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사람은 억울하다거나 진실을 죽음으로 밝히겠다는 의지를 본질 삼아 자살하지 않는다. 눈앞에 있는 세상을 스스로 등지는 것은 모종의 결심이 아니라 자존감의 형해화에 기인한다. 무기력의 부피를 전신의 피부로 절감할 때에라야 비로소 삶을 ‘포기’ 한다. 자신을 둘러싼 세상으로부터 질식할 것 같을 때 고통을 선제적으로 방어하기 위한 선택이 자살이란 점에서,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자살은 일종의 타살이다. 숨 쉴 틈 하나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든 억울한 자살의 핵심은 교살에 의한 질식사다.

경제와 문화가 급격히 발달하고 자본의 불균형이 우리 생의 궤도를 좌지우지 한 이래,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사회 난맥상은 어느덧 개개인의 삶을 물 밑으로 끌어들이는 중요기제로 작동하는 중이다. 평이하던 생활은 점차 타인 혹은 집단의 욕망과 얽히고 설키며 복잡도가 수직상승하는 형태로 일상을 뒤엎고 누구도 이를 쉽게 벗어나지 못한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정치와 자본에 동기화 되어있는 만큼, 집권세력이 바뀌거나 자본가의 생존루트가 수정 될 때마다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생존 범위도 달라진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자살했다. 지난 MB정권에서의 자원 외교와 관련해 범죄혐의를 받던 중이었다. 전·현 정권의 권력구도를 건드리는 중대한 사안이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음모론까지 불러올 정도로 충격이 적지 않다.

보수 정권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정권에서도 여러 이유로 유력인사가 자살했었다. 어떤 면에선 사회의 발달속도에 비해 개인의 욕망과 현실 사이를 중재할 국가의 능력이 얕다는 반증이다. 우리가 보다 효과적으로 서로의 이익균형을 이룰 수 있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면, 목숨을 건 항변이라는 형식을 빌린 자살로서 삶에 대한 무기력을 현실화 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자신에 대한 처우가 부당하다 여겨질 때 이를 풀어낼 수 있는 뭔가가 존재한다면 사람은 쉬이 목숨을 끊지 않는다. 나의 이익과 타인의 이익 사이에서 일어나는 오해와 갈등이 잘 중재되는 사회에서의 자살은 더 이상 억울하다는 말로 변명되지 않는다. 억울하면 출세 할 게 아니라 억울하면 고소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세상이라면 절망에 가까운 무기력이 덩치를 키울 일은 줄어든다.

거꾸로 보면, 억울해도 고소해봤자 별 볼일 없는 세상이므로 사회의 중재에 기대지 않는 활로를 찾게 된다. 사업을 위해, 또는 생존을 위해 부정한 수단에 의지하는 것이 그런 이유다. 서로의 아킬레스건을 움켜쥐지 않고는 당장 질식할 거 같은 심정이 되면, 여간해선 의지만으로 버텨낼 사람이 없다. 결과적으로 모두가 권력이라는 잉크로 작성한 계약서에 사인하게 된다. 이러한 생태계에서 부정의 표본으로 지목되는 사람은 법리에 따른 평가가 아니라 동맹으로부터의 왕따를 당하는 것이 현상의 본질이다. 따라서 자살이라는 질식사는 억하심정으로 가슴을 쥐어뜯는 괴로움이 아니라 자신의 기반이 사라지는 절망감에 목을 쥐어뜯는 고통의 결과다. ‘나’를 부양 해 줄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기에 발버둥을 멈추는 것이다.

경제적 부를 위해 우리사회의 어떤 가치가 희생돼 가는지를 보아야 하는 것은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유독 2007년 대선에서 보수 정권이 집권한 이래 또다시 보수정권으로 바뀐 이후로도 사회의제의 열쇠를 쥔 사람들의 자살 사례가 뉴스에 많이 올라오는 것을 그저 간과할 수는 없다. 조금만 첨예한 대립이 일어나는 지대라면, 그리고 그것이 정치지형과 맞닿아 있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목을 매고 연탄불을 피우는 사람들 소식 천지다.

보수정권이 보수적으로 개인의 안락을 추구한 것이 맞다면 이런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정상이다. 국정 시스템과 사회안전망을 더욱 보수적으로 손보고 급진적인 에너지 준위를 가라앉혔다면 이토록 죽음이 일상화 되지 않았어야 맞다. 그러므로 보수정권 이후로 권력이 갈등의 중재에 쓰이는 대신 약체에 대한 부담전가의 지렛대로 쓰이고 또한 빈도가 높아졌음을, 그들의 잇따른 자살이 증거하고 있다.

앞서 밝힌 것처럼 질식할 것 같은 왕따의 심정이 되어 변변한 저항의 기력조차 없어졌다고 느낄 때까지 여러 손이 목을 조인다. 그러면서 동시에 도움을 요청하느라 버둥거리는 손을 뿌리친다. 이런 현상은 단지 사회가 각박해져 가기에 필연적으로 우리 앞에 다가오는 디스토피아적 미래소설의 경향과 거리가 멀다. 집권세력이 수성에 몰입하는 동안 권력으로서 갈등을 누르는 습관에 의해 하부로 전가되는 힘의 운동일 뿐이다. 작년에 대통령을 보좌해야 할 사람들의 구설수가 어떤 식으로 진압됐는지를 보았다면, 이제 이런 모습은 대한민국 보수정권의 클리셰라고 부를 만 하다.

그 증거가 있다. 우리는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정부가 세월호를 그야말로 ‘처리’하고 있는 모습을 일 년째 보아오고 있다. 유가족들이 사회로부터 질식사할 때까지 옥죄고 또 옥죈다. 이쯤 되면 이 나라는 민주국가는커녕 인간성을 보호하는 기본적인 기능조차 마비된 나라라고 할 수 있다.

사고가 일어나기 하루 전인 2014년 4월 15일까지, 세월호 유가족들은 평범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었다. 누가, 언제, 무엇을 통해 다음 왕따 타겟이 될지 모르는 나라.

그게 바로 지금의 대한민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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