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명제는 너무나 익숙한 것이라 여기에 대해 군소리를 붙이는 것 자체가 민망할 정도다. 그만큼 사람은 주위 사람들의 평판에 결정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영향을 받는다. 하지만 사람에 대한 평가는 한 개인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만으로 끝나지도 않는다. 그 인물의 활동과 관련된 사회적 문제에 대한 평가와도 직결되는 것이다.

최근 임진왜란과 관련된 책을 쓰면서 이 점을 절감한 바 있다. 당시 전쟁의 위협을 파악하기 위해 일본에 파견된 ‘통신사’ 중 황윤길과 허성은 전쟁의 위협을 경고한 반면, 김성일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보고했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그렇지만 그 이후 양쪽 인물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결론지어졌는지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거의 관심조차 갖지 않는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사실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를 주는 것은,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뒤의 문제라 해야 할 것 같다. 결과가 명백하게 드러난 지금, 양쪽 중 누가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한 보고를 올렸는지는 분명하다. 그리고 당시 상황을 검토해 보아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을 알아보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이 점을 감안해보면, 적어도 전쟁이 일어난 다음에는 당대 사람들이 이를 예고했던 사람들에게 최소한 미안하게 생각해야 했던 것이 도리일 것 같고 실제로 그렇게 했을 것 같다.

그런데 대부분의 평가는 완전히 다르다. 김성일은 당대 대부분의 지식층에게서 기개를 상징하는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아왔고, 이러한 평가는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반면 황윤길과 허성은 소심한 겁쟁이라고 인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별다른 의구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는 평가이기는 하지만, 당시 상황과 연결시켜 생각해 보면 좀 섬뜩함을 느껴야 할 것 같다.

왜 양쪽 인물에 대한 평가가 이렇게 되었는지는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지난번 칼럼부터 시작해서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듯이, 이러한 평가가 내려진 의도는 뚜렷하다. 당시 기득권층이 걱정하던 사태는 전쟁으로 인해 국가와 백성이 피해를 입는 것보다, 대비를 하느라 자신들이 누리고 있던 특권을 포기해야 하는 것이었다. 즉 전쟁의 위기를 인정하면 대비를 하기 위해 자신들이 누리던 특권을 내려놓아야 하니, 아예 위기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한 셈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 자기들이 원하지 않는 말을 꺼낸 인물을 사회적으로 매장시켜 버린 것이다.

원칙대로 라면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국가적 위기를 자초 한 집단이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겠지만, 현실은 정반대가 되어 버렸다. 이런 사태의 후유증은 심각하다. 역사에 대해 좀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갖지 않는 틈을 타, 이런 수법을 이용하려하기 쉽다. 몇 백 년 동안 사리사욕을 위해 조작해놓은 평판이 통했고 지금도 통하고 있으니, 앞으로도 사리사욕부터 채워놓고 방해가 되는 인물을 매장시켜 버리는 수법이 사용되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현실 정치가 타당한 정책을 찾기보다, 상대를 모략해서 자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사회를 끌고 나가려는 경향이 강한 것도 이러한 수법과 무관하지 않다.

그동안 이런 경향이 여러 차례 지적되고 비판을 받아왔지만, 현실에서는 개선되기보다 악화되고 있는 것 같다. 개인적으로도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는 원인을 시사하는 경험을 하고 있다. 이는 며칠 전 과거 엔하(리그베다)위키라는 사이트에서 똑같은 데이터베이스를 인계받아 새로 개장된 나무위키라는 사이트에, 필자에 대한 인물 소개가 다시 떴다는 메일 한 통을 누군가에게 받은 데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찾아본 내용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이전의 엔하위키에서 악의적으로 작성해 올렸다가, 사람들의 항의를 받고 삭제된 바 있던 내용이었으니까. 그런 내용을 가지고, 이 업체는 엔하(리그베다)위키와는 관련 없다는 이유로 작성금지를 풀어버리고 해당 내용을 재작성했던 것이다.

도대체 어떤 기준으로 이런 내용을 작성해서 불특정 다수에게 퍼뜨리나 호기심이 생겨, 이곳의 운영방침을 살펴보았더니 눈길을 끄는 대목이 있었다. ‘나무위키에는 어떤 항목이나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지만, 몇몇 제한사항이 있다. 악의적인 편집 또는 문서의 무차별적인 곡해와 삭제는 반달리즘으로 간주되어 이용에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대목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방침은 좀 어이가 없다. 남의 인적사항에 대해 악의적으로 작성한 내용은 손 안대고 올리면서, 이런 내용에 손대려 하는 일은 남의 문화를 마구잡이로 파괴하려 한다는 의미의 반달리즘으로 간주하겠단다. 자신의 사이트에 올라간 내용이, 한 개인은 물론 관련된 사회적 문제까지 왜곡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을 당당하게 무시하는 이곳의 운영자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는 이런 꼴을 필자 혼자 당하는 것일 리도 없다는 점이다. 필자에 대한 악의적인 평판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권희영 교수 같이 극단적인 우파 논리를 비판한 점과 기성사학계의 식민사학적 경향을 비판한 것 등이 거슬렸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니 이곳에서는 필자와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처럼 매도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하겠다. 그리고 이런 사이트가 이곳만 있는 것도 아닐 것이다.

이런 현상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 지는 명백하다. 권희영 교수 같이 극단적인 성향을 우리 사회에 강요하려는 상황을 비판하면, 이곳처럼 통제를 받지 않는 사이트를 통해 그런 당사자에 대한 악의적인 평판이 퍼져 나아갈 것이다. 책임지는 자리에서의 공개 검증은 죽어라고 피하면서, 이렇게 일방적으로 매도할 수 있는 수단에 집착하는 행태를 보면, 그 의도가 좋은 것일 리는 없다.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자신들이 원하지 않는 의견을 펴는 사람이 어떤 꼴을 당하는지 똑똑히 보아두라는 협박 메시지나 다름없다.

이런 사태가 심해지면 사회 분위기도 흉흉해지다 못해 험악한 상황으로 간다. 대한민국 사회 뿐 아니라, 인류의 미래까지 비관적으로 보는 시각이 강해지는 이유는, 이렇게 흉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자들이 활개 칠 수 있는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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