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주희 기자

【투데이신문 이주희 기자】책상 서랍 속에서 깊숙이 잠들어있는 2014년도 달력을 꺼내들었다. 떨리는 손으로 몇 장을 넘기니 ‘2014년 4월’이 나타났고 이내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끔찍하고 잔인했던 세월호 참사 1주기가 다가오고 있다. 달력을 두고 보니 시간이 빠르게 흘렀음을 새삼 느낀다.

아픔, 분노, 슬픔이 진하게 서려있는 세월호 참사.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 자체가 기자에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평소엔 몰랐는데 막상 글을 쓰려고 하니 주체할 수 없는 거대한 슬픔이 밀려와 조금 애를 먹었다.

기자를 괴롭힌 슬픔의 정체는 바로 세월호 참사 유가족이었다. 기자는 취재를 다니면서 세월호 유가족의 모습을 지켜봐왔다. 카메라 뷰파인더를 통해 자식을 잃은 부모의 모습을 볼 때마다 눈물이 쉬이 그치질 않았다. 그래서 취재가 끝나면 카메라 몸통 주변이 늘 젖어 있곤 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1년이 지난 지금도 가슴이 아려온다.

세월호 참사 1주기를 앞둔 지금, 돌이켜보면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마음 같아선 관련 사건을 모두 다루고 싶지만 이번 기사에서는 현장을 누볐던 기자의 발걸음 일부를 되짚어보려 한다. 

1년 전 수학여행을 떠난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 325명을 비롯해 총 476여명을 태운 여객선 세월호가 침몰했다. 4월 16일 오전 10시 30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맹골수도의 바다에서 꽃다운 아이들은 생을 마감했다.

사고 초기, 여러 매체에서 ‘탑승객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내보냈다. 속보경쟁에 급급한 나머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 않은 채 기사를 낸 일부 언론사 때문에 정부의 초동 대처가 늦어지는 등 인명구조 시간을 놓치는 결과가 초래됐다.

윤동주의 시 <참회록>에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자”는 대목처럼, 당시 ‘전원 구조’라는 오보를 낸 언론사들은 매일 손과 발로 거울을 닦는 마음으로 통렬히 반성해야 할 것이다.

오보에 분노하면서 한편으로는 기적이 일어나길 간절히 바랐다. 대한민국 국민 모두가 ‘기적’을 바랐지만 기적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이 상황을 더 이상 앉아서 지켜볼 수 없어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5일 만에 무거운 마음을 안고 진도로 향했다.

<본지> 기자들은 진도체육관팀과 팽목항팀으로 나눠서 취재를 시작했다. 기자가 향한 곳은 진도체육관이었다. 체육관 내부는 침묵 속 애통함이 묻어나 있었다. 많은 이들이 구조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며 지친 몸을 바닥에 눕히고 있었다. 실종자 시신이 발견됐다며 인상착의를 설명하는 관계자의 목소리와 이를 듣고 달려가는 가족들의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현실에 지옥이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었다. (2014년 4월 20일자 기사 [세월호 참사-르포] 잔인한 시간이 흐르는 곳, 진도 실내체육관을 가다)

닷새 뒤에는 세월호 희생자 안산 임시분향소 현장을 찾았다. 학생증 사진이 영정 사진으로 바뀐 비통한 현실 앞에서 사람들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고향에 있는 노모에게 자녀의 죽음을 전하지 못한 아버지의 절규가 아직도 귓가에 맴돈다. (2014년 4월 25일자 기사 [세월호 침몰-르포] “사랑하는 아들, 딸아! 그곳에선 따뜻하길”… 안산 임시분향소 현장)

그해 8월 28일에는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이 ‘진상규명, 재발방지대책, 안전한 사회건설 구축’을 바탕으로 한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외치며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 농성을 진행했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을 공감하고 위로하는 시민들을 보면서 한국사회의 ‘희망’을 발견했다. (2014년 8월 28일자 기사 “세월호 아픔, 함께 할게요”… 광화문에 모인 사람들)

한편 자식보다 하루를 덜 살고 죽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거늘, 슬픔을 안고 힘겨운 단식을 하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 앞에서 극우성향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회원들의 폭식 투쟁은 분노를 넘어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지난 2일에는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생존자·피해자·유가족이 주축으로 진행한 기자회견과 삭발식에 다녀왔다. 세월호 특별법을 무력화시키는 시행령 폐지와 세월호 인양 등을 외치며 머리를 밀었다.

한 유가족은 “작년 4월 16일, 아이들이 즐거운 마음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는데 벌써 1년이 다 됐다”며 “얘들아, 미안하다. 이 머리가 다 자라기 전까지 진실규명이 이뤄졌으면 한다”고 통곡했다. 또 다른 유가족은 “머리는 자르면 또 난다. 하지만 우리 아이는 절대 못 돌아온다. 목이 빠지게 기다려도 못 돌아온다”면서 “곧 4월 16일이 돌아온다. 부모들이 왜 이렇게 절규하는지 우리 모두 가만히 있지 말고 짐승이 아닌 인간 사는 사회를 만들자”고 호소했다. (2015년 4월 3일자 기사 [르포] 세월호 유가족, 통곡의 삭발식 현장… “눈물이 비처럼 내렸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흘렀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세월호 유가족과 국민들의 외침이 허공에서 메아리치고 있으며 정부가 약속했던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은 제자리걸음이다.

그동안 세월호 유가족들은 자식 잃은 아픔을 꾸역꾸역 삼키며 촛불을 들었고 밥도 굶었다. 또 대통령을 만나게 해달라며 국회를 찾아갔으며 도보행진도 했다. 이제 참다 참다 삭발을 하기에 이르렀다.

기자가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많은 취재 현장을 다녔지만 유가족들의 외침은 결국 이 세 마디로 귀결된다.

“내 자식이 왜 죽었는지 밝혀달라”, “또 다시 이런 사고가 일어나지 않게 하라”, “배를 인양해달라”

세월호 유가족의 외침이 묵살 당하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들의 절규가 사라질 것인가. 답은 멀리 있지 않다. 이 참사를 잊지 않는 국민, 그리고 세월호 유가족의 목소리에 귀기울이며 철저한 진상규명과 재발방지 마련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정부에 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한, 4월의 잔인했던 악몽은 계속 되풀이될 것이다. 이것이 세월이 흘러도 우리가 세월호 참사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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