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욱 칼럼니스트
▸저서 <삼국지인물전>, <역사, 어제이면서 오늘이다> 외 4권

【투데이신문 김재욱 칼럼니스트】며칠 전 10살 먹은 아이가 썼다는 글이 화제가 됐다. 학원에 가기 싫은 마음을 시로 표현한 글이었다.

‘학원에 가고 싶지 않을 땐 이렇게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어 이빨을 다 뽑아버려 머리채를 쥐어뜯어 살코기로 만들어 떠먹어 눈물을 흘리면 핥아먹어 심장은 맨 마지막에 먹어 가장 고통스럽게’

내용도 내용이려니와 섬뜩한 그림이 옆에 붙어 있으니 굉장히 무서웠다. 이 글은 지난 달 출간된 동시집 『솔로강아지』에 수록되어 있었고, 위의 글이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반향을 일으키자 출판사에서 책을 전량회수 조치하도록 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를 침해 할 수도 있다는 우려 섞인 반응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런 조치가 취해졌으니 전반적으로 이 시의 폭력성에 거부감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았다고 볼 수 있겠다. 거기에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위력을 떨치고 있는 ‘효’의 가치가 더해지면서 결국 저 글은 ‘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됐다.

지난 일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이 어쩌면 소용없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런 조치가 매우 부당하고 무책임한 것이었음을 말하고자 한다. 우선 그 시가 예술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는 제쳐 둔다. 분명한 건 그 시에는 메시지가 있고, 지금의 현실이 들어 있다는 점이다. 그 증오의 대상이 엄마라고 하더라도,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마음이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것 때문에 글을 없애라 마라 할 권리는 아무한테도 없다. 읽고 평가만 하면 되는 것이다.

글은 작가의 손을 떠나는 순간 작가의 것이 아니다. 그 아이가 ‘엄마’에 대한 증오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드러냈다고 하더라도, 독자가 그 ‘엄마’를 지척에서 볼 수 있는 우리나라 교육현실,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옆으로 살짝 고개만 돌려도 알 수 있는, 이 나라에 살면서 나이 먹고 배울 만큼 배운 사람이면 충분히 알고 있는 이 지옥 같은 현실을 상징하는 시어로 읽어서 감흥을 일으킨다면 이 글은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부여받게 되는 것이다. 반면 ‘볼 것도 없다’, ‘쓰레기 같다’는 반응이 나온다면 그 자체로 ‘감상’ 또는 ‘평가’로 인정하면 그만일 것이다.

(이 작가의 어머니가 시인이므로 혹시 시에 손을 댔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더라도) 표면적으로 이 시는 열 살 먹은 어린 아이가 썼다고 알려졌다. 여기에 이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고질처럼 박혀 있는 ‘나이에 대한 관념’이 문제의 본질을 흐리기 시작한다. 표현에 과격함이 들어있다손 치더라도 ‘어린 아이가 오죽하면 저런 글을 썼을까’하면서 시가 의미하는 것에 주목하기 보다는 ‘어떻게 어린 아이가 저런 패륜적인 글을 쓸 수 있는가’하면서 지엽적인 문제를 가지고 분개한다. 알고 보면 이 분개하는 마음이 이 시의 유통을 가로막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아닐까 한다. 어린 아이는 만날 노란 병아리, 푸른 하늘, 아빠와 크레파스만 써야 하나? 도대체 어느 누가 ‘시는 이래야 한다’ 거나 ‘그 나이엔 그것만 해야 한다’고 정해 놓았는가?

분명히 이 글은 충격적이다. 또래의 아이들은 쓰기 어려운 글인 것 같다. 그러니까 이처럼 화제가 된 것이겠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비정상적인 어린 아이가’가 쓴 글이라고 일축해 버리는 건 의도적인 회피에 가깝다. 저런 표현이 나왔다는 건 그 표현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은 이전부터 조금씩 만들어져 왔음을 의미한다.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지금 이 시간에도 목숨을 끊는 청소년이 있다. 몇 년 전에는 초등학생이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며 태권도복 띠에 목을 매어 자살했다. 아이들은 목숨을 걸고 이런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게 해달라며 어른들한테 울부짖었는데 과연 이 사회의 어른이라는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것은 무엇인가.

아이들한테 천국만 생각하라고 강요하고, 입시에 맞춰져 있는 교육제도에 대해선 ‘어쩔 수 없다’며 한 마디 목소리를 내지도 않았다. ‘아이들이 불쌍하다’고 했으면서 도리어 아이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 아이들이 자살을 하는 걸 보고도 ‘내 아이만 안 죽으면 된다’, ‘내 아이 대학만 잘 가면 된다’며 이런 비정상적인 입시지옥을 합리화했다. ‘엄마를 씹어 먹고 삶아 먹는다’는 표현이 나오도록 한 건 그 어린 아이의 조숙한 광기도 아니고, 그 아이의 재능을 팔아 한 몫 잡아보려는 아이 엄마의 속물적 의도도 아니다. 평소에 바른 말 고운 말만 쓰며 아이를 사랑한다고 떠드는 ‘엄마’들이 급기야 저런 표현이 세상에 유통되도록 만든 장본인들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아이(아이 엄마)가 심리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약한 아이가 강한 어른을 상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표현을 고작 케케묵은 윤리로 재단해 버린 것도 부끄러워해야 할 일인데, 멀쩡한 사람을 환자로 만든다. 언제부터 우리나라에 이토록 신경정신과 의사가 많았던가.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 사람은 그 아이가 아니라 그 아이의 손목을 꺾으려고 덤빈 어른들이다. 똥무더기에 향수를 뿌려 놓고는 ‘향기롭다고 해’, ‘이건 향기로운 거야’ 하는 사람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이건 그냥 똥인데요.’ 하는 사람이 치료를 받아야 하는가. 잔혹동시를 성토하기 전에 우리 어른들은 잠재적 살인자라는 사실부터 깨닫고 반성해도 모자랄 판이다. 지금 우리는 이런 현실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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