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우 칼럼니스트
▸철학박사
▸상지대학교 강의전담교수

【투데이신문 이종우 칼럼니스트】전제군주가 나라를 다스리던 시절, 왕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고, 나쁜 신하들을 단속하며, 백성들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장치를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아마 전제군주가 있었던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에 걸쳐서 두루 있었던 현상일 것이다. 그 예로 고대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는 넓어진 영토를 다스리기 위해서 전국을 20여개의 주로 나누고 그 주에 총독을 파견하였는데, 여기에 ‘왕의 눈’, ‘왕의 귀’라고 일컬어지는 감찰관을 보내서 총독의 정치를 감시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당장 조선시대만 하더라도 의금부(義禁府) 같은 기관과 암행어사(暗行御史) 같은 직위가 이와 비슷한 사례일 것이다. 의금부는 1414(태종 14)년에 창설된 조선 시대 치안 유지 기관이었다. 왕의 직속 기관으로 왕명을 받들어 죄인의 조사를 맡았는데, 주로 역모 죄와 관련된 인사의 처벌, 왕족의 범죄, 다른 기관에서 판단하기 곤란한 사건, 사형 죄에 관한 최종 심사 등도 담당했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을 받고 지방행정의 잘잘못과 민심 및 백성의 생활 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던 임시직책이었다. 그래서 지방 수령의 잘못된 행정을 감시하고 바로잡았으며, 미풍양속의 사례를 찾아서 그에 합당한 상을 내리는 일도 담당했다. 특히 ‘암행’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 활동이 드러나지 않도록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고 다녔다고 전해진다.

의금부와 암행어사의 공통점은 모두 국왕의 명을 직접 받는 사법과 감찰을 위한 기관과 직위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법을 지키고 법을 어기는 존재에게 벌을 내리는 기관이 오히려 법을 어기는 일은 없었을까?

『정조실록(正祖實錄)』 44권의 기록에 따르면, 정조 20년이었던 1796년, 정조가 의금부의 꽤 높은 관리였던 윤사국(尹師國)·송영(宋鍈)·이익운(李益運) 세 사람이 먼 변방으로 안치(安置)하라는 명을 내린다. ‘안치(安置)’라는 말이 한자로만 보면 그럴싸해 보이지만, 일종의 귀양이나 추방령과 유사한 것이었다. 그들의 이런 벌을 받게 된 이유는 그들의 탈법과 권력 남용 때문이었다. 정조가 의금부의 공문서를 검토하다가, 이들이 죄를 면해준 사람의 이름이 다시 기록이 되거나, 부당하게 죄인으로 이름이 올라간 사람의 이름이라 빼라고 했던 이름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것이다. 이전에는 정조가 의금부의 이 세 관리가 처리한 것에 대하여 사후 보고가 없어서, 그대로 믿고 별 조치를 취하지 않았는데, 실제로 확인해보니 이런 사단이 난 것이다.

암행어사의 경우도 비슷하다.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암행어사 역시 자기가 속해 있는 당파나 인연이 있는 가문의 관리를 두둔하는 등 문제점을 발생시켰으며, 하급관리들의 부분적인 비행만을 들춰내는 데 그쳐 근본적인 행정개혁이나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암행어사[暗行御史]」, 『한국고중세사사전』, 가람기획, 2007.)

국가정보원이 이탈리아의 한 업체에서 해킹 프로그램을 구입해서 사용한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국정원은 이것이 실험용이며, 대북 첩보를 수집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남파간첩이 북한에 카카오톡으로 정보를 보내겠는가? 국정원의 변명이 매우 옹색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정조가 전직 의금부 관리 세 명에게 벌을 내리면서 했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법이란 세상을 격려하고 둔한 것을 연마하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법관이 법을 지킨 다음에야 사람들이 두려워할 줄을 알게 된다. -(중략)- 근래에는 비록 모든 일에 책임을 모면하는 것을 능사로 삼고 있지만 당당한 의금부의 금석 같은 막중한 법을 집행함에 있어 마치 길거리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듯 하는 습성이 있으니, 나라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로 인한 후일의 폐단을 생각하니 서리가 내리면 장차 얼음이 얼게 된다는 비유로만 말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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