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학자 이희진

【투데이신문 이희진 칼럼니스트】며칠 전 우연히 6월 17일자로 올라왔던 공청회 기사를 보게 되었다. 한국교회역사교과서공동대책위원회 주최로 열린 이날 공청회의 주제는 2015 역사교과서 교육과정 시안에 관한 것이었다. 이날의 핵심요지는 ‘중·고등학교 역사 교과서에 기독교 관련 서술이 부실해서 강화되어야 한다’로 볼 수 있다. 그러한 차원에서 ‘한국 교회가 , 정부에 요구하는 것은 다른 종교와 비슷한 분량으로 서술해 달라는 것’이나 ‘동아시아사의 경우 유교와 불교 등 과거의 종교문화 이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으니, 근대화에 기여한 개신교에 대한 교육 역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등의 주장도 나온 셈이다. 

이런 주장을 보면 우리 나라 역사 교과서는 개신교에 대해서 너무 소홀하게 다루었다고 보게 되고, 일리가 전혀 없는 주장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역사교과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공청회나 학회 등에 많이 가보면, 이런 장면은 흔히 볼 수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필자 개인적으로만 해도 이런 장면은 한 두 번 보는 것이 아니다. 지난 6월 2일 이상일 의원이 주최했던 전문가토론회에서만 해도 비슷한 장면이 연출되었다. 이날도 우리 민족의 기원에 중요한 비중을 가진 고조선에 대해 너무 소홀하게 다루었다는 질타가 나왔다. 가야·마한 등 다른 세력은 물론, 시대를 가리지 않고 여러 분야에서 자신들이 관심을 가지고 있거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부분에 대한 서술이 부실하다는 주장은 심심치 않게 나온다.

이런 경험을 좀 하다 보면 아주 쉽게 하나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교과서에서 자신들이 선호하는 역사의 분량이 충분하다고 만족하는 소리를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청소년들이 배워야 하는 역사교과서에, 자신들이 선호하는 만큼 비중을 두어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쪽은 개신교만의 염원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자신들의 관심 분야를 교과서에서 조금이라도 더 많이 강조해주기 바라는 현상은 일반적이며, 이 자체를 가지고 뭐라 할 생각은 없다.

그렇지만 어떤 문제나 지나치면 불필요한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다. 필자도 교과서와 비슷한 생리를 가지고 있는 한국사 개설서인 『다시 보는 한국사』를 집필해 출간한 경험을 통해 이런 갈등의 실체를 느끼게 되었다. 교과서 만큼의 영향력이 없는 개설서이건만, 이런 저런 부분이 소홀했다는 지적은 지겹도록 받아보았으니까.

사실 남이 해놓은 것에 대해 지적만 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러나 제대로 지적하려면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된 원인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한다. 필자는 그런 경험을 한 바 있으니, 이를 통해 이야기하는 것이 그런 이해에는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교과서 필자와 마찬가지로, 필자 역시 개설서를 집필한 때 우선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느 부분에 얼마만큼의 지면을 할애해서 서술하느냐는 점이다. 출간된 결과물을 보고서는 이런 저런 부분이 부실했다는 말을 하기는 쉽지만, 정작 집필할 때에는 아무리 고민을 해도 각각의 주제에 대한 비중을 일일이 헤아려 집필하기가 어렵다. 그러다 보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특정 부분에 대한 서술이 소홀해지기 십상이다.

그리고 나중에 의식하거나 지적을 받는다 해도 대부분의 경우, 각각의 분야에 원하는 만큼의 내용을 할애해 준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필자도『다시 보는 한국사』를 출간한 뒤, 특정 분야에 대한 서술 소홀을 여러 번 지적받은 바 있지만, 대부분 그런 지적을 한 사람이 원하는 만큼 반영하기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했다. 이유는 너무나 단순한 데에 있다. 책에 할애된 지면에 그럴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보는 한국사』만 하더라도 원고지 매수로 3000매에 달하여 중·고등학교 교과서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의 지면이 할애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 부분에 대한 비중을 조금 높이는 것조차 곤란하다. 지적을 하는 사람들은 보통 자기가 관심 있는 분야만 조금 더 보강하면 되는 것인데, 뭐가 그렇게 곤란하냐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필자의 입장에서는 특정 부분의 비중만 특별히 커지는 것을 꺼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한 부분의 밀도를 높이면 다른 부분도 비슷한 밀도를 가지게 조절해야 하는데, 그러자면 끝이 없다. 『다시 보는 한국사』를 집필하는 과정에서도 2500매를 넘어갈 때부터 출판사로부터 원고량을 줄여달라는 압력을 심하게 받았다. 그래서 비중 조절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번 공청회에서의 요구만 해도 이에 적용될 부분이 있는 듯하다. ‘동아시아사의 경우 유교와 불교 등 과거의 종교문화 이해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서’ 상대적으로 개신교 비중이 떨어지는 데 대한 불만 등에 대해 조금 생각해 볼 점이 있다는 뜻이다. 동아시아사 정도의 범위를 교과서나 개설서를 쓰다 보면, 특별히 개신교에 대해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유교나 불교에 필적할 비중을 둘 수가 없다.

