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은지 칼럼니스트

【투데이신문 이은지 칼럼니스트】한국사람 치고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모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학교에서 배포하는 청소년 권장도서 목록의 한 자리에는 헤세의 『데미안』이나 『수레바퀴 아래서』가 빠지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어렸을 적 정확히 어떤 계기로 『데미안』을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데미안』은 원래부터 그랬다는 듯이 유년 시절의 한 켠에 놓여 있었고, 그만큼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헤세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비슷한 감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싶다.

특히 작품 속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는 데미안의 쪽지 구절은 마음을 찌르르하는 구석이 있어 꽤나 회자되었다. 그 뒷문장을 보면 세계를 깨뜨리고 태어난 새는 ‘아프락사스’라는 신에게로 날아간다고 적혀 있는데, 아프락사스는 “신이기도 하고 악마이기도 한” 양면적이고 이교적인 신이다. 데미안은 주인공 싱클레어가 순수하고 밝은 측면만으로 이루어진 유년의 세계를 깨고 나와 밝음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요즘 식으로 표현하면 어른들의 세계에 눈뜨도록 인도한다.

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던 1919년에 출간된 『데미안』은 독일의 젊은이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동시대 문인인 토마스 만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당대 젊은이들에게 끼친 영향에 버금갈 정도라고 비유하기도 하였다. 당시 전장에 나선 독일 청년들의 소지품에 『데미안』이 빠지지 않았다고 하니 대충 짐작이 간다. 작품의 마지막 장 또한 싱클레어가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통해 육화한 아프락사스를 체험한 뒤, 데미안을 따라 전장으로 떠나는 것으로 끝맺고 있다.

아프락사스의 모티브를 작품 전체 구도에 대입하였을 때, 전쟁과 평화가 공존하는 혼돈의 세계야말로 새가 날아가야 할 곳이라고 적시하고 있는 듯하다. 내면의 자아를 찾는 추상적이고 신비로운 과정 끝에 전쟁이 기다리고 있다니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물론 1차 대전이 발발할 당시 유럽인들은 그토록 궤멸적인 결말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고, 권태로운 세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경기를 부양하는 낭만적인 개념의 전쟁이 또 한 번 찾아온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세계가 파멸하는 와중에, 혹은 세계의 파멸을 통해 완성되는 자아가 신비로운 내면으로 가득 차 있다니 의뭉스럽기 그지없다.

독일의 헤세 붐은 1930년대에 일본으로 건너왔으며 젊은이의 방랑과 낭만, 자연과 전원을 노래하는 헤세의 작품들은 당대 일본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1939년 헤세 전집이 출간되고 1941년 헤세 선풍이 최고조에 달했다는데, 그 시기가 2차 대전과 겹치는바 혼돈의 세계를 돌파하는 헤세의 자아상이 시대의 욕구에 정확히 부응했으리라.

한국의 헤세 수용 또한 일본의 그것과 유사하게 진행되었다. 해방 이후 1950년대에 헤세의 소설 여럿이 번역 소개되던 중에 자아실현을 역설하는 『데미안』이 그중에서도 큰 반향을 얻었으며, 이후 꾸준히 중복 번역되었다. 특히 60년대에는 1964년 전혜린의 번역을 시작으로 1969년까지 해마다 재차 번역이 되었는데 지나치다 싶을 정도다. 『데미안』에 대한 병적인 애호는 계속 이어져 80년대에는 15편의 번역이, 90년대에는 무려 31편의 번역이 출간되었다고 한다!

헤세에 열광하기는 독일과 일본도 매한가지였으나 독일의 경우 『황야의 이리』를 비롯한 헤세의 여타 작품들이 비교적 고루 애호되었고, 일본은 헤세의 문학에 나타난 동양적인 요소와 자연에 대한 이해에 공감하며 헤세를 애독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전후부터 8, 90년대에 이르기까지 『데미안』에 편중하여 헤세가 읽힌 기현상은 타국과는 또 다른 사회적 차원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해방 직후 한국사회는 그릇된 세계관과 사욕에 사로잡힌 지도자들이 연달아 집권하며 식민 시절과 다를 바 없는 자유의 예속 상태가 장기화되었고, 이 더러운 현실을 끌어안으며 자기 운명을 개척할 수밖에 없는 한국의 상황과 『데미안』의 주제의식 또한 오래도록 공생하였을 것이다. 헤세의 아름다운 문장들을 통해 감화를 얻는 우리의 심성에도 그러한 사회적 무의식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으리라. 이 사회가 제 살을 깎아먹으며 숨 가쁘게 달려오는 동안 그 끔찍한 고통을 외면케 하는 수많은 진통제 중 하나로 헤르만 헤세가 처방되었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니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거칠게 말하면 우리는 이 기형적인 사회를 정당화하는 프로파간다로서 헤세를 읽어왔다.

진흙 속에 피는 연꽃마냥 비루한 현실을 먹고 자라난 아름다운 심성에 치유 받고 안도하는 동안, 진흙은 더 깊숙한 곳까지 발목을 잡아끌어 더는 헤어 나올 수 없는 지점까지 이른 것만 같다. 사회의 모순에 깜깜한 이들을 재생산하는 행태는 오늘날 더 은밀하거나, 혹은 더 노골적이다. 『데미안』이라는 희대의 진통제와 유사한 최면제들이 도처에 수두룩하니 현실은 답이 없다. 우리는 모두 헤세를 좋아해! 하지만 언제까지 헤세만 좋아할 수는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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