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현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김종현 칼럼니스트】고양이와 함께 살았었다. 우리는 서로 이야기가 잘 통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매일 원룸에서 부둥켜 안고 살다 보니 어느새 귀가 트인 것이다. 녀석의 이름은 마르스(Mars).

마르스는 ‘니야아옹’이라고 하지 않고 늘 ‘니야아’에서 말꼬리를 흐리는 버릇이 있었다. 그 니야아를 트롯트 가수처럼 여러 번 꺾었는데, 보아하니 꺾이는 음절 수나 높낮이에 따라 의미가 달랐다. 동거를 한 지 몇 주 지난 어느 날, 나는 처음으로 마르스가 하는 말을 들었다.

“물 좀 줘”.

높낮이를 1234, 강세를 ‘^’, 길고 짧음을 ‘–‘로 하면 표기가 가능하다. ‘물 좀 줘’ 니야아는 13^242 였다. ‘밥 없어’ 니야아는 123-2 였고, 퇴근 후 현관문을 열 때마다 늘 3- 이라고 했다. 욕실에 들어가 문을 닫으면 그 앞에서 3^241-, 3^241- 하면서 칭얼거렸다.

내가 마르스의 말귀를 알아들을 때 쯤 마르스도 나의 말들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공기 말아먹는 “쓰흡!” 소리를 내면 녀석은 멈칫했다. 상냥한 말투로 “기다려.” 라고 하면 보채던 웅얼거림이 잦아들었다. 눈 앞에 없을 때 익숙한 음률로 “마르스~ 이리와~”라고 하면 어디선가 “3-4^“라고 대답하며 총총걸음으로 나타났다. 우린 자주 서로에게 짧은 주문을 하고 늘 상대의 요청에 대답했다.

당시 나는 거대한 밤의 한 가운데 떠 있는 원룸에서 젊은 날을 고독해 했는데, 친구가 없던 마르스도 낮이 사그라질 때까지 나를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했다. 우리는 심야가 되면 함께 케이블 영화를 보다 잠들었다. 녀석은 항상 나의 왼쪽 품에서 왼팔을 베고 잠드는 걸 좋아했다. 내가 알람 소리에도 일어나지 않으면 왼손을 살짝 물고 표정을 살폈다. 죽었나 살았나 확인 하는 것 처럼.

그러므로 우리의 대화는 자나깨나 서로에게 밀착하여 입말과 몸짓 말을 익힌 결과였다. 소통은 교감을 전제로 하고, 교감이란 일렁이는 것에 대한 포착이다. 이런 관계에서는 들숨 날숨의 작은 변주만으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도 비슷하다. 오랜 시간 함께 하면 기척이 충분히 학습되기 때문에 표현이 불분명해도 뜻이 통한다. 목소리 높낮이와 표정과 숨박자만으로 무엇을 말하려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웃 집 저녁 반찬까지 알 수 있는 시골에선 가게에 들러 “거시기, 거 좀 줘 봐유”라고 하면 알아서 필요한 물건이 척 나온다지 않은가.

그러나 관계가 넓어지면 교감이 얕은 사람들도 늘어나고 같은 말을 저마다 다르게 받아들이는 일이 생겨난다. 따라서 정확한 전달을 위해 하나의 개념엔 하나의 단어만을 짝지어서 불확실성을 감소시켜야 한다. 단어가 풍성하다는 것은 세밀하게 변별된 정보가 많다는 뜻이므로, 한 인간 혹은 한 문명의 수준은 보유한 단어의 수량으로도 가늠할 수 있다.

