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두희 기자
【투데이신문 김두희 기자】어느 날 갑자기 ‘갑(甲)질’이라는 신조어가 생겼다. 계약서 등에서 으레 상대방을 갑(甲)과 을(乙)로 지칭하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는 이 단어는 한국사회의 좋지 않은 한 단면을 보여주는 단어로 자리매김했다. 한 마디로, 그저 핍박만 받아왔던 ‘을’들이 갑질이라는 단어로 자신들의 고통을 알릴 수 있게 됐다고 할 수 있겠다.
 
갑질이라는 단어는 지난해 말 대한항공 조현아 전 부사장의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으로 인해 더욱 주목받았다. 재벌가의 장녀가 사무장보다 지위가 높다는 이유로 합리적이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주장이 <한겨레>를 통해 보도된 후 그야말로 대한민국 을들은 갑질을 자행한 그에게 하나가 되어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이후로도 갑질 논란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지는 요즘이다.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한 한국사회에서 자본으로 인해 새로운 계급사회가 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을 손에 쥐고 있는 그들은 돈이라는 무기를 앞세워 갑의 횡포를 부린다는 논란에 여전히 휩싸이고 있다. 최근엔 이들이 또 다른 을 뒤에 숨은 채 은근한(?) 갑질을 부린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다. 다시 말해 갑과 을이 아닌 을과 을, 혹은 을과 병의 싸움이 돼버린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LG그룹 오너가를 대상으로 제기됐다. 지난 1월 말 LG그룹 구본무 회장의 서울 한남동 자택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 LG유플러스 하청업체 노동자(희망연대노조)들을 상대로 ‘업무에 방해가 된다’며 자택 앞에서 벌어지는 집회를 막아달라는 가처분신청을 냈기 때문이다. 이를 보고 일각에서는 ‘乙을 이용해 乙을 막는 꼴’이라는 뒷말이 흘러나왔다. 구 회장을 두고 ‘슈퍼甲’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제기되기도 했다.
 
결국 구 회장 고용인들이 낸 가처분신청으로 인해 고용 조건을 개선해달라고 요청하던 이들의 집회는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구 회장의 고용인들이 이와 비슷한 가처분신청을 낸 것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자 희망연대노조는 ‘이들의 명의를 자신의 소송에 상습적으로 이용해온 것이 아닌가’라는 의구심을 드러냈다.
 
지난 1월 LG트윈타워 앞에서 집회를 연 희망연대노조에 대해 LG트윈타워에 입주한 식당과 시설관리업체 등이 가처분신청을 낸 바 있다. 게다가 지난 2013년에는 구 회장 자택 근처에서 집회를 연 LG전자 하청업체를 상대로 또 구 회장 자택의 같은 고용인들이 업무방해금지 가처분신청을 냈기 때문에 희망연대노조가 이러한 의심의 눈초리로 구 회장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구 회장뿐만 아니다. ‘검은머리 외국인’으로 비판의 대상이 된 범한판토스 구본호 부사장도 마찬가지로 乙을 이용해 또 다른 乙에게 횡포를 부리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지난달 <SBS뉴스>에서 구 부사장이 대리인 A씨를 이용해 구 부사장 건물에서 가게를 운영하는 세입자를 압박했다고 보도하면서 대리 갑질 논란이 불거졌다.
 
물론 구 부사장이 직접적으로 나선 것은 아니다. 그러나 A씨가 구 부사장의 권한을 위임받은 대리인이라고 하더라도 세를 올리려고 압박하는 등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구 부사장이 A씨를 이용해 세입자들에게 갑질을 자행한 것 아니냐는 것이다.
 
서로 6촌 관계인 구 회장과 구 부사장이 이렇게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논란에 휩싸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물론 LG그룹과 범한판토스 측에서는 각각 “자택에서 하루 종일 일해야 하는 고용인들의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했다”, “A씨의 월권이었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과연 을의 입장에서 갑의 동의 없이 이러한 일을 벌일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싶다. 또 언제쯤이 돼야 한국사회에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라는 뜻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단어가 자연스러워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현대 사회에서 자본이란 중요하다. 하지만 단순히 더 가졌고 덜 가졌음으로 인해 사회적 갑과 을이 나눠지고, 여기서 발생하는 갑의 폭력이 용인돼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다. 물론 을 뒤에 숨어 은근하게 생기는 갑질도 마찬가지다. 이러다가는 갑질이 아닌 병(丙)을 향한 ‘을질’이 새로운 폭력의 트렌드가 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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