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정신분석의 창시자이자 인간의 무의식을 발견한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문명이 태동하기 위해 필수적인 과정으로 ‘부친 살해Vatertotung’를 말한다. 인류 역사의 기원에는 모든 권력과 쾌락을 독점하는 ‘원초적인 아버지Urvater’가 군림하고 있다. 그의 아들들은 절대적인 아버지를 선망하는 동시에 증오하기에 공모 끝에 아버지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권력을 누리게 되지만 죽은 아버지는 없어지지 않고 사회를 작동시키는 ‘법’이 되어, 또한 아들들의 마음속에 ‘죄의식’으로 뿌리를 내려 영생한다. 프로이트는 아버지를 살해한 기억은 무의식 속에 억압된 형태로 보존되어 상속된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상속이 곧 인류의 역사인 바, 법과 제도를 통한 억압 없이 문명은 성립할 수 없다.

인간이 아버지를 살해한 태초의 기억은 어디까지나 가정일 뿐이며 그 인류학적 근원을 찾을 수는 없다. 단순히 인간 내면의 폭력적 성향에 대한 은유로 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동물적 세계를 벗어나 문명의 질서를 획득하기 위해 인간은 내면의 어떤 것을 억압하였다는 점이다. 이 억압된 것은 ‘상속’된다고 표현하였듯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내면에 남아 있다가 형태를 달리하여 바깥으로 분출된다. 예컨대 성적인 충동이나 일에 대한 열정, 예술적 활동, 유희에의 충동 등으로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애초에 내면에 억압된 것이 없으면 이러한 충동 또한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문명의 억압이 지나칠 경우 보다 폭력적인 충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예쁘고 날씬하고 조신하게 굴어야 하는 등 문화적으로 많은 것을 강요당하는 여성이 일으키는 히스테리, 내면의 욕구를 억누르고 시종일관 점잖게 살아야 하는 목사님이 지하철에서 몰카를 찍는 것, 마음 놓고 뛰어 놀 한 뼘 공간도 없는 삭막한 도시에서 학업에 짓눌린 아이들이 게임에 중독되는 것 등등, 예로 들 수 있는 것은 많다.

오스트리아 작가 엘프리데 옐리넥의 <피아노 치는 여자>(문학동네, 2010)에서 과도한 억압의 결과물을 볼 수 있다. 어머니는 딸 에리카를 피아노 천재로 만들기 위해 피아노 연습 외의 어떠한 활동도 일절 금하고 남자 옆에는 얼씬도 못하게 한다. 어머니의 과도한 양육과 간섭으로 인해 에리카는 불감증에 걸리는 한편, 교외의 성인용품 가게에서 핍쇼를 보거나 포르노 영화를 보는 식으로 꽉 막힌 성욕을 해소한다. 그러나 이보다 극악한 것은 그녀가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면도칼로 자해를 할 때이다. 시종일관 옆에 달라붙어 있는 어머니 때문에 연애는커녕 자위도 할 수 없는 에리카는 가끔 제 몸을 면도칼로 그어 구멍을 만드는 것으로 욕구를 분출한다.

극도로 억압된 에리카의 삶은 예술에 대한 그녀의 태도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고고한’ 예술에 종사하는 그녀는 예술에 문외한인 대중들이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만 음을 빼먹으며 피아노 연주하여 그들을 조롱하는가 하면, 자신이 지도하는 학생들에게 위압적인 권력자 행세를 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언제라도 어머니 품으로 돌아가 뼛속까지 순종하고 싶은 열망을 품고 있다. 에리카의 비뚤어진 충동은 자신에게 매력을 느껴 접근하는 남학생 클레머에게 자신을 함부로 해달라는 요구사항을 전달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기에 이른다.

작가는 이 과격한 이야기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예술에 재능을 보인 옐리넥을 어머니는 음악신동으로 길러내기 위해 지나친 교육과 간섭으로 옭아매었다. 과도한 교육을 견디지 못하고 18살이 되던 해 정신분열과 발작을 일으킨 후, 옐리넥은 두문불출하며 온갖 잡다한 소설들을 강박적으로 읽고 이를 토대로 문학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완전히 고장난 심신을 문학으로 승화시킬 수는 있었으나 결코 완전히 치유되지는 못했다. 실제로 그녀는 대중과의 접촉을 꺼려하여 2004년 노벨문학상 수상 당시에도 시상식장에 불참한 바 있다.

과도한 교육, 말하자면 죽은 아버지를 과도하게 강요당할 때 아이의 내면은 해소되지 못한 불만으로 부풀어 오른다. 이 교육을 어머니가 면밀하게 주도함으로써 불만은 더욱 증폭된다. 어머니의 과도한 집착으로 에리카가 뻣뻣한 통나무처럼 불감증에 걸렸듯이, 인간이 결핍을 부정당하면 억압된 것을 해소하지 못한 채 안으로 키워나가 병들게 마련이다. 적당한 수준의 억압과 결핍으로부터 인간 문명은 종교, 사랑, 예술과 같은 것을 오랜 세월 성취해왔다. 그런 점에서 세간이 주목하는 <솔로 강아지>는 비난받기는커녕 한국 사회의 비정상적인 교육열을 훌륭히 승화시킨 한 사례로 보아야 마땅하다. 과도한 교육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가 엄마를 실제로 죽이지 않고 ‘시’를 통해 표현하였다면 이는 아이가 내면의 불만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가장 건강한 승화요, 가장 윤리적인 행위일 수 있는 것이다. 동일한 상황에서 시를 쓰기보다 불만을 안으로 키우거나 다른 방식으로 해소하려드는 아이와 견주어보면 이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를 모르는 어른들은 겨우 10살 난 아이를 손가락질하는 것으로 제 분노를 표출하려 드니, 과연 누가 누구를 가르쳐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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