개신교 신자의 입장에서는 섭섭할지 모르지만, 교과서나 개설서를 쓰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1500여년 전에 도입된 불교나 500여년전에 도입된 성리학의 영향을 무시할 수가 없다. 불교와 유교는 불가피하게 그 오랜 세월 동안 정치·경제·사회·문화에 영향을 주면서 많은 사건에 얽혀 있다. 역사를 쓰면서 이런 이야기들을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를 무시하고 도입된 지 100여년 정도밖에 안 되는 개신교와 산술적으로 같은 비중을 두어 버리면, 오히려 심하게 균형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그래서 웬만한 필자라면 근대 이후 개신교의 비중을 약간 높일 수는 있어도, 불교나 유교 심지어 개신교보다 먼저 도입된 천주교에 비해서 전반적인 비중을 높일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막을 아는 사람이라면 각 종교와 이념에 대해 단순한 균형을 주장하기보다 다양한 요소를 감안하여 비중을 조정해 나아가는 방향을 합리적으로 여긴다. 물론 이날 공청회의 주장에 다소의 어폐는 있어도, 교과서의 기본적인 균형을 무너뜨리면서까지 개신교에 대한 서술을 늘려야 한다는 식의 과격한 주장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자체는 교과서를 두고 흔히 벌어지는 풍경 정도로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대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권희영 교수는 이날 ‘현재 한국과 교과서로 배우면 개신교의 역사적 역할에 대해서 전혀 알 수 없으며, 이는 좌편향이자, 반미·반개신교 성향이 민중사관 때문’이라는 주장을 폈다. 더 나아가 ‘민중사관에서 벗어난 사학자들이 교과서를 집필하도록 국가가 나서야 한다’는 주문까지 내놓았다. 기독교인들도 이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면서, ‘민중사관으로 한국사가 기술되도록 하면서, 기독교에 대한 서술이 제대로 이루어지기를 기대하는 것은 연목구어(緣木求魚)’라는 말도 덧붙여 놓았다.

물론 이날 권희영 교수의 토론문에는 정말 민중사학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음을 보여주는 근거 같은 것은 없다. 그저 ‘민중사학은 반미·반기독교적’이라는 정황 같지도 않은 정황만 제시되어 있을 뿐이다. 여기에 자신이 집필한 교학사 교과서에는 풍성한 내용을 할애한 것처럼 선전을 덧붙여 놓았지만, 사실 이런 정도로 몇 줄 되지도 않는 내용이 들어가 있다고 해서 개신교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질 수 있을 지도 의문이다.

그러니 그리 큰 차이가 나지도 않는 내용을 가지고 선동한 자체만 가지고도 실제로는 민중사학과 별 관련도 없는 필자들을 매도하는 결과가 될 수 있다. 더 나아가 많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애꿎은 사람을 민중사학자로 몰아가라고 선동한 꼴이다. 일부 기독교인들이 이런 선동에 말려들어 못할 짓이라도 하게 된다면 우리 사회에 비극 하나를 보태는 결과가 된다.

권희영 교수는 얼마 전에도 유관순이 교과서에 빠진 이유 역시 ‘중북세력과 민중사관’ 탓이라고 주장한 바있다. 이것이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님을 밝히고, 그 내용을 권희영 교수에게 보내 검증을 요구한 바 있지만, 이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묵묵부답이다. 결국 납득할만한 근거도 없이 또 다른 민중사학의 음모를 만들어내 선동하고 다니는 셈이다. 

근거없이 민중사학의 음모를 제기하는 것은 작게는 개신교인에 대한 배신이 될 것이고, 크게는 대한민국에 죄를 짓는 행위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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