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임진왜란은 1592-1598년까지 약 7년간 있었던 전쟁이다. 이것은 처음에는 조선과 왜(倭) 사이의 전쟁이었으나, 명(明)에서 원군을 보내줌으로서 당시 동아시아에 있었던 세계적인 강대국들 사이의 전쟁이 되어버렸다. 심지어 명을 위협하던 신흥 국가인 후금(後金)에서도 조선에 구원병을 보내겠다고 했으니, 자칫 동아시아 역사에서 최대 규모의 전쟁으로 비참하게 발전할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이 전쟁으로 인해 조선은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인구의 1/3이 사라졌고, 논과 밭의 면적도 전라, 충청, 경상도 기준 1/3이 줄었다. 생각해보라! 지금으로 말하면 3인 가구에서 한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생산시설의 3개 중 하나는 사라진 것인데, 당장의 충격과 앞으로의 암울함은 상상을 초월했을 것이다. 또한 왜를 오랑캐라고 생각했고, 스스로를 중국 다음가는 문명국이라고 생각했던 조선 사람들의 입장에서, 왜에게 공격받아서 7년 동안이나 국토가 유린되었고, 이로 인해 왕과 역대 왕들의 신주(神主)가 의주까지 도망쳤다는 것은 매우 치욕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물론 일부 지배층은 스스로의 모순과 무능함이 원인이었다는 것은 생각조차 못하고, 기득권 지키기에 급급했다.)

이와 같이 큰 규모의 전쟁이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피해를 입혔던 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이 끝나고, 일본과 다시 국교를 맺어야 된다는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론 종전 직후에는 조선 내에서는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심지어 좌의정 이덕형과 황신(黃愼) 등은 상소를 올려 명군과 함께 대마도를 칠 것을 청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또한 임진왜란 종전 직후 일본과의 화친 언급은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일본과 화친할 것을 주장하는 신하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비판을 받거나 탄핵을 받았다. 1598(선조 31)년에는 일본과 화친을 주장했다는 이유로 임진왜란 종전에 큰 공이 있는 류성룡이 탄핵되었고, 이후 류성룡에 대한 탄핵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기까지 하였다. 『조선왕조실록』을 기록한 사관(史官)들 역시 왜(倭)를 ‘만세토록 반드시 보복해야 할 원수’라고 규정하고, ‘인의(仁義)로 인심을 모으고 충분(忠憤)으로 사기(士氣)를 고무시켜 화친을 말하는 자의 머리를 베어 장대 끝에 머리를 매달아야 된다.’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결국 조선과 왜는 다시 국교를 수립하였고, 1609(광해군 1)년 왜에 통교를 허용하기 위해 대마도주(對馬島主)와 맺은 강화조약이 바로 기유약조다. 왜에서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이후 왜의 정권을 잡은 도쿠카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집권 이후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조선과의 국교를 통해 국제적으로 자신의 집권을 인정받을 필요가 있었다. 또한 중국과 조선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 이를 위해서 왜는 쓰시마(對馬島)를 관장하던 도주(島主)를 통해 조선과의 국교의 재개를 ‘끈질기게’ 요청하였다.

수교에 관한 한 조선보다는 왜의 필요가 더욱 강했다. 특히 왜를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수로 생각하는 생각이 팽배했던 조선의 상황에서 왜와의 외교 재개를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조선의 지배층은 왜와의 국교 재개의 선결 조건으로 ① 국서를 정식으로 먼저 보내올 것, ② 왜란중 왕릉을 도굴한 죄인을 압송해올 것, ③ 조선 포로를 송환할 것 등 3대 조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왜가 이를 충실히 이행함으로써 조약이 성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조선 지배층이 왜에 통교를 허용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짐으로서 외교적으로 조선의 우위를 대내외적으로 인정받았다. 또한 왜에게 전쟁을 유발시킨 범죄행위를 스스로 인정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정식으로 강화를 체결하고 외교를 재개한 외교문서가 바로 기유약조다. 그야말로 명분과 실리를 모두 취한 것이다.

기유약조 이후 약 300년 뒤 우리나라는 다시 일본에게 강제 병합되었다. 그리고 그 후 36년 동안 일본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 받았고, 해방 후 약 20년 뒤 일본과 국교를 다시 체결하였다. 그리고 약 50년이 지났다. 일본과의 국교 정상화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굴욕적 한일외교를 반대했고, 이 국교 정상화를 빌미로 일본은 과거에 대한 사죄와 배상을 거부하고 있으며, 되레 일본은 다시 군국주의 시대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아직도 일제 강점기 때 고통 받은 분들이 그 고통을 씻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나저나 그 때 배상금이라고 받은 돈은 다 어디 갔을까? 경제발전에 소중한 종잣돈이 되었다는데,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때 고통 받은 분들은 그 혜택을 모두 받았을까? 역사를 바로 세우는 것이 그 돈으로 모두 가능한 것일까? 각종 의문이 드는 한일국교정상화 50주년이다.

저작권자 © 투데이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