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어렸을 적 나에게 집이란 곧 ‘아파트’였다. 1980년대 이후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그렇듯이 나 또한 아파트에서 태어나 아파트에서 자랐다. 이사를 심심찮게 했지만 그것도 이 아파트에서 저 아파트로, 가령 102동에서 107동으로 옮겨가는 것이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이사라기보다는 타워 크레인에 매달린 궤짝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옮겨가며 궤도를 수정하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천편일률적이었다. 백민석의 『죽은 올빼미 농장』에 나오는 ‘민’의 표현을 빌면 우리들 대부분은 “공중에 들린 채로 유아기를 보낸” 아파트먼트 키즈다.

민은 재건축을 위해 곧 철거될 아파트를 돌아다니며 깨진 창문이나 가로수가 뽑힌 화단을 카메라 렌즈에 담는다. 그녀의 주장에 따르면 아파트먼트 키즈에게 ‘자연’이란 바다나 하천이 아니라 폐허가 된 아파트 단지이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자연은 산천초목이 아니라 허물어져가는 건물과 한때 건물이 서있었던 공터라는 것이다. 아파트 단지의 건물 사이사이를 누빌 때 자연을 향한 서정 비슷한 것을 느끼고, 낡고 허물어진 아파트를 지날 때 유년의 향수를 느끼는 아파트먼트 키즈의 감각은 이제는 너무나 당연시 되어가고 있다.

그렇다면 아파트, 나아가 아파트가 심겨진 도시를 무대로 삼는 게 자연스러워진 오늘의 문학은 어떤 의미에서는 모두 서정문학이라고 볼 수도 있으리라. 이 새로운 서정문학의 무대에 서는 주체는 아파트라는 한국식 성공과 욕망의 모델에 스스로를 자발적으로 유폐시킨 중산층이다. 삶의 여유가 어느 정도 지속되어 소파에 몸을 누이고 게으른 권태에 젖을 수 있는 중산층이건, 그러한 여유가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 조금씩 줄어드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는 중산층이건 말이다.

아파트촌이라는 ‘제 2의 자연’은 중산층의 삶을 영위하고픈 욕망의 볕을 쬐고 잡초마냥 퍼져나가 서울을 중심으로 경기도 일대를 장악한지 오래다. 분당, 일산, 산본 등으로 대표되는 위성도시들은 이미 서울에 어떤 끄나풀을 쥐고 있는 사람들로 미어터지고 있고 평택, 오산 등 좀 더 멀지만 아주 멀지는 않은 도시들이 이 성공한 위성도시의 대열에 합류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생이 몹시도 짧은 저 도시들에서는 곧 개발되어 건물과 사람이 넘쳐나기 직전의 풍경과, 새로이 개발될 다른 곳을 찾아 사람들이 빠져나간 후의 풍경이 놀랍게도 흡사하다. 제 2의 자연이라 한들 그 풍경이 자연의 풍염함에 비하겠는가.

은희경의 「프랑스어 초급과정」의 배경이 되는 K시는 서울 외곽에 가장 먼저 만들어져 8차선 도로와 대규모 고층 아파트 단지가 그 위용을 뽐내는 신도시이지만, 등장인물들이 입주하는 시기는 도시가 개간일로를 밟기 시작한 초기이다. 파헤쳐진 회색 땅이 끝없이 이어지는 가운데 “감시탑처럼 박혀 있는” 타워크레인과 “목이 꺾인 채 주둥이를 땅에 대고 엎드린” 포클레인이 즐비한 풍경은 음산하고 황폐하기 그지없다. 아버지의 도시인 서울로부터 추방당하고 K시에 신혼살림을 차린 주인공은 서울로 통근하는 남편이 자신에게 점점 소원해지는 것을 느끼며 고립무원한 삶을 연명한다.

김애란의 단편 「물속 골리앗」의 배경 또한 국토 개발 열풍을 따라 허허벌판에 레고 쌓듯이 순식간에 아파트를 세워 올린 대안도시이다. 그러나 이곳은 신도시가 된지 이미 20여 년의 세월이 지난 뒤 재개발구역으로 지정되어 거의 모든 입주민들이 빠져나간 상태이다. 어머니와 단둘이 남은 주인공이 빗물이 새는 아파트에 들어앉아 장마가 끝나기만을 기다리다가 물에 잠겨버린 도시를 탈출하기에 이르는 과정이 그려진다.

인간 실존에 대한 문학적 성찰이 서울의 위성도시라는 배경과 조응하는 모습은 기괴하면서도 의미심장하다. 한국이라는 아파트 공화국의 구성원인 아파트먼트 키즈는 상상력의 척도마저도 아파트의 성지인 서울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 문학은 사실상 아파트 문학이고, 이는 곧 서울 문학으로 바꿔 불러도 무방할 정도다. 그만큼 우리는 신체를 위시하여 욕망과 감성과 지각 방식까지도 서울에 통째로 묶여 있다. 서울이나 서울 외곽, 혹은 그로 추정되는 가상의 도시가 아니고서는 우리 삶의 무대로 호출하기 어려운 이 비정상적인 현실을 문제 삼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지 않은가.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세종시 설립을 중요한 국정과제로 삼았던 것 또한 수도권에 온 나라가 집중된 이러한 상황을 바로잡아볼 요량에서였다. 지금의 세종시는 안타깝게도 애초의 의도가 많이 바랬지만 그러한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초석으로 삼아 세워진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어느 한 곳에 무언가가 집중되어 복잡하고 답답하면 그것을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은 사실 IQ가 69 정도만 되어도 충분히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IQ 69인 사람의 사고를 따라가지 못하고 헐뜯고 폄하하기를 일삼는 일당들의 IQ는 도대체 몇이란 말인가? 아울러 ‘가설적 고유성 차용’ 운운하며 편향적인 입장으로 버무린 시험문제를 내놓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의 감수성이야말로 저 아파트먼트 키즈의 황폐한 감수성을 극단적으로 보여주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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