 아니라 어느 정도 강치를 실제로 출연시켜도 되지 않을까 싶은데
: 그런데 크기에서 차이가 난다. 캘리포니아 강치는 날씬하지만 독도 강치는 크다. 근데 영화는 강치가 국민과 처음 만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스러운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CG처리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Q. 현재 영화 진행상황은 어떻게 되나
: 영화는 올해 6월쯤 크랭크인이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현재 자금 문제로 지연되고 있다. 처음 기획할 때 시점은 2013년 1월이었다. 원래 2010년부터는 독도 수호와 관련된 영화를 찍겠다고 준비했는데 2013년부터 독도 강치로 시나리오를 바꿔서 쓰게 됐다. 이후 독도 강치 시나리오 초고를 바탕으로 10편가량 썼다.

Q. 흥행보다는 강치에 대해 많이 알리고 싶다는 입장인데 그래도 작가로서 흥행에 대한 욕심은 있지 않겠나  
: 영화를 통해 일본과의 강한 대립을 말하기보다 휴먼 감동으로 가서 많은 분과 세계시민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나는 이 영화를 세계인을 겨냥해 만들 것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인이 보는 영화 말이다. 아마 독도와 일본의 관계에 대해서는 북한도 한 목소리를 내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북한에도, 일본에도 상영하고 싶다. 영화에 대한 수익의 대부분을 문화기금, 강치 복원기금으로 쓸 생각이다. 영화를 통해 강치 복원에 대한 물꼬를 틀고자 한다.

“어찌 남의 둥지에 알을 낳으려 하는가?
괭이 갈매기 날카로운 울음으로 낮은 선회를 한다.
어찌 우리 가족이 모두 사라졌는가?
황금색 강치, 서러운 통곡으로 바위를 부여 안는다.
한국령 한자 한자 새긴 홍순칠 대장, 서슬푸른 고함소리
리앙크르가 웬말이냐? 다케시마가 웬말이냐?
독도는 독도다. 우리 민족의 영원한 혼이다”

-정영옥, <독도>-  

   
▲ 정영옥 총재 ⓒ 투데이신문

◆ 시인 정영옥의 삶… 번짐의 미학 좋아해    

Q. 이제 시와 관련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총재님은 공무원문학에서 등단해 시인으로도 활동하고 있는데 원래 문학에 관심이 많으셨나
: 사실 국문학 전공을 하고 싶었는데 집에서 반대했다. 교육학이나 사범대를 가라고 했다. 글쓰는 일을 집안에서 반대해 하지 못하다가 2005년, 40세에 공무원문학지에 등단하게 됐다.

Q. 총재님의 아호가 ‘가원’인데 어떤 뜻인지 궁금하다
: 아름다울 가(佳)에 동산 원(園)이다. <서라벌문예>라는 종합문예지에 한 900명 정도가 되는 회원이 있는데 그 회원들이 아름다운 동산인 <서라벌문예>에서 행복하게 살라는 의미로 지으라고 해서 짓게 됐다. 

Q. <서라벌문예>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린다
: 등단하고 난 이후인 2006년에 <서라벌문예>라는 종합문예지를 만들었다. 현재 23호까지 나온 상태다. 처음에는 격월간으로 했는데 계간지로 바꿨다. 요즘은 사람들이 문학지를 통해 등단하지 않나. 현재 사문학지가 400개 정도인데 등단하고 싶은 사람들은 등단비에 대한 부담이 있다. 책을 강매한다든지, 어차피 문예지도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 본다. 나는 등단비없이 책 강매하지 않고 등단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주고자 한다. 다시 말해 등단에 대한 여러 병폐를 없애고자 만든 것이 <서라벌문예>다. 작가들이 글을 쓸 수 있는 장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현재 우리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시인이 300여 명 정도가 되고 이 외 수필가, 시인, 소설가, 문학비평가 등이 있다. 

