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
[칼럼] 화장실 들어갈 때 마음과 나갈 때 마음
  • 이종우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5.01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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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1606(선조 39)년 5월 28일. 한양의 창의문(彰義門) 밖 탕춘대(蕩春臺)라는 곳에서 수륙대회[水陸大會-불교에서 물과 육지에서 헤매는 외로운 영혼과 아귀(餓鬼)를 달래며 위로하기 위하여 불법을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종교의식]가 열렸다. 『선조실록』에 따르면, 그 규모가 매우 커서, 도성 안의 사녀(士女)들이 철시(撤市)까지 하고 달려갔다고 한다. 또한 사람들이 성(城)을 넘어가기도 하고 문틈을 뚫고 나가기도 하여 도로를 꽉 메웠다는 기록도 나온다. 이러한 기록들을 보면 그 때 있었던 수륙대회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 소식을 들은 선조는 이 수륙대회에 대하여 조사할 것을 지시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성리학을 국가의 사상적 배경으로 삼은 국가였고, 특히 조선시대 왕과 유신들은 이단(異端)을 강력하게 배격하는 벽이단(闢異端)을 매우 중요한 사안으로 다루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큰 불교 행사는 벽이단 차원에서라도 강력하게 막을 큰 사건이긴 했다는 의미다.

이 사건에서 눈여겨 볼 것은 선조의 반응이었다. 수륙대회를 보고받은 뒤 선조는 비망기로 승정원에 다음과 같이 전교하였다.

“듣자니, 매우 경악스럽다. 이와 같이 대중을 미혹시키는 일과 도내에 승려가 출입하는 등등의 일에 대해 형조와 한성부에서 엄금하고 통렬히 다스려야 하는데도 이런 일이 있게 만들었다. 우두머리가 되는 승려와 기타 사람들을 잡아 가두고 형추(刑推, 죄인의 정강이를 때리는 형벌)하여 치죄할 것을 사헌부에 이르라.”[『선조실록』200권, 선조 39(1606)년 06월 1일(무술) 4번째 기사]

이 기록을 보면, 선조는 수륙대회에 대하여 매우 강력하게 대처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와 같은 행동은 이전에 선조가 보여주었던 불교에 대한 자세와는 많이 다른 것이었다. 선조는 즉위 초에 불교를 억압할 것을 요구하는 유생(儒生)들의 건의에 대하여, “훗날 참된 선비가 되어 조정에 서서 과인(寡人)을 보필하고 이 나라 백성들에게 은택을 베풀어 치도(治道)를 융성하게 하고 풍속을 아름답게 한다면 오도(吾道)가 쇠하고 이단(異端)이 성한 따위야 걱정할 것도 없다. 어찌 꼭 구구하게 강론하여 마치 태무(太武)가 승려를 죽이고 사찰을 헐어버린 것처럼 해야 되겠는가.”[『선조실록』 5권, 1571(선조 4)년 3월 6일(정묘) 2번째 기사]라고 답을 내렸다. 즉 유생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관리가 되고 좋은 정치를 한다면, 자연스럽게 성리학이 흥하고 불교가 쇠퇴할 것이라는 온건한 답변이었던 것이다.

특히 임진왜란이라는 풍전등화(風前燈火)의 위기를 겪었을 때 선조는 적극적으로 불교를 용인하고 옹호했다. 그래서 승병(僧兵)들을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왕의 가마를 호위하도록 명령했고, 공을 세운 승려들에 대하여 강력하게 포상했다. 그런데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불교에 대한 선조의 태도가 180도 바뀐 것이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이것은 수륙대회에 대한 유간(柳澗)의 보고에 대한 선조의 답에서 알 수 있다.

“유복통(劉福通)의 변이 한양 안에서 일어날 수도 있으니, 그 무리를 엄히 다스려서 뒷날의 우환을 근절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경성(京城) 근처의 사찰로 병화(兵火)에 불타버린 것은 다시 중창(重創)하지 못하게 해야 된다.”하였다. [『선조실록』 200권, 1606(선조 39 6월 1일(무술) 6번째 기사)

위에서 언급한 유복통의 변은 중국 원나라 때 일어났던 홍건적의 반란 중 하나로, 유복통은 그 우두머리였다. 즉 선조는 대규모의 민란(民亂)이 일어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당시의 민심이 얼마나 지배층에게 반감을 가졌고, 그것을 지배층이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다.

임진왜란과 그 이후 선조는 자기 한 명 살자고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왕으로 평가받았다. 그리고 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이전까지 있었던 집권층의 모순을 개혁하는 것이 아닌 강력하게 백성들을 통제하는 방식으로 기득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심지어 국가 위기 극복에 동참했던 불교에 대해서까지 강력하게 통제하면서까지 기득권을 지키려 했다.

4.29 재보선이 여당의 완승으로 끝났다. 그러나 그 이전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에 대한 후속 조치, 성완종 리스트 등은 그 조치를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선거는 또 있을 것이며, 그보다 무서운 역사의 평가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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