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유찬 칼럼니스트
▸한국의정발전연구소 대표
▸서울IBC홀딩스㈜ 대표이사

【투데이신문 김유찬 칼럼니스트】국민들은 김영삼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그 자신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6.25전쟁 이래 가장 큰 경제적인 고통을 안겨준 기억하기 싫은 형편없는 대통령으로 기억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혹자는 민주화에 기여한 공로가 큰 인물로 그나마 점수를 부여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그의 얼굴에 교만과 아집이 가득 차 있고, 자신과 같은 야당 정치인이자 민주화의 동지였던 김대중 전 대통령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인물이라고 기억하는 국민들도 있겠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수상자로 선정됐다고 하자 노벨상의 품격이 많이 떨어졌다고 측근들에게 독설을 퍼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 험한 세월을 지나면서도 용하게도 단 한 차례도 옥고를 치르지 않은 유일한 민주화 인사이자 자존심이 강한 인물로도 평가한다. 정치 9단, 칼국수 대통령 등 김영삼을 지칭하고 평가하는 이야기들은 무수히 많다.

아직도 현존하는 인물이기에 조심스럽지만 이제 김영삼 전 대통령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한 중국인이 이런 말을 들려준 적이 있다. 한국인 당신들은 행복한 나라의 국민들이라고. 역사의 고비마다 그 때 그 때 적절한 인물(꼭 훌륭하다는 뜻은 아님)이 등장해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진군을 계속하고 있으니 행복하지 않냐는 것이다.

하기야 중국처럼 공산당 유일독재를 하고 있는 나라에서는 우리나라처럼 5년마다 새로운 정치지도자를 교체하지 않기 때문에 치열한 권력 투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온갖 권력의 단맛을 향유하며 장기 집권해 결국 부정과 부패 권력남용 등으로 파국을 맞이하는 사례가 많다.

이럴 경우 정치와 권력은 적절히 통제되지 않아 민중과 괴리되고 지도자는 국민 위에 군림하며 민주주의는 그만큼 요원한 남의 나라 이야기일 뿐이다. 대외적으로는 정치적인 안정이 되어 있는 듯 하지만 폭발하는 민주화 열기는 결국 거대한 역사의 물줄기를 이루어 독재의 아성에 언젠가는 도전하는 날을 맞이하게 된다. 역사의 순리다.

홍콩의 최근 이른바 민주화열기 ‘우산혁명’이 시사하고 있듯이 중국의 민주화는 활화산과 휴화산을 왔다갔다 한다.

한국 정치에서 김영삼의 등장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군사독재의 압제에 반골기질을 가진 김영삼과 같은 이의 등장은 어느 역사를 보아도 흔히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아 김영삼의 집권은 한국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재앙이었고 6.25이래 가장 극심한 고통을 온 국민에게 안겨주었다. 단적으로 말해 김영삼과 같은 인물이 대한민국 대통령의 자리까지 오르게 한 것은 한국인들의 정치 의식 수준을 보여주는 매우 단적인 사례이다. 한 나라의 지도자 선택은 결코 그 나라의 국민들의 정치 수준을 넘지 않기 때문이다.

지극히 우매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대통령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도 자질이 부족하다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이후에도 또 다시 똑같은 우를 지속적으로 반복한다.

평생을 직업 정치꾼으로 살며 경제를 잘 모르는 이가 대한민국 최고 권력을 쥐었을 때 국가의 운명이 어떻게 나락으로 떨어지는 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인물이었다.

물론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일관되었던 민주화에 대한 기여와 노력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정 그가 민주주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그러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헌신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

그저 직업정치인으로서 그는 자신과 자신의 가신그룹의 이익보호에 충실하였을 뿐 민족애나 민주주의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 등에 대해서는 태부족이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정치철학을 ‘大道無門’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그의 ‘대도무문’ 정치철학에 대해 그의 일부 국민들은 ‘大盜無門’이라는 비아냥거림을 보내기도 했다.

아마도 국민들이 이러한 판단을 하게 된 이유는 그의 집권에까지 이르는 동안 그가 보여준 국민을 대상으로 한 기만적 행동과 집권 후 보여준 측근, 특히 아들 김현철에 의한 국민들로부터 허락되지 않은 국가권력 분점과 국가경영 위탁행위 즉 직계 비속(아들)에 의한 국정농단 때문일 것이다.

그의 집권기간 중 그는 자신의 아들 김현철과 권력을 분점했다. 김현철은 각종 이권과 인사에 깊숙이 개입했고 그 과정에서 검은 돈이 오고갔다. 결국 모두 국민의 혈세 세금이었다. 권력을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며 마음대로 도적질을 한 것이다. 김영삼은 자신의 아들 김현철이 뇌물수수 등 독직혐의로 구속되는 것을 재임기간 중 지켜보아야했다. 국민은 절망했고 김영삼에게 결국 등을 돌렸다. 이러한 그의 일련의 행태는 그저 그가 집권을 위해 민주주의를 이용했을 뿐 정작 권력을 쥐었을 때는 가장 비민주주의적인 국가경영을 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이른바 3당 합당은 자신 스스로 민주주의의 기본을 무너뜨린 행위였다. 국민이 부여한 군사정권에 대한 견제는커녕 대통령자리를 꿰차기 위해 그들과 야합하고 천문학적인 뒷돈까지 챙긴, 전형적인 반민주적인 작태였기 때문이다. 그는 민주주의를 가장한 가장 비민주적인 정치를 한 셈이다.

