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은유로서의 질병
[칼럼] 은유로서의 질병
  • 이은지 칼럼니스트
  • 승인 2015.06.08 11: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5월 20일 중동 바레인에서 입국한 한 내국인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에 감염된 채로 평택성모병원 등을 방문한 뒤로, 감염자와 감염 위험지역이 일파만파로 퍼져가고 있다. 이 와중에 2013년 개봉되었던 영화 <감기>가 현 상황과 거의 흡사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 새삼 주목받고 있다. 호흡기를 통해 순식간에 감염되는 극악한 바이러스가 한국을 침투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격리되고 도시는 폐쇄되는 등, 영화는 최악의 재난 사태를 그리고 있다. 감독은 2003년 메르스의 사촌 격인 사스(SARS)가 대대적으로 유행한 사건에서 착상을 얻어 시나리오를 구성하였다고 한다.

다수의 사람들이 편의시설을 공유하며 밀집하여 생활하는 도시형 주거가 정착된 이후로 인류는 전염병의 위험에 불가피하게 노출되어 왔다. 인류의 역사가 곧 도시의 역사라는 점에서 질병은 인류의 숙명 혹은 동반자와 같은 존재로서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위험에 직면한 인간으로부터 질병 못지않게 강력하게 번지는 것들이 있는데, 희망이나 종교적 믿음, 절망과 체념, 운명에 대한 사유 같은 것들이 그러하다.

알베르 카뮈는 소설 <페스트>(1947)를 통해 인간 실존의 저변을 탐색하고 있다. 알제리의 오랑 시에 페스트가 창궐하자 도시 전체가 격리되어 페스트가 소멸하기까지 반년이 넘도록 시민들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채 질병과 사투를 벌인다. 쥐들이 어느 날부터 갑자기 떼로 몰려나와 고통스럽게 죽어 나가는 풍경을 통해 페스트는 강력하게 암시되지만 주인공인 의사 리유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페스트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지 못한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 100년 가까이 지속되며 너무나 많은 목숨을 앗아간 그 무시무시한 질병이 현대에 다시 도래했으리라고 누구도 감히 생각지 못한 것이다.

시 당국이 도시를 폐쇄한 이후에도 사망자의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그 속도도 빨라진다. 페스트가 발병한 지 3주 만에 300여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고 보도된다. 그러나 정확하게 측정된 수치가 곧 명확한 사리분별을 보장하지는 않는데, 20만의 인구가 사는 오랑 시 사람들은 평소에는 그 도시에서 한 주에 몇 명이 죽어나가는지 알지 못할뿐더러, 따라서 3주에 300여 명이 죽는 것이 정상적인지 아닌지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사망자가 증가하는 것을 보면서 시민들은 페스트가 돌고 있음을 막연하게나마 느끼며 생활하게 된다.

페스트의 기세가 수개월 간 지속되고 그로부터 벗어날 뚜렷한 묘책이 없는 답답한 상황이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서 사람들은 지쳐간다. 의사 리유는 끊임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진찰하며 자신의 역할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니라 병을 진단하고 보고하며 선고하는 일이 되었음을 무기력하게 직면한다. 페스트 환자로 진단되고 죽음을 선고 받기를 반복하는 무기력을 시민들 또한 모르지 않으며, 제 가족이 페스트 환자로 의심된다 치면 이제는 순순히 의사에게 내맡기고 격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죽기 전까지 함께 붙어 있기 위해 대문을 걸어 잠그기도 한다. 이제 오랑 시에 창궐한 질병은 단순히 페스트균이 아니라 인간의 고독과 번민과 같은 실존적인 문제가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인간 실존의 여러 단면들을 보여준다. 예컨대 리유와 우정을 나누게 되는 타루는, 중죄 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 아버지를 부정하며 젊은 시절 집을 뛰쳐나와 사회가 벌이는 사형이라는 살인 행위와 투쟁을 하며 살아왔다. 그런 그가 종국에 깨달은 것은 어느 누구도 타인에게 일말의 피해도 입히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으며, 그렇게 누구나 가슴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산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러한 페스트야말로 인간이 타인을 단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존재라는 신념과 환상을 통해 희망이라는 열병을 앓게 하는 역설을 카뮈는 보여준다. 타인의 타율을 통해 자신의 자율을 증명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모순은 삶과 죽음이 서로 공존하는 오랑 시의 모습을 통해 표현되고 있다.

이처럼 질병은 그것이 종종 삶의 실존을 뿌리째 뒤흔든다는 점에서 단순히 의학적인 규정을 넘어 그것을 겪는 인간과 그들이 속한 사회에 대한 은유를 품게 마련이다. 메르스의 사전적 정의는 바이러스에 의한 호흡기 질환일 테지만 이것이 한국 사회에 퍼져 나가는 양상은 곧 우리 사회에 대한 은유로 비칠 수밖에 없다. 메르스의 확산은 곧 정부의 소통 부재와 무능함에 대한 뼈저린 절감이자, 그러한 정부를 가능하게 한 비상식적인 시민들이 도처에 만연함을 확인하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다.


인기기사
최신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