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20세기 독일의 위대한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는 서사극의 창시자로 잘 알려져 있다. ‘서사극Episches Theater’이란 관객들이 무비판적으로 감정을 이입하는 드라마적인 연극을 배척하고, 사건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고 관찰할 수 있도록 하는 연극을 일컫는다. 극적이고 인과적으로 연출되는 기존의 연극과 달리 서사극은 장면들의 관계가 느슨하고, 극중 몰입을 방해하는 장치들이 끊임없이 개입한다. 1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경기 불황으로 인한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신음하던 독일 시민들은 암울한 현실로부터 도피하기 위해 연극이나 영화와 같은 대중문화를 소비하였다. 당시 지배계층 또한 이를 간파하고 있어, 대중문화를 오락의 차원으로 국한시켜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였다. 브레히트는 대중들이 현실의 잘못된 권력 구조와 그로부터 억압받는 자신의 처지를 명확히 직시해야만 현실의 변혁이 가능하다고 보았고, 이에 연극이라는 장르를 교육의 도구로 삼았다.

서사극의 장치 중 하나인 ‘게스투스Gestus’는 단순히 한 개인의 심리나 상황을 표현하는 ‘제스처’와 달리 인간 상호간의 관계와 그 관계를 둘러싼 사회적 상황까지 드러낸다. 초조할 때 다리를 떨거나, 동의의 표시로 손으로 OK 모양을 만드는 등의 몸짓은 제스처에 속한다. 그러나 게스투스는 물건 하나를 집어드는 동작 하나도 그 주체의 사회적 신분이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천차만별이어야 한다. 그렇다면 관객들 또한 물건을 집어드는 동작 하나에서도 여러 가지를 추론할 수 있게 된다.

브레히트는 서사극뿐만 아니라 산문을 통해서도 대중들이 현실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사고를 훈련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는데, <코이너씨에 대한 이야기들 Geschichten vom Herrn Keuner>이 바로 그것이다. 그 중 <폭력에 맞선 조치들>을 한 번 살펴보자. 코이너씨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폭력에 반대하는 발언을 했는데, 사람들이 뒷걸음질로 도망치길래 뒤를 보았더니 그의 등 뒤에 폭력이 서 있었다. 그는 “폭력을 지지한다”고 말한 뒤 자리를 빠져나왔다. 제자들이 그를 책망하자 코이너씨는 “나는 폭력보다 오래 살아야 해”라며 이야기를 하나 들려준다.

불법의 시대에 ‘아니오’라고 말하는 것을 배운 바 있는 남자의 집에 한 기관원이 찾아온다. 그는 남자에게 증명서를 한 장 내밀어 보이는데, 거기에는 기관원이 발을 들이는 집은 그의 소유가 되며, 그의 눈에 띄는 사람은 자신의 시중을 들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기관원은 남자의 집을 제 것인 양 여기며 남자를 향해 “자네 내 시중 좀 들어주겠나?” 하고 물었다. 그 날부터 남자는 기관원을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며 온갖 수발을 들었다. 그러나 단 하나, 말은 결코 하지 않았다. 7년 뒤 너무 많이 먹고 움직이지 않아 뚱뚱해진 기관원은 죽자, 남자는 기관원을 이불에 둘둘 말아 집 밖으로 내보낸 뒤에야 “아니, 싫소.”라고 대답하였다.

아마도 나치와 폭력의 시대였을 ‘불법의 시대’에 기관원에게 남자가 ‘아니오’라고 즉각 말했다면 그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대신 그는 기관원이 죽은 뒤에야 ‘아니오’라고 말을 뱉는다. 그의 대답에 따르면 7년 동안 기관원의 수발을 든 남자의 행동은 겉보기와 달리 기관원의 말에 응하는 행동이 아니라 반대하는 행동이었던 셈이다. 기관원에 순응하는 그의 태도는 폭력 앞에 자칫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는 거부와 저항의 태도로 읽을 수도 있다. 불법의 시대를 버텨낸 남자의 태도는 읽는 이들에게 이야기의 맥락과 정황을 성찰하게 한다는 점에서 게스투스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남자의 게스투스에는 한 가지 무시무시한 것이 숨어 있다. 7년 동안 자신의 의견을 유보하고 폭력에 순응한다는 것은 보통의 정신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 식의 저항을 관철해낸 이의 정신이 어느 정도는 미쳐있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나는 지울 수가 없다. 폭력을 견딤으로써 폭력에 저항한 이는 종국에는 그 스스로가 아주 훌륭한 폭력이 되는 것은 아닐까? 7년을 버틴 남자는 결국 죽은 기관원과 별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여기에서 우리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게스투스를 읽어낼 수 있다. 독재와 권위주의에 오랜 세월 찌들어온 한국 사회는 그것을 마침내 탈피하였다고 여겨졌던 순간들에도 번번이 권위주의적이지 않았던가. 단지 살아남기 위해 그것을 묵묵히 견디고 버텨낸 이들의 가슴 속에는 영원히 그것이 붙박여 있는 것은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가슴 속에 붙박인 그것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상식적으로 옳지 않은 정치적 결정들을 태연하게 옹호하거나 혹은 지나치는 것은 아닌가. 그렇다면 우리는 자신의 태도를 지금부터라도 반추해볼 필요가 있다. 아주 작고 사소한 태도 하나에도 나의 의지만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작동하고 있을지 누가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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