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미선 칼럼니스트
·스토글 대표이사
·경찰교육원 외래교수 / 교보문고 독서코칭 전문강사 / 아동문학가

【투데이신문 윤미선 칼럼니스트】우연히 <길>이라는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게 되었다. 외딴 시골 온종일 쌓인 눈을 치우며 건널목을 지키는 건널목지기 할아버지와 굽어진 허리를 한 손으로 받치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보따리를 들고 건널목 철로 위에서 잠시 쉬어가는 할머니가 있다. 할아버지는 쌓인 눈을 치우다가 눈 속에서 또르르 굴러오는 감자를 매번 맛있게 먹는다. 어느 날 건널목지기는 할머니가 철도에 앉아 있을 때 미처 철도 건널목 차단기를 내리지 못해 그만 할머니가 죽고 만다. 할머니가 있던 자리에는 보따리 속에서 나온 상처 난 감자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 후로 철도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 애니메이션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아마도 건널목을 지키는 할아버지와 건널목을 건너는 할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들 모두 살아가는 모습은 달라도 결국 같은 길을 가게 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마지막 장면에서 할아버지가 다시는 기차가 오지 않는 철도역을 떠난다. 할머니가 늘 쉬어갔던 철도 길에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철도 길을 따라 가는 모습은 우리들의 쓸쓸한 인생의 길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애니메이션은 어떠한 설명도 대화도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큰 사건이 전개되는 것도 아니다. 무심히 보면 건널목지기 할아버지와 건널목을 건너는 할머니의 일상생활로만 비쳐질 수 있다. 하지만 눈이 쌓인 허허 벌판에 덩그렇게 놓여 있는 철도 건널목 그리고 건널목을 지키는 일과 건널목을 건너고자 하는 일상의 반복된 생활을 하는 두 노인. 두 노인은 매번 인사도 대화도 나누지 않는다. 할아버지는 언젠가부터 할머니가 쉬고 간 뒤, 눈 속에서 감자 한 개를 발견하게 되고 그 감자를 맛있게 간식 삼아 먹는다. 그 감자 한 개는 두 사람 사이에 무언의 안부이기도 하였다.

현대에서 소통의 길은 참 다양해 졌다. 대표적으로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인 페이스북은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으로 불릴 만큼 영향력이 대단해 졌다. 순식간에 전 세계적으로 친구를 맺게 되고 이는 개인의 가치로도 평가된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다수, 다수와 다수 등 소셜네트워크는 빠르게 더 강하게 그리고 더 넓은 인맥을 구성하게 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우리는 인간 대 인간으로써 느껴지는 느낌은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직설적인 표현에 익숙해지고 짧은 문자와 이모티콘과 같은 기호로 의사를 전달하는 한계점이 혀끝에서만 나오는 메마른 대화가 있을 뿐이다.

눈에 덮여 있는 황량한 외딴 시골 풍경이 가져다주는 외로움은 한 개의 감자 속에 담겨진 따스한 마음으로 그 아련함이 더해온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서로 다른 길을 가지만 결국 같은 길을 가는 두 노인만의 표정과 행동에서 무언의 소통의 길이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때로는 대화에서 말이 전부가 아닐 때가 있다. 오히려 말이 공해라고 느껴질 때가 있다.

음악에서 쉼표는 다음 진행의 도약을 위하거나 호흡조절을 위해 있고 때로는 극적인 상황반전효과를 노리기도 한다. 또한 정신없이 뛰어왔던 현대인들에게는 잠시 일상생활을 벗어나 쉼표를 찍는 것이 힐링이다.

스피치 표현 중에도 ‘포즈’라는 것이 있다. ‘사이’, ‘공백표현’으로 말과 말의 사이라든지 말하기 전의 어떤 시간적인 길이를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말이 제 구실을 다 하지 못할 경우에는 차라리 순수하고 진지한 침묵이 사람을 설득시킨다”고 말했다. 말이 없는 말의 세계가 때로는 더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 말을 잘 하는 것은 내 말을 듣는 상대방과 소통이 되어야 한다. 고개를 끄떡일 수 있게 하고 마음으로 공감을 불러 일어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잠시 나를 벗어나 상대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연습을 해야 한다. 관계형성을 경제적 가치로 여기는 우리들에게 감자 한 개로 서로의 안부를 대신 할 수 있는 두 노인의 마음으로 들어가는 소통의 여유가 필요할 때이다. 때로는 느낌이 말보다 클 때가 있다는 것을 경험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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