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언론의 시선과는 달리 새정치민주연합 내부의 갈등은 지금 반드시 필요한 과정, 전혀 부정적이지 않은 현상이다. 정청래 의원이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회의 석상에서 주승용 최고위원에게 강경한 발언을 한 이후, 꼬리를 물고 친노, 비노, 문재인 리더십, 김한길 모략설 등이 꼬리를 물고 논란의 중심으로 소환되고 있다. 그러나 분화와 그에 따른 경쟁갈등이 과연 죄악인가.

우리 현대사에서 오랜 시간 야권의 지형은 민주화라는 하나의 목표 아래 수렴되어야만 했다. 연대와 통합은 시대적으로도 긴급하고 생존의 수단으로서도 가치가 있었다. 거대 수권 세력이 존재하는 정치환경에 따른 전략적 선택으로서, 여러 민주세력들은 대선이나 총선과 같은 주요 기회 마다 ‘일단 뭉쳐’를 외쳐야만 했다.

다양한 그들의 운동에 필요한 상수는 오로지 ‘민주화’ 하나면 충분했다. 따라서 야당의 야수성이란 시대의 공통핵심의제인 민주화 기치에 집착할 때 발현됐다. 유권자의 표심은 그 몰입이 보여주는 저돌성을 신뢰할 때 움직였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이라는 동력은 정치 세력화라는 측면에선 큰 의미로 작용하지만, 정치세력의 운전자본으로 기능할 필요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 운동세력은 국정수행을 요구받지 않지만 정치세력은 국정운영의 가능성을 증명해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정운영은 동시대의 시민들이 품어야할 소명을 구체화시키고 이의 방법론을 현실 속에 공통과목으로 제시함으로서 제대로 작동한다.

요컨대, 집권 이전엔 야권에게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의무로서 민주화라는 ‘시대소명이 부여’됐던 반면, 집권경험을 한 이후 민주세력이 시민사회에 복무하는 방식은 ‘시대소명의 발굴’ 이어야 한다.

새정치민주연합이 오늘날 역사로부터 요청 받는 것이 바로 현상을 꿰뚫는 창의적인 시대소명의 특정이다. 이들이 선거마다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배에 기름이 끼어 야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이 아니다. 단지 이 시대에 필요한 소명의 생산이라는 고유직무를 못해내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이를 위해 시민사회의 요구들을 가치 중심으로 재정의 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그 체계가 없다.

결국 민주화 운동을 통해 보유하게 된 민주담론 생산 장치를 이용해 시대소명의 도출을 위한 체계를 생산하려는 것이 문제다. 같은 두 바퀴 탈것이지만 자전거 생산 공장에서 오토바이 뼈대를 생산할 수는 없다. 새정연이 정부와 여당의 반민주적 행태에 맞서 선거 때 마다 민주주의를 환기시키는데도 패하는 이유는 유권자가 민주주의를 싫어해서가 아니라, 이들에게서 시민이 느끼는 갈증의 근원을 타격하는 소명의식이 보이지 않아서다. 그 결과 꼬일 대로 꼬인 현실을 푸는 것에 대한 기대도 접게 된다.

물론 2015년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민주주의를 목말라 할 만큼 정치적으로 퇴행한 것이 맞다. 그러나 교육수준의 상승, 부의 증가, 문화다양성의 확산 등으로 인해 사회변화의 요인들이 증가해 이전보다 공감각적인 정치적 해법이 필요해진 것 또한 현실이다. 천부인권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연장선으로서, 역사는 민주화세력에게 민주주의를 담지한 상태에서의 개척 소명을 다시금 요청해 오는 것이다. 새정연을 비롯한 야권세력은 우리 시대의 갈망을 정비하고 이를 시대소명으로 승화시켜 제언해야 한다.

3포세대조차 옛말이 된 시대의 청년층과, 자신의 노후와 자녀의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중년층의 경제적 추락, 그리고 OECD 노인 자살율 1위가 말하는 노년층의 몰락에서 보듯, 이 시대의 화두는 자연스럽게 “생존” 그 자체가 됐다. 이런 사회에서 청소년층은 생존에 관한 올바른 훈육을 받을 수 없고 다만 약육강식의 방법론만을 습득할 뿐이다. 대안제시의 역할이란 점에서 이 현상은 새정연을 비롯한 야권전체의 생존과도 동의어가 됐다. 나아가 기득권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느라 민주주의에 무덤덤한 여당으로 인해, 야권에겐 “민주적 생존”이라는 색을 구현해야 할 책무가 생겨났다.

이제 민주주의는 60년대 흑백 티브이로 보던 미국의 달 탐사선 착륙 장면 같은 게 아니라, 내 손 안의 스마트폰에서 총천연색으로 광화문광장을 훑는 동영상이 돼 지금 여기의 나에게 영향을 끼치는 현실이 됐다. 민주주의 담론이 이렇게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환경에서라면, 민주화라는 깃발 아래 일사분란 하게 모두가 같은 유니폼으로 갈아입던 방식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과거엔 민주주의의 갈급함을 주장하거나 그 화신을 자임하는 단선적 행위만으로 시대의 소명과 해법을 제시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엔 그 위에 융복합적 사고를 요구하는 환경에서 성장한 청년들의 생존 욕구와, 비참한 말로의 공포를 안고 사는 노년층의 생존욕구 모두를 다면적으로 그러안을 수 있는 소명의식을 제안하고 그 도해를 전파해야 한다.

시대의 화두인 생존과 정치세력으로서의 소명의식을 연결해야만 정치집단으로서의 생존도 보장되는 액자구성 상태인 것이다. 이럴 때 누가 더 시대를 잘 담을 수 있는가를 두고 경쟁함로써 시민들은 취사선택을 통해 민주사회의 극대화된 다양성을 맛 볼 수 있다.

지금은 각각의 민주세력들이 고유한 자산을 내세워 생존의 방법론을 시민사회에 제안하고 실제 생존성과로서 증명해 신임을 얻어야 하는 시대다. 그러므로 각기 정치세력으로서의 자구력을 증명하기 위한 노선들이 경쟁해야 하는 만큼 갈등은 필연적이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결은 흠이 될 수 없으며 치열함은 그 서비스를 누리게 되는 시민들에 대한 예의차원으로라도 존재해야 한다.

더 이상 ‘묻지마 연합’은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그 보다 ‘이유있는 분열’이 세력 간 경쟁을 유도해 시대소명의 담론을 강화시키고, 오히려 시민사회로부터 연대의 목적을 인정받도록 해 줄 수 있다.

사용자의 입장에서 민주주의 이전의 민주주의와 민주주의 이후의 민주주의는 다른 형상일 수밖에 없고, 우리는 마침 그 지난한 과정 중에 있다. 야권 형질의 진화라는 관점에서 새로운 과정이라 정의하면 정청래 의원의 언사는 막말이 아니라 경쟁 공략이 되고, 문재인의 리더십은 이익추구 사회의 리더십 담론으로 키워지며, 김한길의 노림수는 세력 간 파트너십의 모색으로 성장 할 수 있다.

민주주의는 시끄럽고 활기차야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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