국민이 부여한 야당지도자로서의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라는 민주주의 대원칙은 그의 집권과정을 보면 거추장스러운 외피에 불과했고, 그는 이런 국민의 명령을 헌신짝처럼 내동댕이쳤다. 그의 노태우와의 전격 3당 합당 선언은 그 자체만으로도 쿠데타에 버금가는 대국민적인 폭거요 국민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그런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보인 일련의 인기영합적인 통치행위가 당시 군사정권의 오랜 억눌림 속에 지친 많은 국민들의 마음에 카타르시스적인 효과를 던져주고 일시적으로 위안을 주었는지 몰라도 그의 마음속에는 이미 국민에 대한 존중하는 마음이 떠나 있었기에 결국 권력에 취해 자신의 아들에 의해 국정농단이 진행되고 있는 사이 IMF라는 6.25 전쟁 이래 최대의 국가적인 환란과 국민적인 고통을 초래케 한 것이다.

그는 관계 장관으로부터 외환위기의 위중함을 보고 받을 때까진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도 모를 정도로 국민경제에 문외한이었다고 하니 그런 이에게 국가 최고 권력을 맡긴 국민들만 참 허하다.

그의 집권초기는 이른바 최초의 문민정부탄생이라는 국민적인 기대감으로 거침없었다.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하에 당시 조선총독부본산이었던 중앙청이 철거됐다. 당시 국민들은 김영삼의 인기몰이식 급진적인 정책추진에 환호했다. 과거 삐뚤어지고 굴절된 대한민국의 역사가 이제야 이 문민정부에 의해 바로 세워질 수 있다는 기대감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했다.

지난 정권시절 몇 차례 입안됐다가 실시를 보류했던 금융실명제도 전격 실시됐다.

지금에야 보편화돼 있는 제도로 생각되고 있지만 가·차명계좌가 일반적이었던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인 정책이었다. 특히 지하자금의 차단을 주목적으로 전격 실시된 금융실명제는 사실 전직 대통령들의 비자금을 차단 색출해 낸다는 것이 실제의 주목적이었기 때문에 국민들 사이에는 이 정책에 대한 우호적인 분위기가 이미 형성돼 급진적인 정책추진에 따르기 마련인 국민적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법의 적용을 받게 될 전직 대통령 등 기득권층의 반발도 만만치 않아 당시 이것은 국회에서 반발을 일으켜 통과가 불투명했기 때문에 김영삼은 ‘긴급명령’으로 발동해 선 시행 후 추후 국회에서 추인을 받는 전략을 구사했다.

김영삼은 집권 직후 정치군인들의 발원을 근원적으로 차단할 목적으로 군부숙정작업을 진행하기 시작했다. 군부내 고질적인 사조직이었던 ‘하나회’ 해체는 고질적인 정치군인들의 정치전면등장의 가능성과 근원을 차단했다는 의미에서 금융실명제보다 더 큰 국민적인 호응을 받기도 했다.

전두환과 노태우의 배경이었던 ‘신군부’의 핵심세력이 바로 ‘하나회’였다. 이 하나회는 대부분 TK출신의 육사장교들로 구성돼 있었다. 전두환과 노태우 정권을 거치며 하나회출신은 대부분 장성으로 진급했다. 이들은 정치전면에 등장해 대한민국 헌정사를 왜곡시켰다. 김영삼은 대대적인 군부숙청작업으로 이들 하나회출신 장교들을 대부분 강제 퇴역시켰으며, 군부의 물갈이를 단행했다. 정치군인들에게 이미 식상한 많은 국민들이 이를 지지하고 나섰다.

권위주의 정부의 상징인 청와대 역시 급격한 변화의 물결을 맞았다. 노태우 시절까지만 해도 일반인들은 청와대 반경 10km 이내 접근이 불가능했다. 청와대 앞으로는 차도 지나다닐 수 없어 많은 차들이 돌아가야 했다. 그러나 김영삼은 정문 안쪽을 제외한 청와대의 기존 경비구역을 대폭 축소, 일반인들도 차를 타고 청와대 정문 앞을 지날 수 있게 됐다. 이는 구시대 권위주의의 탈피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제도적인 실현은 바로 지방자치제의 실시였다. 그런 의미에서 김영삼에 의한 지방자치제의 전격 실시는 한국 민주주의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되는 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 큰 의미를 가진다.

하지만, 김영삼의 이 모든 공은 IMF 사태를 초래하는 바람에 모두 공염불이 되고 말았다.

김영삼은 출범직후 기업의 경쟁력을 강화해 활력 있는 경제로 전환시키기 위해 신 경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다. 그러나 외화부족과 경제여건의 악화로 결국 IMF 외환위기가 터지게 된다.

IMF 이전의 우리나라의 경제상황을 살펴보면, 원화가치가 떨어지고 기아차가 무너지고 주식시장도 붕괴조짐을 보였다.

1997년 당시 김영삼은 강경식 경제부총리기용을 통해 이 금융위기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금융개혁법안을 입법하기 위해 의회에 제출을 했지만 그때 야당 측이 반대해 결국 통과가 보류 됐으며 이를 본 외국 자본들은 한국정부가 금융개혁에 대한 의지가 없다고 판단했고 우리나라 신용등급을 곧바로 떨어뜨렸다. 이후 외국자본은 이탈했고, 주식시장은 붕괴됐다. 국내 일부 대기업들은 문을 닫으면서 국민들의 일자리마저 붕괴됐다.

결국 최초의 문민정부라는 화려한 간판으로 내걸고 출발한 김영삼 정권은 대한민국을 완전히 거덜 낸 정권, 국민 대다수를 그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극심한 고통 속에 빠뜨린 대통령이라는 오명을 남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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