정보의 갈래가 많아지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기표를 위해 약속된 기호, 즉 문자가 필요해진다. 문자가 정보의 최소단위라면 문장은 조합된 정보의 당위를 위한 최소 단위이다. 때문에 문자 발명 이후 인간의 대화는 말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문장구조를 탄탄히 하는 방향으로 달려왔다. 즉 작문능력과 소통능력은 서로 필연적인 보완관계로 발전하였다. 작문능력의 영향력 아래에서 말은 문장 내부와 문장 사이의 계약을 명확히 하여 인간관계의 농도와 상관없이 모두에게 동일한 뜻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대화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은 종종 비난을 받는다. 그리고 요즘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비난을 받고 있다. 비난에서 나아가 번역이 필요하다며 조롱하는 유행까지 등장했다. 스포츠화 된 이 현상은 나름 의미 있는 신호이지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박 대통령의 말을 글로 읽으면 논리의 여부를 떠나 의미가 일관되지 않으며 흐름을 가늠하기 힘들다. 그런데 해당발언들을 동영상으로 확인하면 발언 당시의 눈빛, 손짓, 숨, 억양, 박자 등이 종합되어 전달하려는 말의 뜻을 비교적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이, 저, 그’ 등을 자주 사용하며 ‘적은 단어 사용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대신, 감정이 직접 전달 되기 때문에 오히려 활자보다 훨씬 속내가 잘 읽힌다. 따라서 ‘오랫동안 긴밀한 작은 집단 내의 가까운 사이’에선 소통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언어습관으로부터 나온 말을 기사와 SNS에 글로 옮기면 고유한 교감방식이 사라지면서 절반 짜리 언어가 되고 만다. 따라서 충분히 뜻을 담지 못하는 표기로 옮겨 놓은 마당에 뜻 풀이가 필요하다고 비아냥 해 봤자 비난을 위한 비난이 될 뿐 아무런 득이 없다.

이는 ‘물 좀 줘 니야아’를 13^242로 표기하고 ‘일삼곡절부호이사이’라 읽고선 말할 줄 모른다고 하는 것과 같다. 불통에 대한 비난과 조롱은 가능하다. 그러나 아예 우리말 능력이 떨어지는 수준의 인물로 정의하는 것은 모두에게 무익한 일이다. 이보다 진짜 문제는 다른 데에 있다.

박 대통령은 긴밀하게 조성된 관계에서 대면접촉을 통해 밀착된 대화를 해야 하는 성향의 인물이다. 밀접한 관계에서만 이해될 언어, 인간과 고양이가 함께 할 때나 쓸 수 있는 최소공집합 같은 원초적 의사전달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정치인 박근혜’가 유사한 언어습관을 가진 나이든 노년층을 만나면 따따부따 논박 좋아하는 젊은 세대들의 말투보다 폭넓은 공감대를 이루는 것이 가능해진다.

그러나 최대 구성원들의 정보를 최대한 공유하는 현대 국가 시스템에서 대통령의 언어로선 부적절하다. 정제되고 일물일어(一物一語)를 갖춘 논리적 작문이 바탕 된 말하기가 되지 않으면 현대사회에서 공공을 상대로 리더쉽을 발휘하는 것은 상당히 힘들다. 그 것을 우리는 국가의 중대한 시점마다 지속적으로 보고 있다.

이런 상황이라면 대민 접촉을 늘려야 할텐데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에서 대통령의 기자회견 수가 150여 회인데 반해 박근혜 대통령은 고작 4회에 그치고 있다. 그렇다고 차선책인 정부요직 인사들과의 밀접한 교감을 이루는 것에도 소극적이다. 세월호 사건 때도 드러났고 메르스 사태에서도 보듯이 심지어 대통령은 위기상황에서조차 행정부 요인들의 대면보고를 우선시하지 않는다.

무엇보다 정치권력의 측면에서 보자면 한쪽이 다른 한 쪽의 말을 알아들으려 노력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매우 불평등한 언어습관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자주 측근이 아닌 시민을 향한다는 점에 가장 큰 위험이 있다.

박 대통령의 질곡 어린 인생을 보건대 어느 순간 고독이 그녀의 주변을 둘러쌌으며, 그 기간 동안 지속적인 교감을 하는 사이가 아니고선 소통할 수 없는 방식의 언어생활이 자리잡았다고 짐작된다. 정치인이었을 때엔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러나 대통령의 자리에선 달라야 한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본인만의 보다 원활한 소통방식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 것이 대통령 자신 뿐 아니라 국가와 국민 모두에게 이익이다. 어떻게든 소통을 해야겠다고 해서 국민이 고양이 말을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래도 혹시나 싶어서 하는 말입니다만 대통령님, 43-23^가 3434, 1-를 311^면 24122이 3-2? 1221 하니 34-3^ , 231-1^를 2^41와 2-3^ 4144-2^십시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