   
▲ 정영옥 총재 ⓒ 투데이신문


Q. 총재님의 시가 ‘사랑스럽고 자연스럽다’고 하고 ‘풍성하면서도 개성이 있다’ 등 다양한 평가가 나오고 있다. 본인의 시 세계가 어떤지 궁금하다 
: 나는 번짐의 미학을 좋아한다. 사람도 마음과 마음이 번져가면 서로 간의 갈등이 없으리라 본다. 흑백논리로 세상을 바라보는 게 분명하고 좋을 수도 있지만 때로는 세상이 안개일 수도 있다고 본다. 안개 속을 갈 때 더욱 분명한 것을 볼 수 있듯이 세상을 구분해서 보지 말자는 것이 나의 시철학이다. 처음 등단한 시는 현학적이고 관념적이었고 어려웠다. 추상적이고 난해했는데 시집을 한 두권 내면서 여백을 갖기 시작했다. 많은 말들을 쏟아내는 것보다 절제하게 된 것이다. 

Q. 다른 문학 장르와 달리 시만의 매력이 있다면 
: 사실 시는 삶이다. 시인은 별도로 없다. 공자님 말씀 중에 <위정> 편에 보면 ‘사람이 사악하지 않으면 모두 시인이다’라고 돼 있다. 별도의 시인이 있는 게 아니다. 자기가 시인인 것을 모를 뿐이다. 시는 사람의 마음을 정화하는 기능이 있다. 본래 사람의 마음에 시심(詩心)이 있는 것이고 이를 못 꺼낼 뿐이다. 나는 시인의 마음을 꺼내주는 것을 독도 강치와 관련된 강의만큼 열심히 하고 있다.

Q. <시인의 뜨락>, <시와 음악세상> 등 방송에도 출연하고 계신데 
: 시인들이 대중에게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해 내가 직접 기획하고 제작해서 방송을 만들었다. <시인의 뜨락>은 시인들이 나와서 자신들의 시 세상을 얘기하는 것이고 <시와 음악세상>은 시인과 시와 음악이 함께 하는 방송이다. 나는 대본없이 방송을 하는데 그럼에도 굉장히 좋은 방송이 되더라. 방송 출연진들도 처음에는 대본이 없는 것에 대해 어색해했지만 자기 마음을 잘 표현해냈다. 

Q. 독도강치 복원사업을 비롯해 시인, 문예지 창간 등 여러 가지 일을 하시느라 개인적인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다
: 잠을 하루에 3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보통 새벽 3시에 자서 아침 6시에 일어난다. 사람이 라이프스타일을 그렇게 정하면 힘들지 않다. 나는 60세에 죽어도 거의 70세까지 산 셈이다. 그만큼 잠을 아꼈기 때문이다.

Q. 여러 활동을 하며 열심히 살고 계신 시인님께서 젊은 청춘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 요즘 아이들은 상처를 많이 받으며 자라고 있다. 그 친구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상처도 멘토가 될 수 있다, 상처도 자기 성장의 에너지가 될 수 있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내가 나를 먼저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건 이기심이 아니다. 나를 사랑해야 남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긴다. 상처 난 소나무가 상처를 막기 위해 송진을 내뿜는다. 그리고 송진이 호박이라는 보석으로 거듭나지 않나. 이 상처를 하나의 아픔으로만 보지 않고 정말 나한테 훌륭한 멘토이고 성장의 큰 에너지라고 생각했으면 한다.

Q.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하다
: <사색의 향기>라는 200만 명의 문화커뮤니티 운영과 <서라벌문예> 등 문예활동을 한 지 10년차다. 앞으로는 제대로 된 문화적 교류활동을 하고 싶다. 아울러 독도 강치 영화 제작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자유여,
어느 날 장미꽃 한 잎 진다고
모든 꽃들이 항복한 것은 아니다.
지금 겨울비가 내린다고 온 세상이 젖는 것은 아니다.
내 눈물 겨울비에 섞어 속살 적셔 한기에 떤다 해도
그대 그리움에 항복한 것은 아니다.
상념의 계곡물에 떠있는 가랑잎과 운명처럼 발가벗은 나무가
황량한 그대 자유에 몸서리 친다 해도
내 구속은 목 짤리운 것이 아니다.
안으로 안으로 정제되는 아우성.
영겁보다 위대한 찰나의 죽음을 딛고
백기 흔들며 항복할 그대 사랑 기다리는 것은
그대의 자유보다 나의 구속이 더 경건하기 때문이다.”

-정영옥,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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